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시 - 상
살만 루시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세계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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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쩌면 악명 높은 책이라고 해야할까. 어떤 책을 썼다고 해서 그 작가에게 현상금과 함께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책이 진열된 서점이 테러를 당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번역자가 칼로 난자당해 죽는가 하면, 영국과 이란은 외교분쟁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 대부분의 책에 대해서는 어떤 계기로 그 책을 선택해서 그 시기에 읽기 시작했는지를 다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 블로그에 이런 글을 뚜닥거릴 때 거의 그런 계기부터 적어놓곤 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해서는 그런 계기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또 다 읽는데 열흘 정도 걸렸는데 왜 열흘 전에 수많은 쌓인 책 중에 이 책을 집어들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상하게도 나에겐 이런 게 중요하게 느껴진다..  

다 읽고 나서 가장 놀란 것은 이 책이 그저 '소설'이었다는 것이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그 정의부터가 작가가 꾸며낸 '있을 법한 일'이지, '있었던 일'인 사실이거나 '액면가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이렇게도 생각해보자고, 더욱 단순하게 얘기하면 '웃자'고 꺼낸 이야기인데, 여기에 대해 '죽자'고 칼을 들다니. 난 이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잘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이 소설에 대한 이슬람 국가의 반응이야말로 이슬람을 부정적으로 볼 만한 강력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맘에 안들었다면 그냥 비난 성명 한 장이나, 자국내 판매 금지 정도로 끝낼 수는 없었던 것일까(물론 그 정도만 했어도 다른 나라들에겐 대단한 웃음거리가 되었겠지만 말이다). 꼭 죽이겠다고 칼을 들고 작가를 쫓아다니고, 번역자를 죽이고, 무고한 (하긴, 그들의 입장에서는 못된 출판사와 관련된 서점에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죄인이니 결코 무고하지 않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사람들까지 상하도록 테러나 해대다니. 이슬람이 자기들의 신과 예언자를 내세워 세상의 다른 종교나 무신론자와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들과 무신론자들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슬람 박멸을 외쳐야 할 것이다.  

소설을 둘러싼 사건에 대한 감상은 이정도로 하고.  

소설은 지금까지 읽었던 다른 어떤 소설보다도 정신 사나운 소설이었다. 폭발하는 비행기에서 떨어지면서 노래를 부르는 남자로부터 시작하는 것도 정신 없는데, 꿈과 현실과 마술적 현실(?)이 뒤섞인 구조에, 주어가 나오면 마침표는 대여섯 줄은 지나가야 찍히고, 게다가 영어와 각종 영어 사투리와 가지각색 인도어와 고전으로부터의 온갖 인용이 역자의 꼼꼼한 주석과 함께 들어오는 통에 도대체 이 문장의 시점은 무엇이고 내가 이 집의 어느 방에 서있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정말 한참 걸렸다. (잠깐 딴길로 새서, 30년전 출판된 발자끄의 <사촌 베뜨>도 찔끔찔끔 읽고 있는데 여기엔 정말 "역자주'가 없다. 역자의 주석이 자세하게 달려 있으면 물론 세밀한 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본문 중에 자주 끼어드는 역자주석은 아무래도 읽는 흐름을 자꾸 끊는다. 뭐랄까, 역자가 독자에게 작품을 떠먹여주는 느낌으로, 나는 '됐어요' 하는 축이다.). 그러나 일단 현실(마술적 현실(?) 포함)과 꿈이 대충 구분이 되고, 이게 누가 하는 말인지 파악되기 시작하면, 천사 같지 않은 천사, 악마 같지 않은 악마를 따라 무엇이 신이고, 무엇이 악마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만화경을 보듯, 퍼즐을 풀 듯, 미로를 짜맞추듯 머리를 쥐어짜며 읽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읽지 않은 이에게는 스포일러임)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모든 인도인에게서 사랑을 받는, 발리우드의 수많은 영화에서 주로 신의 역할을 맡았던, 인간적으로도 '사랑'의 능력이 넘치는, 이름도 천사의 이름인 지브릴 파리슈타와, 인도인이지만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가능하면 뼛속부터 자신을 영국인으로 재창조하려는, 천의 목소리를 가지고 TV 성우로 일하며 주로 외계인이나 사물들의 목소리 연기를 하던, 이름도 웃기는 살라딘 참차가 같이 탄 비행기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납치된 후 공중에서 폭파되는데, 에베레스트 높이에서 영국으로 낙하하면서 두 사람은 살아남는다. 그리고 땅에 떨어지는 순간부터 지브릴은 천사의 모습으로 (날개는 없지만 머리 뒤에 후광이 달린), 살라딘은 악마의 모습으로 (머리에 뿔이 나고 허리 아래는 염소 모양으로 바뀐다) 변한다.  

