선한 목자 - 시편 23편을 통해 본 성경적 참 목자상
케네스 베일리 지음, 류호준.양승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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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양 떼 목장에서 양을 보았던 것이, 그나마 많이, 가까이서 보았던 경험이다. 그러다보니 목자는 더더욱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하는 성경, 그리고 그것을 설교로 듣고, 심지어 해당 주제에 대해서 설교를 하는 것 역시 별 감동이 없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비유는 원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주어진 것인데, 오히려 그 비유를 들으면서 마음으로부터 낯선 기분을 느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많았던 것 같다.

 

이 책. ‘선한목자는 중동에서 무려 40년이나 성경을 가르쳤던 케네스 베일리가 썼다. 중동에서 살며 해당 주제에 대해서 경험한 저자의 이야기들, 오랜 시간 이 주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던 저자의 해석들은 그동안 목자. 양에 대한 낯선 느낌을 가졌던 나에게 해당 주제에 대해서 정말 훌륭한 간접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왔다.

 

우선 이 책은 초대 교회에서 중요한 이미지로 여겨졌던 선한 목자에 대한 이미지를 살려 내는 것에 많은 기여를 한 것 같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많은 것들로 비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한 내용은 구약과 신약에 걸쳐 내용도 많거니와,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이것을 집어냈고, 특히 그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시편 23편을 기본 자료로 삼아, 이 시편에 등장한 목자와 양의 이미지가 다른 본문들(예레미야 23. 에스겔 34. 스가랴 10. 누가복음 15. 마가복음 6. 마태복음 18. 요한복음 10. 베드로전서 5)에서 어떻게 발전해서 해석되고 있는지를 추적한다. 이러한 작업은 성경의 저자들이 하나님을 목자로서, 그리고 사람들을 양으로 비유하기에 참으로 적절했다 생각했다는 것과, 그것을 묵상하고, 자신들에게 적용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 사는 우리에게도 목자이시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양과 같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도와준다. 물론 성경의 본문을 주석하는 작업을 반복해서 이어가다 보니, 또한 본문이 바뀌지만 목자와 양이라는 주제가 반복이 되는 것이니 만큼 지루한 감이 조금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종류의 책에 익숙하지 않다면 앞에 시편 23, 혹은 관심 있는 본문만 발췌해서 읽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이 주는 큰 유익은 자칫 많이 지루해질 수 있는 성경 본문의 해석과 적용, 그리고 그것들의 발전 과정을 추적하는 일들을 적절한 예화로서 지루함을 덜어주는 것을 넘어, 때로는 감동적으로 목자와 양에 대한 이해를 갖도록 도와준다는 점이다. 중동에서 오랜 시간 살면서 목자와 양을 직접 보고, 그에 대하여 들은 이야기들은 성경 해석에 생기를 불어 넣는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 같다. 험한 골짜기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장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 목자의 소리를 알아듣는 양들, 그 외에도 저자가 중동에 살면서 경험할 수 있었던 특별한 이야기들은 분명 이 책을 재미있게 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0장에서 양들과 목자가 서로 가지는 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들었던 예화(비록 중동 지역과 목자, 양에 대한 예화는 아니지만!) 비행기 사고에서 위험을 무릎 쓰고 승객들을 구조한 기장과 구조된 승객들 사이에 일어난 연대감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과 우리에게 있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끈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게 하며 감동을 주었다.

 

