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여행가방 -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집
문학동네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30년쯤 전에 한 여자 아이가 있었다. 

또래 중 키가 작은 편이었고, 글자나 산수는 빨리 배웠지만, 운동 신경이 둔한데다가 겁이 많아서 몸을 움직이는 놀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아이가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책을 읽는 것이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풀린다면 어떤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건 첫 줄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알아차렸듯이 내 이야기고,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지는 않았다. 

집에 책은 많았다. 기자이자 (내 짐작이지만) 문학 청년이셨을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는 책을 좋아하셨다. 두 분은 지금의 나처럼 언젠가는 읽겠지라며 책을  일단 사다가 쌓는 분들도 아니었다. 딸들에게 물려주실 거라고 생활비를 쪼개 구입하신 세계문학전집과 한국문학전집도 다 읽으셨고, 이사를 할 때마다 책이 가장 큰 짐이었던 모양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나? 좋아하긴 했다. 부담은 없이 친근하기만 한 사물이 책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받은(그러니까 선물로 주는 것인 줄 알고 받은) 선물도 책(유치원에서 성탄절 재롱잔치 끝에 산타할아버지가 주신 여섯 권의 그림책)이고,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도 책(초등학교 2학년 때 산타할아버지가 성탄절 새벽에 머리맡에 두고 가신 책으로 제목이 무려 '공비의 딸'1)이다. 부모님은 종종 내가 키가 크지 않은 이유가 어렸을 때 아빠의 커다란 책상 밑에 들어가서 책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책상 밑에 책을 가지고 한번 들어가면 여간해서는 나오지 않았다고. 그런데 내 기억은……?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하지 못하는 걸수도 있지만, 하여튼 내가 책을 쫓아다녔다는 기억은 없다. 그냥 있으면 읽고 없으면 다른 놀이를 하고. 어른들이 읽는 두껍고 글자들이 빽빽한 책들을 읽으려고 시도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벽을 보면서 어떤 얼굴을 상상하고 그 인물에게 내가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주던 기억은 있다. 다시 안타깝게도 지어낸 이야기가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여튼 그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에 학교에 산문 한 편을 냈는데, 그 글이 덜컥 전국 규모 글짓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탔다. 제목은 '세 자매의 저금통'이었고, 상을 받으러 무려 서울 어린이대공원까지 가서 목에 메달을 걸고 손에 상장을 들고 찍은 사진도 있다. 글 쓰는 게 별로 어렵지가 않았고, 그걸로 상까지 받은 아이의 기쁨은 대단했다. 일어났으니 일어난 일인가 보다 하는 정도로 실감했을 뿐, 별로 힘들지도 않았는데 큰 칭찬을 받은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아이는 신기하고 신이 난 나머지 그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 - '이런 일이라면 커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세상에서 글짓기를 제일 잘 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이 뭐야?" 엄마는 대답하셨다. "글쎄. 노벨문학상이 아닐까?" 그때 아이는 '노벨문학상'이란 단어, 아니 '문학'이란 단어부터 처음 들어 보았다. 그리고 그 단어-'노벨문학상'보다는 '문학'-는 곧장 아이의 마음 속에 별로 꽂혔다.