그렇다면 지브릴은 천사가 되고 살라딘은 악마가 된 것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겉모습은 천사요 악마이지만, 둘 다 자신의 몸이 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생각하는 것도 천사답거나 악마답지 못하다. 자신의 모습이 천사와 같이 후광을 머리에 얹었다고 해서 지브릴이 갑자기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한 일을 할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지브릴은 '사랑'의 능력과 함께 굉장한 바람둥이였다), 악마처럼 뿔이 나고 염소 발굽이 생겼다고 해서 살라딘 참차가 갑자기 사악한 생각을 하고 사악한 짓을 하는 것도 아니다. 천사의 모양을 한 지브릴은 영화를 보듯 꿈을 꾸는데, 꿈 속에서 자신은 대천사가 되어, 어떤 꿈에서는 마훈드 -혹은 무하마드- 에게, 어떤 꿈에서는 망명자 이맘, 어떤 꿈에서는 여자 예언자 아예사에게 계시를 내린다 (계시를 내린다고는 하지만, 지브릴은 항상 자기는 아무 말도 않거나 (아예사), 그들이 시킨 말을 하거나 (망명자 이맘), 마훈드의 경우에는 아예 자신이 마훈드이면서 대천사로서 말을 한다고 느낀다). 한편 더욱 비참한 모양으로 변한 살라딘은 꿈은 거의 꾸지 않지만, 일생동안 오직 진정한 '영국인'이 되기 위해 소심하고 착하게 살아온 결과물이 이런 것인가에 대해 절망하면서 그저 숨어지낼 뿐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살라딘은 갑자기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오지만, 지브릴은 갑자기 머릿속에서 음성을 듣고 나팔을 사서 들고 다니며 자신이 진짜로 천사로서 신의 뜻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지브릴을 사랑하는 알렐루야 콘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금발의 얼음여왕이며, 애초에 지브릴이 인도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영국행 비행기를 타도록 만든 여자)은 지브릴의 '정신분열증'을 치료하려 노력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살라딘 참차는 알렐루야 콘과 함께 있는 지브릴을 보고 새삼 질투와 원한(처음 악마의 모습으로 변해서 경찰에 끌려갈 때 자신을 외면한 지브릴)에 사로잡혀 정말로 사악한 짓을 해서 커플을 갈라놓게 되고, 살라딘은 가책을 느끼지만 지브릴은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아무튼 나로서는 천사가 되었다는 지브릴이 예쁘게 보였던 적이 없었고, 악마가 된 살라딘이 가엾지 않은 적도 없었다. 딱 한 페이지에 걸쳐, 이 소설의 진짜 화자 -신인지 악마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지브릴과 살라딘을 선택해서 각자를 천사와 악마로 변형시킨 그 이-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분은 왜 하필 지브릴이고, 왜 하필 살라딘이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이게 옳은지 저게 옳은지 밝혀달라고 요구하지 말아라. 계시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난다. 창조의 규칙은 명확한 편이다: 이것저것 만들어 차려놓은 다음에는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는 것이다. 만들어 놓은 뒤에도 넌지시 힌트를 주거나 규칙을 바꾸거나 결과를 조작하거나 하면서 일일이 간섭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2권 p176)'고,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떠드실 따름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이분이 처음부터 불쌍한 지브릴, 불쌍한 살라딘, 불쌍한 인간들을 데리고 천사 만들기 악마 만들기 놀이를 했냐는 것이다. 그것도 겨우 겉모양만 바꾸는. 겉모양을 바꾸어 주면 속도 겉모습에 어울리도록 바뀌는지 보고 싶었나? 그런데 창조의 규칙을 아는 분에게 이런 실험이 왜 필요한가? 어차피 자기가 정한 규칙대로 갈텐데 말이다..  

어쩌면 그가 규칙을 만들었지만, 규칙을 따르고 따르지 않고 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에 달린 건지도 모른다. 즉 인간은 천사 옷을 입히면 천사가 되고, 악마 옷을 입히면 악마가 되는 단순 명쾌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아니면 애초에 '창조의 규칙'을 정한 자 따위가 없든지……. 그래서 지브릴은 총알을 삼키고, 살라딘은 후회를 하는지도.  