아마도 미국 IVP에서 한 가지의 주제를 성경신학적으로 풀어쓴 책들을 시리즈로 발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책도 그 중에 하나인 듯하다.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성전 신학’.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역시 흥미롭게 읽었었는데, ‘선한 목자역시 그랬다. 선한 목자라는 하나의 주제가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나타나고, 발전하고, 해석되고 적용되는지에 대해서 잘 보여주었고, 이러한 저자의 작업을 통해 설교자로서 성경에 흩어진 목자 비유를 한 눈에 볼 수 있던 것도 큰 소득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은 선한 목자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양이다. 이 말을 좀 더 자세히, 그리고 생동감 있게 알고 싶다면, 그리고 그렇게 전하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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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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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풍성해진 것 같아 보이는데, 살면 살수록 경제적인 궁핍을 느끼며 힘들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에 따라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크게 줄었고, 여기저기에 아파트들과 자동차가 넘쳐나고 있고, 옷장과 신발장을 열면 입지 않는 옷들과 신지 않는 신발들이 널려 있다. 자본론이라는 책을 쓴 칼 마르크스는 상상이나 했을지 모르겠다. 세상이 이렇게 부요하게 될 줄을 말이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신음하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월가를 점령하라!”, “상위 1%의 자본가들이 전체 부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방값 걱정,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해 달라.” 는 구호가 세계 경제의 중심지라고 불리는 곳에서 수많은 시위대들에 의해 울려 퍼졌다.
굳이 미국까지 눈을 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는 것쯤은 당장 우리 주변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고서 생활 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만큼 버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굳이 통계를 들이밀지 않아도 뉴스에서 나오는 대졸자 연봉이 3천, 4천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내가 다른 나라에 사는 건 아닌가... 하며 박탈감을 느끼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의 저자, 와타나베 이타루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할아버지의 업을 따라 의대에 진학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농학부로 입학하여 관련 회사에 서른이 넘어 취업을 했다. 늦게 시작한 일이니 만큼 열심히 하고자 했으나, 열심히 할수록 점점 힘이 빠지는 일들만 생겼다. 착취하는 구조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비인격적인 관계들 때문에 저자의 몸과 마음은 지쳐만 갔다. 그러던 중, 저자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내부 고발자가 되는 신세가 되어버렸고, 자신을 감싸주는 동료 한 명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퇴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다.
아. 아니다. 한 명이 있었다. 그녀는 저자의 배우자가 될 사람이었고, 함께 구석진 시골에서 ‘다루마리’ 빵집을 오픈할 동업자였다. 저자는 막연하게 시골에서 빵집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녀와 결혼을 했고, 자신의 빵집을 갖기 전에 곳곳에서 빵 만드는 일, 경영하는 일을 배워나갔다. 30이 넘어서 두 사람 모두가 커다란 모험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저자가 다른 빵집에 들어가 직면한 현실, 그리고 2년 정도의 견습을 마치고 빵집을 마련하려고 했던 순간에도 마주친 현실은 회사에서 겪었던 부조리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빵을 만드는 곳이나, 빵집을 만들기 위하여 돈을 마련하는 모든 순간들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벗어나있지 않았다. 하루 15시간 격무에 시달리며 쥐꼬리만한 월급에 진저리 쳐야 했고, 빵집 오픈을 준비하고,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는 미국에서 시작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영향으로 인한 자금난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들을 겪으며 저자는 오히려 회사를 나온 이후에도 자신은 자본주의 세상의 한 가운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이야기 한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이 책은 저자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의 한 시골에서 천연누룩과 자연재배로 얻은 쌀로 만든 ‘주종 빵’으로 본격적인 사업을 하는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 특히 그 사업을 통하여 저자는 빵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천연누룩이 발효하는 과정을 보게 되는데, 자본이 그와 같이 잘 썩어져야(부패해야) 현대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들을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실천적 대안으로 소상공인적인 사업, 다시 말해서 각각의 사람들이 생산수단을 갖는 것과 지역화폐 개념을 소개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본이 순환하고 부패해야 천연 누룩균이 발효되는 것처럼 향기로운 냄새를 내고, 사람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중에서도 지역화폐 개념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던 터라, 저자가 인용하는 ‘엔데의 유언’부분과 이것을 실천하는 중이라는 저자의 말은 참 인상적이었다.

“이타카 아워(미국의 한 지역 통화 이름)는 우리 지역의 자원을 재활용함으로써, 지역 경제를 자극하고, 새로운 일자치 창출에 일조한다. 이타카 아워는 우리의 기능, 체력, 도구, 삼림, 들판, 강 등 우리 지역 원래의 자본에 의해 유지 된다....우리는 지역통화라는 발상을 빵집 나름의 모습으로 수정, 발전시켜서 이윤이 아니라 순환과 발효에 초점을 맞춘 부패하는 경제에 도전 중이다.”