그 때부터 아이는 진지하게 책을 읽고, 자기가 느낀 것들을 부지런히 글로 쓰곤 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풀린다면 여기서부터라도 어떤 작가의 비범한 어린 시절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물론 이것은 내 이야기이고 거듭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글짓기 숙제를 받아오면 큰 부담없이 뚝딱 써내기도 하고(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림 숙제를 받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기운이 쭉 빠졌었다), 그걸로 몇 번 상을 받기도 했지만, 작가들의 어린 시절 회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독서에의 탐닉, 쓰고 싶다는 욕구' 같은 것은 사춘기에 이르러서도 뚜렷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결정적으로 고등학교 때, 내가 다니던 여고에는 (글짓기반, 독서반, 심지어는 문학반이나 문학클럽, 문학써클도 아니고) '문학회'가 있었다. 어린 시절 가슴에 박힌 별의 영향이었는지 스르륵 그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나는 정말로 '독서에 탐닉'하고, '문학'을 고민하고, 시를 ('짓는' 것이 아니라) '쓰고', 소설을 '습작'하는 선배들을 만나게 되는데, 마음 속에 '문학'이라는 단어로 꽂힌 별 밖에는, 그 선배들에 비하면 읽은 것도 고민한 것도 쓴 것도 없다는 것을 하나의 깨달음으로 받아들이고 '쓰는 것'을 그만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문학'은 마침내 나에게 가본 적도 갈 능력도 없지만 언제나 그리운 먼 별과 같은 무엇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니게 된 나의 마음은, 자라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 얻어 듣거나 겪어서 얻은 지식들로, (규모는 비할 바 아니겠지만) 우주가 팽창하듯 커졌고, 문학의 별도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졌다. 책들은 여전히 친근하고 애틋한 친구로서 손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려 애를 썼지만, 돌이켜 보면 20대에 도대체 무슨 책을 읽었는지, <토지>와 <태백산맥>, 그리고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제외하고는 기억나지 않는다. 몇 번의 연애에 실패하면서 마음 속의 뭔가를 꺼내어 쓰고 싶다는 욕구가 일 때도 있었으나, 그저 작은 물결, 몇 번 출렁이지도 않는 그런 물결에 불과했다. 그나마 병원에 들어간 후에는 '문학'이라는 단어가 내게 소중했던 시절은 전생이었을 것만 같이, 책들도 거의 숨막히는 일상의 도피처로서 찡그린 얼굴로 숨어드는 곳에 불과했다.


그런 시간이 또 10년 가까이 지나고, 2년 전부터 출퇴근 시간이 일정한, 그리고 퇴근 후 시간을 온전히 개인적인 일에 쓸 수 있는 직장에 안착했을 때, 제일 먼저 손이 간 것은 책이었다. 오랫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책에 대한 갈증이 또렷해지면서 무수한 책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고, 2년새 나는 읽은 것의 두 배 이상 되는 책을 사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읽고 사면서 아주 가끔은 나도 뭔가를 써보고 싶다는 욕구가 일렁, 했지만 그저 한 번 일렁, 하고는 다시 말끔해지는 물결 이상은 아니었다. 글쎄. 난 훌륭한 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훌륭한 소설들이 이미 이렇게나 많은데, 내가 더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고 이 책이 등장한다. 알라딘의 주문 내역을 뒤져보니 책을 사다 놓은지도 6개월이 지났다. 시간이 참 빠르기도 하다. 

'노벨문학상'에 특별한 애착이 있는 건 아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엄마에게 처음 그 단어를 들은 이후, 일상 생활에서 '노벨문학상'이란 '참 대단한 상'일 뿐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것을 알고 대한 첫 번째 작품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었는데, 이 소설을 읽은 계기도 노벨문학상보다는 '빌 클린턴(1992년에 미국대통령으로 당선된, 당시만 해도 젊고 잘생긴, 케네디와 비교되던 그이)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라는 기사 때문이었고, 그것도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노벨상을 수상하고 10년이나 지난 후에 읽은 것이다. 게다가 <백년 동안의 고독> 이후 도전한 노벨문학상 작가의 작품 중 성공한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노벨문학상이니까 읽어보자고 도전했다가 실패한 첫 번째는 토니 모리슨. 그녀의 작품은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갑자기 번역본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러면서 번역의 질들이 떨어지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도무지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 이후로는 '문학상 수상작이니까 일반적인 독자가 읽기엔 너무 심오할 것'이라는 선입견에 사로 잡혀 한참 시도하지도 않다가, '마술적 리얼리즘'의 작가라는 주제 사라마구를 만나게 된다. 주제 사라마구도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그의 <수도원의 비망록>은 즐겁게 읽었다. 그런데 지금은 '읽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게다가 <눈먼 자들의 도시>를 또 한 번에 읽어내지 못했다. 귄터 그라스는 노벨문학상 수상 훨씬 전부터 알고 있던 작가였지만 <양철 북>은 아마 세 번쯤 시도만 했을 것이다. 알베르 카뮈에 대해서는 머리로만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지 호감을 느낀 적은 없었고, 오에 겐자부로, 가오 싱젠, 르 클레지오는 시도할 생각조차 갖지 않았다. 시詩라는 것은 번역에서 운율이 사라지기에 원문이 아니면 별로 소용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들에게도 아예 관심이 없었다. 다만 비교적 최근의 오르한 파묵이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노벨문학상 수상 전부터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있었고, 지금도 읽고 있는 작가들이긴 하다. 여하튼 그런데도 이 책을 읽으려고 한 것은, 내 마음 속의 먼 별의 단어 '노벨문학상'이 깜빡였기 때문일까? 