위키에서 이 소설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찾아보았다.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구나. 이 소설이 이슬람권에서 그렇게 강력한 반발을 일으킨 원인에 대해서, 원제인 'satanic verses'를 아랍어로 번역했을 때, 그것이 '악마적인 꾸란'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 이슬람이란 문화에서 '소설'이란 장르에의 노출이 적다는 점, '풍자'와 '패러디'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 문화 속에서라면 애시당초 이 소설이 '웃자'고 달려든다는 것을 몰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이슬람에서 그런 반응을 보이기 전에는 소설의 '예언자 마훈드'가 이슬람교의 '무하마드'인지도 대부분 몰랐었다고 한다. 이슬람 세계가 그렇게 작정하고 칼을 들고 나선 덕분에 서구인들은 오히려 이 소설이 그저 풍자이거나 패러디가 아니라 이슬람에 대한 일말의 진실이라도 담겨 있는게 아닌가 하는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노이즈 마케팅에도 성공적이었고 말이다. 하여튼 무슨 일이든 내가 보기에 '미친 짓'으로 보이는 일은, 상대방 입장에서 두세 번은 더 생각해 보고, 더 나아가서 그 입장에서 인정하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 위키의 기사에서 몇몇 타 종교의 대표자들도 이슬람의 행동을 지지 했다고 한다. 어떤 종교에 대한 모독이든 신성모독은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이유로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하는 생각들을 보면, 이분들이 이해가 된다. 이 소설의 신은 '알라 외에 신은 없다'는 이슬람의 신이지만, 사실 모든 유일신교의 대표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완전한 무신론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냥 소설, 어디까지나 '이야기'일 뿐이다. 소설 속의 시인 바알의 입을 빌려, 작가는 시인이 해야 할 일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 거짓을 손가락질 하는 것, 어느 한 편에 서서 논쟁을 일으키고 세상을 가다듬어 잠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정의에 입각해서, 어쩌면 천벌 받을 각오를 하고, 그 밖의 것을 인정하지 않는 신을 공격하고, 그의 손에 제대로 놀아나지 못하는, 그래서 가엾으면서도 떨어져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그린 것일 뿐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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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
마리오 푸조 지음, 이은정 옮김 / 늘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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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어 Corleone는 Lionheart, 즉 사자의 심장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시칠리아 코를레오네 마을의 마피아에게 가족을 모두 잃고 열두살에 미국으로 홀로 도망쳐온 비토 안돌리니가 자신의 성을 코를레오네로 바꾼 것은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었겠지만, 그것은 또한 생존을 위해 스스로 사자의 심장을 부여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소시적에 대부는 말수가 적고 성실한 젊은이였다. 일찍 결혼을 했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제과점에서 일하다가 동네 건달 우두머리인 파누치 때문에 일자리를 잃고도 한참을 막노동을 전전했던 그였다. 그렇지만 막노동만으로는 도저히 가족을 부양할 수 없어서, 우연히 알게된 클레멘자와 테시오의 강도단에 합류하게 된다. 이 때만해도 그는 강도짓으로 떼돈 벌거나 다른 가난한 이민자들에게 폭력적 권위를 행사해서 뜯어 먹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는 그저 안정적으로 살 만큼만 도둑질을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파누치란 놈이 또 그들에게 상납을 요구하자 그의 차가운 분노에 사자의 심장이 깨어난다. 그는 침착하게 파누치를 죽이고 증거를 없앤다. 파누치란 놈이 하도 나쁜 놈이었기에 대부는 동네에서 존경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는 파누치의 조직을 자기가 맡아서 그처럼 강압적으로 상납을 받는 것은 거부한다. 그는 존경을 무기로 자발적 상납을 받게 되고, 그때부터 대부는 법이 지켜주지 못하는 가난한 이탈리아-시실리계 이민자들의 보호자로 나서게 된다. 그리고 타고난 비범함으로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거절할 수 없는 제안'과 '설득("I will reason with him.")의 카리스마로 클레멘자와 테시오를 중간 보스로 거느리면서 뉴욕에서 막강한 마피아 패밀리를 건설하게 된다.  