이윤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데 사업이 운영이나 될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한 사업이 가능한 원인으로 ‘저렴한 임대료’를 꼽았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말한다.

“다만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해도 적자를 예사로 내서는 가게가 존속할 수 없다. 수입과 지출을 엇비슷하게 맞추고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이 중요하다. 손익 분기점 달성을 이루고 나면 투자한 만큼은 반드시 돌아온다. 그렇게 가게는 굴러간다. 이윤 덕에 덩치가 커지지도 않고 손실 탓에 위축되지도 않는 상태에서 다음날도 변함없이 빵을 구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임대료가 싸다고 해서 사업이 될 거면 모든 사람이 시골에 가서 사업 하면 되겠지. 저자는 당연히 빵집이니 만큼 맛있는 빵이 필수이고, 맛있으면서도 건강에 좋은 고급 빵을 적당한 비싼 가격에 파는 것을 사업이 지속되면서도 지역 경제를 돕는 중요한 요인이라 말한다.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을 만큼 엄청 노력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책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는 자신이 자연친화적인 빵을 만드는 것에 대한 장인정신을 추구한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불과 5-6년 정도 빵집을 운영했을 뿐인데, 어떻게 보면 이 분야에서 전문가라는 소리를 듣기엔 연차가 조금 적어 보인다. 그런데 빵이 얼마나 맛있었으면, 빵을 좋아하는 어떤 단골 손님의 아버지가 죽는 순간에 이 집의 빵을 먹고 임종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런 저자의 자랑은 읽으면서도 내 기분이 좋을 정도였다.

저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이야기, 자신의 빵집 이야기를 나름 조화롭게 구성했고, 저자가 실천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대안을 재미있게 그려냈다. 약간 산만한 면이 없지 않게 있기도 하지만...저자가 해당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도 아닐 뿐만 아니라, 빵집을 운영을 하는 것 역시 대가라 불릴 정도의 경험을 가진 것이 아니기에, 오히려 이러한 구성이 저자의 반짝이는 통찰과 도전하는 마음을 전하기에 적절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번 ‘골목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다’라는 책으로 ‘소상공인(신뢰를 바탕으로 운영하는 사업)’, ‘휴먼스케일(책임질 수 있는 만큼의 사업크기)’에 대한 개념을 접했는데, 이 책은 그 개념들의 적절한 실천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재미있고, 이러한 대안적인 삶이 있다는 사실에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이 작년에 나왔는데, 시골 혹은 자기사업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봤으면 나도 빵집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꾀나 있었을 것 같다. 난 둘다에 관심이 없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대안자본주의라는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어렵지 않게 술술 읽어볼만한 책이다.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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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 걷어 내기
우종학 지음 / IVP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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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시절, 교회 수련회에 가면 단골 강의들이 있었다. 기억에 남는 두 가지 강의. 하나는 대중문화의 실체. 또 하나는 창조과학. 전자는 당시 백워드매스킹?의 유행과 겹치며 온갖 음모론으로 가득한 무시무시한 강의였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강의는 지금도 있는 것 같다.(서태지가 싸이로 바뀐 것 빼고는 거의 흡사한 듯?) 난 이제 그런 음모론과는 빠이빠이. . 고등부 시절부터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런데 후자는 아니었다. 강의자들이 제공하는 정보들과 Biblicism이 절묘하게 합쳐진 창조 과학 강의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었다. .....신기하다. 신기해. 홍수전에 있던 사람들의 나이가 가능했던 이유, 궁창과 궁창 위의 물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 잘 기억은 나진 않지만 기타 여러 설명들. 성경이 과학으로 증명된다는 것이 마냥 신기했고. 내 믿음이 허위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 같아서 뿌듯해졌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내 신앙이 과학에 의해서 입증이 된다는 것이 어딘가 모르게 미심쩍었다. 엄청나게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 이전에 있던 이론들이 뒤집혔고, 앞으로는 더욱 빠르게 그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내 영원의 삶을 순식간에 변하게 되는 이론에게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하지만 생각은 딱 거기까지였다. 바쁘고. 정신없고. 할 일도 많은데, 창조과학이 옳은지, 그른지, 더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번에 접한 이 책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는 수년간 멈춰있던 생각들을 다시 하게 했다. 창조과학에 의심을 던지고 있던 생각들에 대해서 좀 더 개관적인 설명들을 확인해 볼 수 있었고, 이 분야 관련하여 내가 전혀 모르는 영역들의 논의가 이미 엄청 진행이 되어 있다는 것 또한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는 나에게 정말 고마운 책이었다.

