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 아우구스토, 리사니아는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위협을 느낍니다. 경찰은 비폭력 시위를 하고있는 무리를 향해 물대포를 쏘아댑니다. 중요 인사의 방문을 앞두고정부 당국은 노숙자들을 거리에서 몰아냅니다.그렇기에 그리스도교인들은 무력한 사람들을 자신의 시야에서 몰아내는 삶을 살면 안 됩니다. 그들의 존재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매우, 근본적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 P128
즉 예수는 대사제가 이미 세계를 제대로 볼 줄 알고 이를이해할 범주를 가지고 있다고, 그럼에도 이 범주가 진정 의미하는 바를 전혀 모르는 듯이 이를 사용하고 있다고 되묻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이 심판대 위에서 드러나야 할 것은 예수의 정체뿐만이아닙니다. 종교적인 언어 체계 전체(적어도 예수를 고발하며 사람들이 쓴종교 언어 체계) 또한 심판대 위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합니다. 재판 중에 대사제의 입에서 나온 ‘하느님‘ 그리고 기름 부음 받은 사람(그리스도)‘과 같은 말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까? 그가 진실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면 그는 예수의 말을 듣자마자 침묵하게 되거나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요?그렇게 본다면 "그것은 너의 말이다" 라는 예수의 대답은 실은 질문자를 향해 이렇게 되묻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너는 너 자신을 알고 있느냐? 그리고 너의 역사를 알고 있느냐? 너는현란하게 이스라엘 종교의 언어를 쓰고, 그 형식을 따른다만 거기에 실제로 머무르고 있느냐, 그 언어와 형식이 가리키는 바를 진실로 따르고 있느냐? - P73
이때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쭉 하느님을 거슬러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녀는 즉시 이를 부인하고 무시하려 합니다. - P78
오늘날 교회는 자신을 보존하는 것만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고이를 위해서만 싸우고 있어. 그 결과 인류와 이 세계에 화해와 구원을가져오는 말씀을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렸단다. - P82
마태오의 복음서는, 알아보는 능력 곧 지혜 안에서 살아가는 데 결정적인 그 능력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있음직하지 않은 것들과있음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연결될 때임을 보여줍니다(다시 한번 1장에나오는 미혼모 마리아, 간음한 바쎄바, 그리고 평판이 좋지 않은 여인들이 어떻게연결되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이 연결은 언뜻 터무니없이 보입니다). 이에 관한 가장 분명한 예는 마태오의 복음서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에 관한 위대한 비유입니다. - P87
신부는 자신이 걸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들고선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나 당신은 ‘이 유대인‘을 알지 않소?" 호프만은 신부의 얼굴에 주먹을 갈겼다. - P90
그러므로 하느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 첫 번째로 할 일은 (최근 한신학자가 말한) "희생당한 이의 관점" The intelligence of the victim을 갖는 것입니다. 희생당한 이의 관점을 갖춰야 하는 이유는 희생자가 되는 것이그 자체로 선하거나 거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희생당한 이의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힘을 추구하는 체제에서 배제된 이들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모든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우리가 힘을 가져야 한다는,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희생자는 힘을 추구하는 이 세계의 질서가 자신의 할 일을 마친 후에 내팽개친 이, 버린 이를 가리킵니다. 그렇기에 희생자는 그 존재 자체로, 자기야말로 인간의 필요와 문제에 포괄적인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이념, 제도, 체제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희생자의 편에 섬으로써 우리 또한 그러한 주장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 P96
예수가 자신이 메시아임을 비밀로 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를여러 치유자,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치부하려는 경향에 완강하게 맞섰습니다. 예수가 이 세계에 가져온 가능성은 저런 것들과 견줄 수 없습니다. 그는 진실로 이 세계가 나아가는 길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으며 그러한 변화는 단순히 인간이 처한 상태를 개선한 정도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 P50
달리 말하면, 복음은 낯선 이야기, 낯선 소통 방식을 통해 그 안에담긴 핵심 주장이 얼마나 낯선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며 살아 숨 쉽니다. 그 핵심 주장이란, 이 세계로 오셔서 버림받고 실패하고 끔찍한 고난을 받으며 생을 마감한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 세계를 다시 빚어내셨다는 말입니다. - P51
비로소 하느님의 초월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무런 유익도 없는 이의 증인이 되어갈 때, 그의 ‘쓸모없음‘을 되새기고 그를 따라 쓸모없어질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진정 예수가 누구인지 이야기할수 있습니다. - P59
우리 자신을 어떻게든 정당화하려는 노력에서 벗어날 때, 어떻게든 안정감을 얻고자 하려는 움직임을 멈출 때,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 자신이 세운 기준을 들이대어 모든 것의 이치를 따지는 과정을 중단할때, 그리하여 온전한 의미에서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알든 모르든)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 P59
<우리는 모두 자살 사별자입니다>. 고선규. 창비.단숨에 읽었는데, 가볍게 읽을 수 없었다. 자살에 대해 더 알고 싶었고, 전보다 바르게 위로하고 싶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 할 말이 더 없어진것 같다. 고인이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가족들조차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단다. 원인을 알 수 없어 당혹해하고 있고,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별자들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한다. 장례를 치르고, 위로해야 하는 목사로서 책의 내용에 공감했다.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할 수 있을까. 수많은 죽음을 접하면서 그 죽음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원숙하게 대처하는 사람은 여태 보지 못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싶지만... 하물며 자살을 대하는 사별자나 사별자 곁에 있는 우리는 또 얼마나 그 죽음 앞에 어설플 수밖에 없는가? 생소한 분야이고, 우리나라에서는 특히나 전문가가 부족한 상황이고, 저자 역시 오랜 경험이 쌓인 것 같진 않다.(물론 이 분야에서 손에 꼽히는 전문가이다. 이 분야 자체가 생소하다고 한다) 사별자들을 대상으로 했던 강연을 책으로 엮었다. 워낙 예민한 주제이고 정말 많은 이들이 이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고 모두가 쉬쉬하는 분위기에서 이 책이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추천한다.자살 사별자에게 왜..어쩌다가...라고 되묻지 말아주세요. 함부로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 그럴만도했다...라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정 위로를 건네고 싶다면 그저 힘든 시간을 보내셨겠군요..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105p
자살 사별자에게 ‘왜‘ ‘어쩌다가‘ 라고 되묻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함부로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 ‘그럴 만도했다‘ 라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정 위로를 건네고 싶다면그저 ‘힘든 시간을 보내셨겠군요‘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 P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