대부의 시작을 보면, 그를 결국엔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잔인한 범죄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해서 그저 악인이라고 꽝 낙인 찍을 수는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니 오히려 그의 '사자의 심장'다운 자유의지와 그것이 실제로 행사되는 모습에 압도되어 감탄하고 경외심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약자를 괴롭히는 자들을 대신 응징하고, 약자들이 살 수 있도록 물심 양면으로 '우정'을 베푼다. 그 뿐만 아니다. 대부에게 신세를 지고 형편껏 갚는 사람들에게, 대부는 또 그 이상의 것을 돌려준다. 그의 세상은. 전직 경찰로서 나중에 마이클 코를레오네의 개인 경호원이 되는 프랭크 네리가 바라보듯, '노력한 만큼 댓가가 주어지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꿈 깨야 한다. 이건 모두 '내'가 그의 패밀리에 속해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의 패밀리에 속하려면 일단 대충 시칠리아인이어야 한다. (물론 톰 헤이건은 예외이지만). 그의 패밀리에 속하려면 자기 패밀리에 속한 사람만 인간으로 보는 잔인성도 필요하다. 그의 강력한 자유의지에 나의 의지 따위는 물론 필요도 없다. 한마디로, 그의 패밀리는 패밀리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압박하고 갈취해서 평화롭게 유지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꿈이 차라리 현실이었으면 싶다. 도대체 내가 왜 세상에 대해 신경을 써야하냔 말이다. 난 나를 보호해 줄 패밀리를 찾아야 한다!  

사실 이런 패밀리는 도처에 널려 있다. 우리나라에선 '줄'이라고 한다. 출신지역과 출신학교, 사는동네, 월수입, 친척의 배경 등의 요소가 복잡한 교집합을 이루어서 만들어지는 줄 말이다. 줄을 잘 서면 자기의 노력이 없이도 높은 지위에 오르고, 지위에 걸맞는 역할을 하지 않아도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나 역시 그런 줄 몇 가지에 접근할 기회를 갖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줄을 잡고 있는 이의 인격에 내 쬐꼬만 자존심이 콱콱 짓밟혔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돈 코를레오네 같은 심장을 가졌더라면 당장의 모욕 따위는 가뿐하게 참아주고 시간을 먹어서 언젠가는 그 줄을 내 힘으로 흔들겠노라 했겠지만. 한편으론 그 줄을 잡고 있는 사람의 인격이 돈 코를레오네 같았다면, 줄에 들어선 신참의 코딱지만한 자존심을 그렇게 밟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돈 코를레오네처럼 진정한 존경도 못 받고, 겉으론 우아하게 권위를 보이는 듯하지만 뒤에선 속빈 강정으로 비웃음을 사다가 결국 더 강력한 자유의지를 지닌 이에게 밟히고 별볼일없이 스러지게 되는 거겠지. 게다가 다행히도 지금은 돈 코를레오네가 패밀리를 세울 때처럼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되는 시대는 아니다.. 따라서 나는 그냥 힘없는 개인으로 물러나 살아도 된다..(.. 정말 그럴까..?)  

새해 둘째날 책을 잡고서 그만 첫 출근일 새벽 네시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해 끝장을 보고야 말았다. 무엇이 나를 몰입하게 한 것일까. 이야기의 흡인력. 강력한 자유 의지에의 감탄과 경외심. 그러나 자유 의지는 어떤 인간에게든 있다. 내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자유 의지들이 서로 부딪히고자 한다면,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되어 있다. 더 강력한 자유 의지에 복종하며 사는 것이 안전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자신의 자유 의지를 지키려고 한다면, 사실은 부딪힘을 피하고 개인으로 남으면 된다. 의사 줄스처럼 (물론 그도 결국은 패밀리의 일을 하게 되지만). 소니가 살아 남았다면 아마 마이클처럼. 나는 그런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돈 코를레오네의 시그너쳐라고도 할 수 있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란 말은 사실 발자크의 인물 보트랭이 <고리오영감>에서 한 말이다. 보트랭이 돈 코를레오네로 환생한 건지도 모른다. 말수를 줄이고 더욱 표정이 없는 얼굴로 말이다. 하여튼 대부를 보면서 발자크에 대한 존경심(!)이 더 높아졌다.  