 

11개의 챕터로 나누어져 있으나, 크게 네 가지, ‘성경과 과학을 바라보는 입장들 - 과학과 신앙을 갈등 구조로 바라보는 것은 오해이고, 함께 할 수 있음을 주장함.’,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에 대한 비판 과학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 형이상학적 논리전개에 가깝고, 현재의 과학이 설명하지 못한다는 식의 접근으로 자기 스스로 오류에 빠지는 형국임’, ‘진화에 대한 오해와 설명 창조과학의 입장에서 말하는 진화는 무신론적 진화론. 진화. 진화 이론. 진화주의로 구분하여 알아야 함.’, ‘유신론적 진화론 진화를 통하여 인간을 만드셨고, 이러한 이론은 신앙과 모순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님.’ 등에 대한 개론적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리 개론적인 내용이라 하더라도 나를 포함한 상당수가 과학에 대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여 기자와 과학자의 대담 형식을 통하여 주된 내용을 전개한다. 그리고 혹시나 하여 이야기에서 진행했던 주제들의 핵심을 각 챕터마다 정리해 놓았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정말 친절한 책이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자신이 이러한 책을 내어 놓은 이유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나는 이성과 신앙 양심상 폭넓은 기독교적 시각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한쪽에 치우친 견해를 제시하기보다는 다양한 견해와 그 견해가 가진 장단점을 보여 주고 독자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이 옳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을 쓴 목적이자 동기였다.”

 

책의 본문에서도 몇 번 나오지만, 아마도 저자는 보수적인 신앙을 표방하는 교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집필했다. 창조과학이 아니면 불신, 심지어 이단 운운까지 하는 잘못된 상황에 크리스천 과학자로서 잠잠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용기를 낸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용기를 내어야 했다. , 고등부 사역하던 시절에 창조과학의 내용들을 아무런 생각 없이, 확인도 없이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것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그런데, 이 책 보면서 회심해야 할 사람이 아마도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물론 이 책의 주장들을 그대로 받기 힘든 부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창조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성경을 해석하여 가르치는 입장에서 겸손하게 받아야 하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연스레 이 분야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겼고, 창조 과학에 대한 맹신을 의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부담 역시 생겼다. 젊고 유망한 과학자로서 연구에 매진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데, 신앙적 양심을 따라서 이러한 작업을 사명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하는 저자의 태도가 책에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저자의 집필의도에 맞게 반응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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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그 목격자들 - 목격자들의 증언인 복음서
리처드 보컴 지음, 박규태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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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그 목격자들 목격자들의 증언인 복음서. 리처드보컴. 새물결플러스.

