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펭귄클래식 38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사르가소 바다는 서인도 제도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물 흐름이 느리고,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지역인 데다 '사르가숨'이라는 해초 뭉치들이 떠다니는 곳으로 이 해초로 인해 많은 배들이 비극적 운명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책의 뒷표지)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오랫 동안 아무 생각도 없이, 그러나 가슴은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울컥함으로 꽉 채우면서, 다른 책은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은, 더 오랫 동안 거기에만 잠겨 있고 싶은, 그런 책들이 있다. 이 책,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Wide Sargasso Sea>도 그랬다.

책 제목의 '광막한'이란 단어에 끌려서 클릭하였다가, <제인 에어>의 로체스터의 미치광이 첫번째 부인 버사와 로체스터의 이야기, 어쩌면 <제인 에어>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이야기라는 걸 알고 당장 받아서 읽었다. <제인 에어>는 나에게 있어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르가소>는 앙트와네트 '버사' 메이슨 로체스터의 과거이다. 그녀는 자메이카에서 대농장주이자 노예주인 영국인의 딸로 태어났지만, 자메이카인에게는 물론 (대부분 흑인 노예 출신이었으니까), 영국인에게도 (영국인들은 식민지의 백인들의 혈통에 원주민이나 흑인의 피가 섞였을 거라고 내심 단정적이었던 듯. 그리고 이것이 로체스터가 앙트와네트를 불신하게 된 배경의 한 이유이기도 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크리올 여자이다. 어느 곳에도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은 그녀의 인종적 배경은 아버지가 일찍 죽고, 노예해방령 때문에 집안이 몰락하고, 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백치인 상황 때문에 더욱 악화되며, 이는 어머니가 부유한 백인(이 사람이 메이슨)과 재혼한 후에도 나아지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원주민 흑인의 폭동으로 집이 불타고, 그 와중에 백치 남동생이 타서 죽는 사고가 발생하고, 어머니는 미쳐 버림으로써 그녀의 어린 시절은 (제인 에어 못지 않게) 상처로만 남게 된다. 이어서 그녀는 (제인의 로우드 학교를 연상시키는) 수녀원 학교에서 사춘기를 보내게 된다. 상처투성이인 어린 시절과 이어지는 학교 생활까지는 제인과 앙트와네트가 가는 길이 비슷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두 사람의 길은 엄청나게 달랐으니, 그 이유는 앙트와네트에게는 비록 '양부'이지만 애정을 가져주는 아버지와 오빠가 있었고, 제인은 그야말로 천애고아로서 모든 것을 자신이 결정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앙트와네트는 그 시절 여자들이 그랬던 대로, 아버지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오빠가 골라준 사람과 결혼한다. 

이 남자가 마음이 넓고 자신감이 있는 행복한 남자였다면, 아름다운 앙트와네트를 사랑하고 둘은 행복했을 수도 있다. 앙트와네트가 기대한 것이 많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남자 또한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때부터 자기 감정을 감추도록 강요 받으며 자랐고, 아버지와 형은 둘째 아들에게 재산을 한 푼도 물려주지 않으면서도 가난뱅이로 만들지 않으려고, 가계가 불안한 것을 알면서도 3만 파운드라는 지참금에 아들을 팔 듯 앙트와네트와 결혼시킨 사람들이다. 그는 춥고 해가 잘 비치지도 않는 영국에서 살다가 열대지방 숲의 현란한 원색들, 진한 꽃향기들, 햇빛에 압도당하며 곧 지쳐 버리는 사람이다. 요컨대, 상처투성이인 어린 시절을 지나면서 열대의 현란한 색과 향기의 자연에 마음을 열고 지내온 앙트와네트와 속물적인 아버지와 형 밑에서 감정을 숨기는 신사로 살아온 남자 (에드워드 로체스터이겠지만, 소설 중에는 한번도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여, 왜 이해하지 못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앙트와네트의 배다른 오빠로 자처하는 남자가 뿌리는 앙트와네트에 대한 악의적인 중상을 로체스터가 아무런 의심 없이 그냥 인정해 버리고, 두 사람 사이에 유일하게 통하던 육체적 만남까지도 중단해 버림으로써, 관계를 확실히 좌초시킨다. 그리고 왜 로체스터가 자신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앙트와네트는 서서히 미쳐 간다.

자신의 앞길에 대해, 바로 내일의 일부터 단호하게 자신의 결정으로 밀어붙였던 제인 에어와, 아버지와 오빠 때문에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을 결혼에 밀린 앙트와네트는 같은 남자와의 관계에서 정반대의 선물을 받는다. 앙트와네트의 파멸이 그녀의 잘못인가? 그녀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태어난 땅의 원주민인 흑인으로부터도 배척당했고, 혈통을 물려준 영국인에게도 손가락질 당했으며, 그런 이들이 모여서 제 3의 정체성을 가진 집단을 만들 수도 없었던 데다가, 19세기 여자로서 남자에게 속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이다. 그에 비해, 제인도 비록 비슷한 시대를 타고 났지만, 제인은 달랐다. 제인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할 아버지나 오빠가 없었고, 무엇보다 제인은 본토에서 자라 교육을 받은 영국인이었다. 앙트와네트의 파멸에 로체스터는 어떤 책임이 있을까? 로체스터는 크리올 여자의 순결에 대한 그 시대의 편견에다가 아버지와 형에 대한 증오까지 무의식 속에 가지고 있던 남자이다. 그러니 오고 싶지 않은 곳에 와서 지참금 때문에 크리올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자기 무의식 속의 크리올 여자에게 딱 들어맞는 중상을 들으니 더는 이해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로체스터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식민지를 두고 원주민을 노예로 부리면 못된 제국주의 시대의 책임, 그러니까 인간 모두의 책임인 것이 아닐까. (비슷한 종류의 중상이 제인 에어에 대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로체스터가 그렇게 단번에 돌아섰을까? 제인은 정숙한 영국 여자이니까 질투심에 찬 비방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주지 않았을까?) 


 아름다왔던 앙트와네트가, 그녀의 시대가 덧씌운 이미지에 쓰러져 버사가 되고, 마음이 피폐해지면서 미쳐가고, 하는 과정이 사르가소 바다의 느린 물흐름처럼 처연하고 막막하다. 인간은 모두 시간이라는 거대한 팔 밑의 장기말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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