소개된 열 명의 작가는 나름대로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가다운 쉽고 깊고 넓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르 클레지오는 '작가는 오로지 배고픈 사람을 위해 글을 쓰고자 하나, 먹을 것이 충분한 자들만이 자신의 존재를 깨달을 여유가 있다는 패러독스의 숲에서 문학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고민한다'고 대답한다. 오르한 파묵에게 작가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제2의 존재와 그 존재를 만들어낸 세상을 인내심을 가지고 오랜 세월 동안 노력하여 발견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어느 날엔가 우리가 쓴 것들이 읽히고 이해될 거라는, 왜냐하면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의 낙관주의로 글을 쓴다고 말한다. 작품 활동에 대한 중국 정부의 억압으로 프랑스에 살면서 중국어로 글을 쓰는 가오 싱젠은 '문학은 그 자체로 존재의 이유를 지켜나가야지 정치적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작가는 오직 개인으로서, 보상을 바라지 않고 쓰고자 하는 바를 쓰며, 증인의 위치에서 진실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귄터 그라스는 '작가들이란 늘 높은 의자 위에서 거만을 떠는 권력자들의 수프에 기꺼이, 그리고 신중하게 침을 뱉게 되어 있는', '과거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고, 너무 빨리 아문 상처들을 열어젖히고, 입구를 봉해놓은 지하실에서 시체를 발굴해내고, 금지된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금단의 음식을 먹어치우는 존재들'이라고 설명하고, 예순이 가까운 나이에 비로소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다는 주제 사라마구는 작품을 쓰면서 그 작품들의 인물들이 스승이 되어 자신의 생각과 인생이 어떻게 달라지고 다음 작품들을 쓰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가장 좋았던 글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연설이다. 그의 글은 그냥 수상 소감을 넘어서 유럽의 소위 지식인들에게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과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를 주문하는 정치적 선언서처럼 읽히기도 한다. 특히 초반에 압축해서 일러주는 라틴아메리카의 짧은 '역사'는 도무지 있었던 일 같지 않은데 '역사'인 마술적 사실주의를 강렬하게 보여준다. 그외 폴란드의 시인 비수아바 심보르스카,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 미국의 토니 모리슨, 보스니아의 이보 안드리치, 그리고 알베르 카뮈의 이야기와 고민도 대가인, 남보다 앞서 더 많이 더 깊이 고민한 것이 분명한 작가로서 '쓴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다르지만, 읽다 보면 관통하는 공통된 지혜를 걸러낼 수 있다. 그것은 작가란 기본적으로 언어를 다루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것은 생존의 조건에 대한 한 개인의 깊은 고민으로부터 시작되며, 개인의 무지를 인정하고 모든 권위에 대해 질문하고 더 나아가 저항하는 것을 통해 약자의 편에, 결국 나와 같은 '인류'의 편에 서게 된다는 것으로 나는 읽었다.