*번역이 약간 문제가 있다. 존대와 하대가 왔다갔다 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고 지나친 의역으로 문장의 뜻과 느낌이 달라진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345쪽의 '그는 친구가 자기 장점을 과소평가 하게 하지 않고, 자기의 약점을 과대평가하게 하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누누히 강조했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원문은 'He claimed that there was no greater natural advantage in life than having an enemy overestimate your faults, unless it was to have a friend underestimate your virtues'로, '친구가 자기 장점을 과소평가하게 하지 않으면서 적으로 하여금 자기의 약점을 과대평가하게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또 'I will reason with him'은 단순히 '내가 결론을 내겠네'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reason with'라는 것은 단순한 담판이나 해결 이상의 의미가 있지 않나? 원문이 훨씬 깊고 무시무시한 의미를 내포한 듯 하다. 물론 읽기를 방해하는 정도는 아니다. 작품이 뛰어나다면 그 핵심은 어느 나라 말로 바꾸든 말을 뚫고 독자의 가슴에 꽂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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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뒤에 숨은 사랑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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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정체성 -'내'가 '너'가 아니고 '나'이게 하는 것들-은 어떤 것들로 이루어져 있을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특정한 '나'라는 사람의 경우에는 첫째는 나의 이름, 둘째는 남들에게 거의 보여 주지 않는 특이하게 생긴 신체의 어떤 부분이 아닐까, 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둘 다 만약 내가 선택할 수 있었다면, 세상에 남은 것이 그것밖에 없다 해도 절대 고르지 않았을, 그런 것들이다. 나조차도 종잡을 수 없이 폐쇄성과 적극성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이유가 이렇게 싫어하는 것들을 결코 떼어 버릴 수 없는 나의 일부로 붙여서 살아야만 했고,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특히 문제가 되는 건 이름이다. 신체 부분이야 보여주고 싶지 않으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름은 그렇지 않다. 이름은 내가 누군가와 사회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면 맨 먼저 주고 받아야하는 것이기에 결코 도망칠 수 없다. 그런데 이름이 이상하다면? 남자인데 이름이 주로 여자에게 많다거나 그 반대의 경우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름이 좋지 못한 뜻의 단어와 발음이 비슷하다거나, 발음하기 어려워서 한두 번 말해서는 상대방이 잘 알아듣지 못해 여러번 반복해야 한다거나, 아주 드물어서 리스트에서 매번 가장 먼저 눈에 띄거나 한다면? 그런 이름은 불려지고, 그 때문에 기껍지 않은 시선의 대상이 될 때마다 이름 주인(갖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떠맡고 주인 역할까지 해야 하는 불쌍한 주인)의 마음과 인격에 세상에 대한 은밀한 공격성을 심는 것이다.  

요즘은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선택한 이름으로 개명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난 개명을 할 생각이 없다. 아니 할 수가 없다. 왜냐면 이 이름은 내 기억에는 없는, 두 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사흘 동안 꼬박 고민을 하시면서 옥편의 거의 모든 한자를 뒤져서 골라주신 것이기 때문이고, 지금은 서른 해 이상의 나의 인생과 밀착된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코 좋아할 순 없지만 나의 '정체성'의 일부인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체념을 넘어 냉소적으로 내 이름으로 남들 앞에서 먼저 우스갯 소리를 할 경지(!)에 이르렀다.  

이 책은 네이버 <오늘의 책> 소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괴상한 이름 (이 소설에서는 '고골리') 때문에 고민하는 주인공이 이 책을 단숨에 주문하게 한 이유였다. 그렇게 해 놓고도 오랫동안 읽지 않은 책들 틈에 끼어있다가, 발자크 다음 고골의 중단편선을 읽은 후, 고골(리)을 아예 주인공 이름으로 하는 이 소설로 넘어왔다.  

주인공인 고골리 강굴리는 인도인-미국인 2세로, 가정에서는 미국을 늘 타국으로, 인도를 집으로 생각하는 부모님의 영향 하에 있지만 미국의 공립학교를 다니면서는 미국인의 생활습관과 사고방식을 그대로 체득하게 되고, 결국은 어느 쪽에도 얼마쯤은 불편함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우리의 고정관념 속에 있는 한국인-미국인 2세와 거의 다를 바 없는, 그런 의미에서 평범한 사람이다.  