 


리처드 보컴은 현 신약 학계에서 꾀나 업적을 낸 학자이면서 요한계시록 권위자로 알려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접하기 전, 저자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관련하여 이름 정도만 얼핏 들었을 뿐이다.(그만큼 공부를 안했다는 얘기인가...^^::) 그런데 처음 접하는 책을 무려 800페이지나 되는 엄청난 것을 골랐다. 그 책은 예수와 그 목격자들이었다. 워낙 두께가 압도적으로 다가왔기에 다 읽을 수는 있을지, 혹시나 어려우면 안 되는데....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역자의 말 중에서 저자가 작정하고 썼다.” 는 말에 끌려 대단한 학자가, 작정 하고 썼다는데, 그것도 복음서가 증언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그랬다는데....하는 생각에 읽기 시작했다. 조금씩 읽어 무려 3주나 걸렸던 것 같은데, 복음서가 증인들의 증언이라는 사실을 여러 근거들을 들어가며 저자의 주장을 입증하는 것을 보면서 꾀나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글을 시작하면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나는 복음서가 증언이라는 인식을 회복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는 복음서가 역사라기보다 증언이라는 뜻이 아니다. 복음서가 증언이라는 말은 복음서 같은 종류의 역사 기록은 증언이라는 뜻이다....다른 모든 지식과 마찬가지로, 역사도 증언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저자는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20세기 들어 복음서가 양식 비평에 의해서 증언 자체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어느 정도 긴 시간을 두고, 특정 전승이 여러 공동체들의 상황이나 필요에 의해서 첨가되거나, 변경된 전승으로 읽히는 것이 인기를 얻었던 것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특히 양식 비평의 관심이 역사적 예수 연구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학문적 분위기와 연관이 되어 있다. 보컴은 이러한 분위기가 옳지 않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양식비평이 가지고 있는 모순점들, 현재 받고 있는 비판들을 소개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1. ‘파피아스의 증언을 토대로 복음서를 당시 그리스-로마 역사가들의 구술 역사와 비교하고, 2. 인명학 당시 유대지역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이름들을 분석해보고, 3. 증인과 증언들을 강조하고 있는 복음서 자체의 내용들과 그것을 더욱 드러내 보이는 인클루지오 기법을 강조하고, 4. 바울 서신이 증인들과 증언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확인하고, 5. 당시 흔하게 쓰였던 암기와 정밀한 필사작업에 대해서 말하고, 6. 현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개인의 기억과 증언이 사회 집단과 갖는 관계성을 언급하며 복음서의 증인과 교회가 갖는 관계들을 추적하고, 7. 증인과 증언에 의존하는 역사 기술이 중요하면서도 필수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말하고, 8. 마지막으로 복음서의 내용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사건과 말씀이 갖는 독특성과 그것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을 홀로코스트 사건과 살아남아 증언하며 증인의 역할을 했던 것과 비교한다.


 

또한 각각의 방법들을 각 복음서의 구절들에 적용하며 각각의 말씀들이 복음서가 증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들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각각의 방법들을 소개하고, 직접 복음서를 분석하기 위하여 방대한 작업을 했기 때문에 요약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여러 방법들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복음서 자체가 증인들을 강조하고 있다는 부분이었고, 그렇게 중요한 증인들을 다루는데 이 중요한 증인들의 안전을 위해서 복음서 저자들이 고의로 누락했을 것이라는 추정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한 종의 귀를 잘랐던 베드로의 이름을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언급하지 않는 것과 예수님께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던 나사로의 이름들이 공관복음서에 빠져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워낙 치밀하고, 방대한 작업을 모아놓았기에 이 책이 흥미롭기는 했지만 소화하고 따라잡기에 솔직히 힘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저자가 내가 믿고 있는 바를 학문적으로 입증했다??!!!??는 생각에 우선 기분 좋게 읽으면서 책을 읽기 전부터 편견을 가지고 읽었던 것이 빤히 드러나는 것 같기도 했다. 양식 비평을 잘 모르는데 양식 비평을 비판했다고 생각하며 읽으니 기분이 좋더라!(이거 너무 솔직하게 쓴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책이 어마어마한 저자의 노력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양식비평과 역사적 예수 연구가 학자들의 추정(믿음)을 근거로 하여 각고의 노력들 끝에 수많은 연구 결과들이 쏟아져 나왔고, 현재 학계의 분위기를 형성했던 것과 같이 학계에서 복음서를 증언으로 보는 분위기들이 형성될 수 있는 것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갖게 할 수 있지는 않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 복음서가 예수님을 목격한 증언이라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은 분명 나와 교회들의 모습을 크게 바꿀 것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이러한 태도는 역사 가운데 유별나게 독특했던 사건들의 증언이니만큼, 우리는 복음서에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게 할 것이고 우리를 좀 더 신실한 증인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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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빙 다빈치 - 세속주의 문화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의 답변
낸시 피어시 지음, 홍종락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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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쉐퍼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도 벌써 오래다. 그의 책들을 읽으면서 세속주의에 대안을 제시하는 그의 주장에 설득당하고, 가슴이 뛰었던 기억이 있다. 특히 쉐퍼의 책들 중에서도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결론 부분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개인적 평안과 풍요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증대되고, 전쟁들과 전쟁의 위협들이 강화되고, 폭력과 테러가 확산되고, 세계의 식량과 자원들이 점점 고갈되어 간다면....그들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건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오직 두 가지 대안이 있는 듯하다. 첫째는 강요된 질서이고, 둘째는 우리 사회가 다시 한 번 애초에 혼란 없는 자유를 제공해주었던 그 토대-셩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천명하는 것이다....성경적 메시지는 진리이고, 그것은 진리에의 헌신을 요구한다....문제는 세계관이다.....”