결국 이 책을 집어들게 한 것은 어린 시절 꿈과 관련된 개인적으로 거창한 이유보다, 그저 문학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훌륭한 작품을 써내는 작가가 직접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나의 바램을 200% 이상 채워 주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대가들이 '왜 쓰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글쓰기에 관해서라면 아직 수정란도 되지 못한 나라는 것을 깨달은 동시에 '쓰고 싶다'는 욕구를 강렬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여고 시절, 비유를 하자면 대가들에 비해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둥 마는 둥 하는 단계에 있었을 '문학 소녀 선배'들에게조차 확 주눅 들어, 영리한 척 손 들었던 나였는데 말이다. 거기다가 무턱대고 어려울 것이니까 패스하려 했던 르 클레지오, 오에 겐자부로, 가오 싱젠은 물론, 아마도 다른 욕심들과 어렸기 때문에 포기했을 토니 모리슨과 귄터 그라스, 안타깝게도 잊어버린 주제 사라마구까지 새롭게 또는 다시 읽어야 할 책들의 리스트는 즐겁게 받아 안은 덤이라고나 할까. 오래 산다는 것이 늙는다는 것과 동의어로 여겨져 별로 탐탁치 않았는데 이 많은 책들을 다 읽을 때까지는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을 정도로. 읽는 내내 빨리 이 책을 읽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는 조바심을 느낄 정도로.


옥의 티라면 책 맨 앞에 붙은 편집자의 말. "한국문학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라니. 아니 이 책이 무슨 '노벨문학상, 이렇게 하면 탈 수 있다 - 속성코스' 같은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노벨문학상'을 목표로 글을 쓴다는 것이 있을 법한 일인가. 모르겠다.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에 공공연한 위원회의 입맛이라는 게 있어서 대충 그해의 수상작을 점칠 수 있는 것처럼, 노벨문학상 선정 위원회에도 입맛이라는 게 있는지. 그런데 노벨문학상은 어떤 '작품'에 수상하는 상이 아니다. '작가'에게, 그가 그때까지 발표한 작품 세계와 그 영향을 인정하는 의미의 상이다. 그런데 어찌 '노벨문학상 수상 전략'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문학상 뿐 아니라 노벨상의 모든 부문이 그러하지 않나. 어떤 업적이 이후 세상에 미친 영향을 평가하는 상으로 과학 부문의 상은 대체로 수십 년 전의 연구 업적에 대해 수여된다. 이런 상에 어떻게 '전략'과 '전술'로 덤빌 수 있겠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 중에 정말 웃긴 책이 있었다. 이름하여 <내 아이 노벨상 수상자로 키우기: 문학상>. 책 말미에 논술 + 심화학습장까지 붙여서, 읽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지식으로 자리매김 하게끔까지 신경을 쓴 책이라고 한다. '상'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지 '시험'의 틀에 맞추어 전략과 전술을 내는 사람들의 심리는 물론 능력까지 대단하고도 한심하다. 


결론. 올해에 단 한 권의 책을 읽었다면 감히 이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올해 말까지 50권은 더 읽는게 목표지만). 나처럼 한때 '글쓰기'의 로망을 품었던 사람들에게는 물론, 작가의 꿈을 가지고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 '문학'이라는 단어에 경외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 아니 대가들의 진솔하고 현명한 삶의 이야기란 언제 어느 때나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므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꼭 읽어 보세요. 문학동네와 외대 외국문학연구소에서는 다른 작가들의 수상연설집도 더 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부문 수상자들의 연설도 나오면 더욱 더 좋겠고.www.nobelprize.org 에서 영어연설문을 읽을 수 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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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드 1 - 엘파바와 글린다, 개정판 ㅣ 위키드 1
그레고리 머과이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개정판이 나왔구나. 뮤지컬 공연에 맞추어.

'개정판'이라고 나오면 구판과 뭐가 달라졌는지 설명이 있어야 하는 것 아냐?