고골리 강굴리에게 인도인-미국인 2세라는 것 외에 불편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고골리'라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사회적으로 불릴 인도식 이름을 짓기 전에 아명으로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으로, 고골리의 아버지 아쇼크는 10대후반-20대초반에 엄청난 기차 사고에서 요행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그 때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러시아 작가 고골리를 삶의 안내자,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어린 고골리의 진짜 (사회적) 이름은 인도에서 편지로 대서양을 건너오다가 분실되고, 아명과 (사회적) 본명의 구분에 무관심한 미국의 문화 때문에 그의 이름은 그만 고골리로 확정되고 만다. 철이 들어서 학교에 다니게 된 고골리는 자신의 이름이 뜬금 없고 (아버지의 열차사고 경험을 몰랐기 때문에), 특이한데다가, 성인지 이름인지를 묻는 질문이 항상 따라오고,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진짜 러시아 작가 고골의 삶 (완벽한 작품을 쓰지 못했다는 강박관념에 결국 마지막 원고를 다 불태우고 먹기를 거부하다가 의사에 의해 욕조를 가득 채운 고깃국물에 담궈지지지만 결국 아사해 버린 이)에 대해 알게 된 후에는 자신의 이름에 대해 완전히 질려 버리고, 열 여덟 살 때, 대학입학 허가서를 받아들고 부모님을 설득해서는 이름을 니킬 (잃어버린 할머니의 이름 대신 아버지가 주려고 했었던 사회적 이름)로 바꾸어 버린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자신을 언제나 니킬이라고만 소개함으로써 새로 태어난 기분을 느낀다.  

이제 고골리-니킬의 정체성은 더 복잡해진다. 열 여덟 살까지 고골리로 살아온 삶을 아는 사람이 열 여덦 이후 니킬에게는 없는,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 간에 단절이 생기고, '고골리'라는 이름은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아서 가슴에만 담긴 비밀처럼 변해 버렸던 것이다. 니킬로써 그는 학업을 지속하고 건축사가 되고 남들 하듯 연애도 하고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지만, 여전히 인도인 (태생이기에 자신의 일부란 걸 부인할 수 없으나 그 문화는 언제나 낯설게 느끼는)과 미국인 (그 문화대로 교육받고 사고하고 행동하지만 태생이 아니기에 어느 정도는 주변인으로밖에 머물 수 없는) 사이에서 부유하며 산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가 오랫 동안 살던 미국의 집을 팔아서 자신의 방을 정리하던 중, 아버지가 그가 아직 고골리였을 때 선물한, 그렇지만 그는 표지조차 들춰보지 않은 채 그냥 책꽂이에 꽂아 둔 고골리의 단편선을 발견하고 속표지에 쓴 아버지의 글을 보게 된다. 소설은 거기에서 끝나지만, 고골리가 그 때 무엇을 느꼈을지 독자가 함께 느끼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고골리는 결국은 자신이 한번도 '고골리'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것을 벗어나기에는 아버지의 삶과 그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도 컸으며, 그것은 또한 이름을 바꾸거나 그대로 두는 것 이상의 의미로 그의 삶의 바탕이었기 때문이다.  

역자의 소개나 책 뒷표지에 실린 문구대로 작가는 '이름이나 문화적 배경은 한 인간의 정체성과 어떤 연관을 맺는가?'라는 주제를, '사물을 묘사하는 섬세한 눈과 내밀한 욕망'과 '자신만만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체'로 조용조용 치밀하게 풀어가고 있다. 고골리는 세번의 연애를 하게 되는데, 상대 여성의 입은 옷은 물론 걸친 스타일, 읽는 책, 먹는 것까지 꼼꼼하게 묘사되고 있으며 이런 묘사로 눈 앞에서 그녀들을 떠올리기를 바라는 것 같을 정도이다. 물론 고골리에 대해서도 각 상대에 따라 옷차림이 어떻게 바뀌는지, 태도는 어떤지가 여지없이 꼼꼼히 묘사된다. 요컨대 각 인물에게 코드처럼 각각 옷과 책과 요리와 포도주가 따라다니고, 특히 세번째 여자이자 니킬과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게 되는 모슈미의 경우는, 역시 인도인-미국인 2세로서 다른 문화로의 적극적인 도피를 선택한 이였기에 이런 취향으로만 묘사되는 느낌이다.  

작가가 자신의 주제를 위해 이런 식의 인물 서술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대부분 지겨웠다. 나는 어떤 옷을 입었는지 외래어 (또는 외국어)로 자세히 묘사하는 문장이 싫다. 상표가 붙으면 짜증 지대로다. 나는 또한 요리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고, 무몇 줄씩이나 자세히 묘사된 걸 아무리 읽어봐야 무슨 요리인지 대부분 감도 잡지 못했다. 작가는 이름과 문화적 배경과 '취향'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데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보여 주고 싶었겠지만, 애초에 그런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고, 취향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나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아마 그런 데 대한 무관심이 나의 취향일수도 있겠지만, 그런 취향만 걷어내고 보면 나와 똑같은 인간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것을 먹고 어떤 책을 읽는지에 대한 묘사가 과연 재밌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 책은 내게는 그야말로 미하일 엔데가 <끝없는 이야기>에서 주인공 바스티안의 입을 빌려 싫어한다고 말한 책, 즉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아주 평범한 이야기', '현실에서도 이미 지겹도록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이었다.  