 

이 책, 세이빙 다빈치의 저자 낸시 피어시는 이토록 기독교 세계관에 집중하고, 그것을 설파했던 쉐퍼의 충실한 제자이다. 그녀는 스위스의 라브리 공동체에서 쉐퍼를 만나면서 성경의 진리가 인생과 온 우주의 궁극적 질문에 대해 답하고 설명할 수 있는 적실한 진리임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스승의 길을 따라서 현 시대의 사조가 있기까지의 철학사들을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분석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생각들과 그 기저의 세계관들을 분석하는 일에 오랜 시간 매진하여 10년 전, ‘완전한 진리라는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후, 그녀는 완전한 진리를 바탕으로 하여 세계관이 모든 예술의 중심에 있고, 수 세기에 걸친 예술작품들을 실례로 들면서 예술작품들이 그저 자연이나, 특정 장면을 베낀 것이 아니라, 저자들의 세계관을 표현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문화들 기저에 있는 세계관을 분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애타게 주장한다. 그것이 세이빙 다빈치의 핵심 주장이다.

 

이 책은 크게 두 개의 챕터 1. 세속주의의 전 세계적 위협과 2부 세속주의로 가는 두 갈래 길로 나누어져 있다. 1부에서는 세속화된 세상의 위험성, 특히 사실과 가치를 분리하여 사고하는 것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지고 있고, 실제로 무수한 생명이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주장한다. 2부는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사고를 통해 나타난 예술 작품들, 그리고 현재의 대중문화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여러 영화들을 살피면서 각각의 작품들은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특히 사실과 가치를 분리하면서 나타난 세계관들이 인간 세상에 얼마나 악하고 부패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러한 큰 흐름에서 저자가 놓치지 않고 전개하는 중요한 주제가 있다. 그것은 아래의 그림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륙적 전통 낭만주의의 후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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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적 전통 계몽주의의 후계자

 

근대 예술의 두 흐름

관념주의 과학적 세계관에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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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과학적 세계관을 묘사

 

20세기 예술

표현주의 주관적 감정의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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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주의 객관적 형식의 분석

 

어디선가 많이 본 구분이다. 다름 아닌 쉐퍼의 책들에서 볼 수 있는 이층구조이다. 쉐퍼의 책, ‘이성으로부터의 도피를 보면 이러한 이층 구조는 아퀴나스가 자연과 은총의 영역을 분리한 것을 이러한 사상의 분열의 시초로 본다. 그리고 칸트에게서 나타나는 자연과 자유의 구분을 중요하게 제시하는데, 이는 칸트의 철학이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에 큰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 낸시 피어시는 칸트의 주장을 간단하게 살피고, 쉐퍼의 이층 구분을 그대로 가져와 위의 표처럼 발전시킨다. 그리고 위층과 아래층에 속한 그림들, 음악들, 적기는 하지만 건축물들에 이르기까지 예술작품들을 살핀다. 끝으로 현대의 대중문화, 그중에서도 여러 영화들을 가볍게 살피면서 그러한 영화에 스며든 세계관들을 살피며 결국 우리가 접하는 문화의 중심에는 세계관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저자는 쉐퍼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일치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예언자처럼 역설하듯, 비슷한 권면과 호소를 반복해서 한다. 그중에 눈에 뛰는 구절 몇 개만 보자면 아래와 같다.