표지만 달라졌는지, 번역을 손을 봤는지, 손을 봤으면 어떻게 봤는지 대조표까진 바라지 않는다고 쳐도.

그리고 만일 표지만 바뀐 거라면 그걸 개정판이라고 불러줘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릴없이 알라딘을 돌아다니다가 발견하고 살짝 심사가 뒤틀려서 한 마디.

 

그건 그렇고 아래는 내가 '구판'을 읽고 2010년 11월에 블로그에 써놨던 것이다.

드디어 위키드를 다 읽었다.

올초부터 아마도 읽기 시작했을테니 (런던에서 뮤지컬을 보기 전에 원작을 읽어 둬야겠다는 생각으로), 거의 1년이 걸린 셈이다!

(그 때 얼마나 준비를 열심히 했었냐 하면, <위키드>를 읽기 전에 <오즈의 마법사>도 새로 읽었었다.)

 

하여튼 첫 권은 그닥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특히 맨초반의 유리 부는 터틀 하트 이야기가 좀 지겨웠고, 초록색 피부에다가 이빨을 모조리 가지고 태어난 데다가 심술궂기까지 한 아기 엘파바에게 적응하기가 좀 힘들었다. 아무튼 어찌어찌해서 그 부분을 넘어가서 갈린다-글린다와 시즈가 나오면서부터는 좀 진도가 나갔었던 것 같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던 뮤지컬의 줄거리, 그리고 아버지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오즈의 마법사>와 이것저것 끼워맞춰 보고 상상하면서 말이다. 1부인 '엘파바와 글린다'는 대충 뮤지컬의 줄거리와 느슨하게 맞아가면서, 피에로의 죽음과 엘파바의 피신으로 끝난다.

위기는 2권 초에 다시 찾아왔다. 1권 끝으로부터 7년이 흐른 후 피에로의 나라를 찾아 사막을 건너는 이야기부터 시작되는데, 아무튼 사막은 또 무지하게 지겹게 여겨졌다. 그래도 어찌어찌해서 사막을 다 건너 피에로의 왕국인 이르자키성에 도달하는데.. 아.. 여긴 정말 힘들었다. 사람도 별로 없는 고성에서, 오랜 고난 끝에 더욱 폐쇄적이고 모가 난 엘파바와 자신이 친 유리벽 안에서 꼼짝도 않으려는 사리마 (피에로의 아내)와의 끝도 없이 변죽만 울리는 대화를 보고 있자니.. 페이지 수로는 몇 장 되지 않았지만, 시간은 아무튼 끈적이듯 흐르지 않았고, 그 상태에서 나는 그냥 유럽 여행을 했고, 런던에서 <뮤지컬 위키드>를 보았으며, 책은 책장에서 조용하였다.