게다가 번역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브루클린에서 남편과 고양이 노마와 함께 살며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를 하는' 역자 소개에서 약간 속이 뒤틀렸는데 (도대체 역자 소개에 이런 건 왜 들어가 있는지. 그게 번역의 질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문장이 크게 서걱거리는 것은 없어도 몇몇 단어의 선택이 확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가장 심한것은 '고골리'이다.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니 영어 원서에도 주인공 이름은 'Gogol'인데 이걸 왜 '고골리'라고 번역했는지 모르겠다. '고골 강굴리'와 '고골리 강굴리'는 우리말 어감이 다르다. -리가 무슨 각운을 이루는 것 같아서 더욱 괴상한 이름처럼 느껴진다 (역자의 의도가 그것이었다고 해도 이상하다. 이건 고유 명사니 그냥 옮겨 줘야지). 그리고 '수능시험'이라든가 (아마 SAT겠지? 물론 그걸 우리말로 그대로 풀어쓰면 수학능력시험 - 수능시험 쯤 되겠지만 우리나라 수능시험과는 다른 것이다), '너와집'이라든가 (이건 우리나라에서 붉은 소나무 껍질로 지붕을 해서 덮은 특정한 형태의 집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에 있을 리가 없잖아.), '아점' (이건 심지어는 표준어도 아니고 거의 우스갯 소리처럼 쓰이는 말이다. 메뉴 리스트에도 올라와 있는 영어의 'brunch'와는 다른 말이다) 까지.  

아마 내가 이전에 사건으로 꽉찬, 작가가 독자를 밀어 부치는 소설을 죽 읽어와서 갑자기 내 이야기를 조근조근 하는 것과 같은 이런 소설에 적응을 잘 못한 건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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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이란 무엇인가 - 동서양 치유의 역사
파울 U. 운슐트 지음, 홍세영 옮김 / 궁리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논지를 정리하는 과정이 지루하기 짝이 없고, 전문번역가가 아닌 번역도 엉망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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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ㅣ 펭귄클래식 38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르가소 바다는 서인도 제도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물 흐름이 느리고,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지역인 데다 '사르가숨'이라는 해초 뭉치들이 떠다니는 곳으로 이 해초로 인해 많은 배들이 비극적 운명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책의 뒷표지)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오랫 동안 아무 생각도 없이, 그러나 가슴은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울컥함으로 꽉 채우면서, 다른 책은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은, 더 오랫 동안 거기에만 잠겨 있고 싶은, 그런 책들이 있다. 이 책,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Wide Sargasso Sea>도 그랬다.

책 제목의 '광막한'이란 단어에 끌려서 클릭하였다가, <제인 에어>의 로체스터의 미치광이 첫번째 부인 버사와 로체스터의 이야기, 어쩌면 <제인 에어>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이야기라는 걸 알고 당장 받아서 읽었다. <제인 에어>는 나에게 있어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르가소>는 앙트와네트 '버사' 메이슨 로체스터의 과거이다. 그녀는 자메이카에서 대농장주이자 노예주인 영국인의 딸로 태어났지만, 자메이카인에게는 물론 (대부분 흑인 노예 출신이었으니까), 영국인에게도 (영국인들은 식민지의 백인들의 혈통에 원주민이나 흑인의 피가 섞였을 거라고 내심 단정적이었던 듯. 그리고 이것이 로체스터가 앙트와네트를 불신하게 된 배경의 한 이유이기도 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크리올 여자이다. 어느 곳에도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은 그녀의 인종적 배경은 아버지가 일찍 죽고, 노예해방령 때문에 집안이 몰락하고, 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백치인 상황 때문에 더욱 악화되며, 이는 어머니가 부유한 백인(이 사람이 메이슨)과 재혼한 후에도 나아지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원주민 흑인의 폭동으로 집이 불타고, 그 와중에 백치 남동생이 타서 죽는 사고가 발생하고, 어머니는 미쳐 버림으로써 그녀의 어린 시절은 (제인 에어 못지 않게) 상처로만 남게 된다. 이어서 그녀는 (제인의 로우드 학교를 연상시키는) 수녀원 학교에서 사춘기를 보내게 된다. 상처투성이인 어린 시절과 이어지는 학교 생활까지는 제인과 앙트와네트가 가는 길이 비슷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두 사람의 길은 엄청나게 달랐으니, 그 이유는 앙트와네트에게는 비록 '양부'이지만 애정을 가져주는 아버지와 오빠가 있었고, 제인은 그야말로 천애고아로서 모든 것을 자신이 결정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앙트와네트는 그 시절 여자들이 그랬던 대로, 아버지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오빠가 골라준 사람과 결혼한다. 