 

궁극적인 목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배경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복음은 단순하지 않다. 오늘날의 세계화된 세속 문화는 성경의 메시지를 고려할 수조차 없도록 미로처럼 복잡한 정신적 장벽들을 세워놓았다. 세계관 분석의 목표는 그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서구 사회가 과학에 열광하면서 예술과 종교가 주변부로 밀려난 형편이니, 그리스도인이 자연스럽게 예술가에 관심을 보이고 그들의 곤경에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글쎄. 그렇지는 않다....그들도 두 진영으로 나뉜다. 전형적인 교인들은 예술에 도덕주의적으로 접근한다....그런가 하면 자신은 근본주의자가 아니라하면서 거의 모든 것에서 바람직한 요소를 찾아내는 이들도 있다. 세계관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이러한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접근할 때 그리스도인은 예술의 미적 특성을 향유할 뿐 아니라 예술을 이끄는 관념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할 도구를 얻게 된다. 성경의 진리는 매우 풍부하고 다차원적이기 때문에 그에 힘입어 모든 세계관에서 참된 요소를 가려낼 수 있고, 동시에 각 세계관의 오류를 비판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예술가들이 비인간화를 초래하는 과학적 환원주의의 충격에 대안을 찾이 못하고 절망한 나머지 울부짖을 때 우리는 어디 있었는가? 우리는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였는가? 문화적 이정표들을 읽어 내고 있었는가? 가장 가까운 선교 현장이라 할 수 있는 주위 사람들의 언어를 해석해 냈던가? 하나님의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막다른 길에 이른 이들의 곤경에 대해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오늘날 바흐 같은 작곡자가 있을까? 성경적 진리를 탁월하게 표현해내어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 나서도록 이끄는 음악과 미술이 있을까? 그리스도인은 현대 문화의 타락을 비판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소매를 걷어 붙이고 긍정적인 해결책을 만들어 내야 한다. 나쁜 문화는 좋은 문화로만 몰아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세계관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그것을 근대와 현대의 예술품들을 대상으로 분석한 저자의 수고가 돋보이는 책이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 되었지만, 쉐퍼의 저작을 읽었던 느낌이 살아난 동시에 그 책들보다 훨씬 쉽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쉐퍼의 저작들이 거칠거나, 철학적인 사조를 살피고 분석하는 것에 집중하기에 어려운 점이 분명 있다. 그러나 저자는 세계관의 내용을 좀 더 쉽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부단히 애를 쓴 것 같다. 또한 여러 미술작품, 음악과 건축물까지 살피면서 세계관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저자나 작가의 세계관이 예술품에 어떤 식으로 표현이 되는 지를 보여줌으로서 저자의 주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세계관도 세계관이지만, 예술작품들을 접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오만가지 핑계를 가지고 미술작품 한 점 보지 않은지 얼마나 오랜지....^^:: 특히 책값이 3만원인데, 여러 그림들을 컬러로 실어 놓았다는 건, 아무래도 이 책이 가진 큰 미덕이 아닐까 싶다.^^

 

예술작품들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소개하는 글들이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더군다난 국내 번역된 작품들은 더더욱 없다 들었다. 그러한 점에서 세이빙다빈치는 괜찮은 저작일 수 있다. 하지만 쉐퍼의 저작들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들이라면,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쉐퍼의 생각들이 발전했다거나,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특정 세계관들을 강요받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기독교인으로서 세계관의 중요성과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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