이 남자가 마음이 넓고 자신감이 있는 행복한 남자였다면, 아름다운 앙트와네트를 사랑하고 둘은 행복했을 수도 있다. 앙트와네트가 기대한 것이 많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남자 또한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때부터 자기 감정을 감추도록 강요 받으며 자랐고, 아버지와 형은 둘째 아들에게 재산을 한 푼도 물려주지 않으면서도 가난뱅이로 만들지 않으려고, 가계가 불안한 것을 알면서도 3만 파운드라는 지참금에 아들을 팔 듯 앙트와네트와 결혼시킨 사람들이다. 그는 춥고 해가 잘 비치지도 않는 영국에서 살다가 열대지방 숲의 현란한 원색들, 진한 꽃향기들, 햇빛에 압도당하며 곧 지쳐 버리는 사람이다. 요컨대, 상처투성이인 어린 시절을 지나면서 열대의 현란한 색과 향기의 자연에 마음을 열고 지내온 앙트와네트와 속물적인 아버지와 형 밑에서 감정을 숨기는 신사로 살아온 남자 (에드워드 로체스터이겠지만, 소설 중에는 한번도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여, 왜 이해하지 못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앙트와네트의 배다른 오빠로 자처하는 남자가 뿌리는 앙트와네트에 대한 악의적인 중상을 로체스터가 아무런 의심 없이 그냥 인정해 버리고, 두 사람 사이에 유일하게 통하던 육체적 만남까지도 중단해 버림으로써, 관계를 확실히 좌초시킨다. 그리고 왜 로체스터가 자신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앙트와네트는 서서히 미쳐 간다.

자신의 앞길에 대해, 바로 내일의 일부터 단호하게 자신의 결정으로 밀어붙였던 제인 에어와, 아버지와 오빠 때문에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을 결혼에 밀린 앙트와네트는 같은 남자와의 관계에서 정반대의 선물을 받는다. 앙트와네트의 파멸이 그녀의 잘못인가? 그녀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태어난 땅의 원주민인 흑인으로부터도 배척당했고, 혈통을 물려준 영국인에게도 손가락질 당했으며, 그런 이들이 모여서 제 3의 정체성을 가진 집단을 만들 수도 없었던 데다가, 19세기 여자로서 남자에게 속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이다. 그에 비해, 제인도 비록 비슷한 시대를 타고 났지만, 제인은 달랐다. 제인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할 아버지나 오빠가 없었고, 무엇보다 제인은 본토에서 자라 교육을 받은 영국인이었다. 앙트와네트의 파멸에 로체스터는 어떤 책임이 있을까? 로체스터는 크리올 여자의 순결에 대한 그 시대의 편견에다가 아버지와 형에 대한 증오까지 무의식 속에 가지고 있던 남자이다. 그러니 오고 싶지 않은 곳에 와서 지참금 때문에 크리올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자기 무의식 속의 크리올 여자에게 딱 들어맞는 중상을 들으니 더는 이해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로체스터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식민지를 두고 원주민을 노예로 부리면 못된 제국주의 시대의 책임, 그러니까 인간 모두의 책임인 것이 아닐까. (비슷한 종류의 중상이 제인 에어에 대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로체스터가 그렇게 단번에 돌아섰을까? 제인은 정숙한 영국 여자이니까 질투심에 찬 비방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주지 않았을까?) 


 아름다왔던 앙트와네트가, 그녀의 시대가 덧씌운 이미지에 쓰러져 버사가 되고, 마음이 피폐해지면서 미쳐가고, 하는 과정이 사르가소 바다의 느린 물흐름처럼 처연하고 막막하다. 인간은 모두 시간이라는 거대한 팔 밑의 장기말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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