그러다가 최근에 <뮤지컬 위키드>의 사운드 트랙을 다시 듣고 다니면서 (특히 'Defying gravity'와 'For good') 문득 엘파바와 글린다의 진짜(?) 이야기의 끝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다시 집어들었고 3일 동안 밤에 읽어서 덮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역시 책은 읽을 때의 환경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위키드>를 처음 잡았을 때, 나는 병원을 그만 두면서 새 일자리를 찾아야 했고, 그걸 또 보스에게 설명해야 했고, 그러면서 유럽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고, 매일 해내야 하는 일과는 여전히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던, 한마디로 피폐한 상태였다 (돌이켜 보니 그랬네.. 지난 일이다.. 휴우..). 그래서 아마 사건이 끊임없이 터지는 활극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어떤 책도 읽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상 외에는 크게 마음 쓰이는 것이 없는 상태.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한번에 주욱 읽어내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소설의 광고띠에는 '<오즈의 마법사>를 유쾌하게 뒤엎는 초록색 마녀의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원작 소설에 대한 소개글이라면, 완전 낚시 문구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뮤지컬 위키드>에는 '유쾌'나 '감동'이란 단어가 어울리지만, 소설 <위키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경줄을 북북 긁는 불안함 뿐이고, 감동은 커녕 짜증스런 안타까움만 한바닥 깔린다. 뭐 어느 쪽이나 카타르시스로 가는 길이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세상에 이런 여주인공은, 없다. 이렇게 비극적으로 태어난, 이렇게 팍팍한 환경에서 자라난, 그래서 이렇게 가시투성이인 분노로 가득찬 성정을 가지게 된, 한마디로 (시즈 시절과 피에로와의 사랑의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 온기라고는 약에 쓸려고 찾아도 없는 그런 여주인공. 독자가 절대 감정이입을 할 수 없는 여주인공. 한 술 더 떠서, 책날개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에는 '<위키드>가 성공한 이유는 엘파바가 선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정말 엘파바가 '선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했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는다. 그녀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맞았던 가혹한 환경과 고난이 그녀를 점점 더 가혹한 성정의 소유자로 만들어갔고, 그녀는 진짜 사악해진 것이다. 물론 그녀는 그런 자신을 스스로 냉소하고 있었고, 분명 괴로와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분명, 엘파바가 원한 것은 '선함', '선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엘파바는 자신이 사악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비록 냉소적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이 붙여준 별명 아닌 별명, '서쪽의 사악한 마녀'라고 부르긴 했지만). 엘파바가 원한 것은 자유 의지, 누구에게도 조종 당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 자유 의지와, '죄와 비난의 계약을 넘어선, 몸값을 치르는 것이 전부인 오래된 계약'이었다. ['(권력과 복종, 지배와 피지배로 인해) 너무나 끔찍해서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응시하며, 무지와 순진함 덕분에 이 깨뜨릴 수 없는 죄와 비난의 계약 밑에 언제나 더 건전한 방법으로 묶고 풀 수 있는 오래된 계약이 있다고 믿으면서, 몸값을 치르는 고대의 관례를 따른다면, 우리가 늘 우리의 수치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2권 p275)]. 그러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권력과 복종, 지배와 피지배는 또한 죄와 비난의 계약을 만든다. 그녀는 자유의지를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마법사에게 대항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에로를 잃는 '죄'를 짓게 되고, 스스로를 비난하며 용서를 구하기 위해 피에르의 아내인 사리마를 찾는다. 그러나 사리마에게는 그럴 의지도 용기도 없었고 (유리벽 속에서 엘파바가 정말로 누구인지조차 알려고 하지 않는다), 게다가 마법사가 그녀를 죽임으로써 엘파바의 용서를 차단한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사리마의 딸로 마법사에게 잡혀있는 노르를 구하려고 (그래서 그것으로 '빚 청산'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용서'를 구하러 온 도로시 앞에서 '죄와 비난의 계약'에 꽁꽁 묶여 있던 자신을 발견하고, 아래는 불에 붙고, 위쪽은 정화의 물을 뒤집어 쓴 채 당황하며 죽는다. 그녀의 자유의지는 결국은 죄와 비난의 계약에 묶인 의지였지, '누구에게도 조종 당하지 않는' 자유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에 실패했다.


읽는 내내 '엘파바, 꼭 그렇게 살아야 했어?'라고 혀를 찼다. 짜증도 내고. 네사로즈의 구두를 가져간 도로시를 쫓으면서 마녀는 '그 모든 노력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노르를 버릴 수도 있다. 리르를 자유롭게 놓아 줄 수도 있다. 유모를 버릴 수도 있다. 도로시를 놓아줄 수도 있다. 구두를 포기할 수도 있다'(2권 p269)라고 생각해 보지만, 때맞춰 '바람이 몰아쳐 마녀의 왼쪽 옆구리를 거세게 떠밀었'기 때문에 그냥 간다. 자신의 길이라고, 자신이 선택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전의 역사와 총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역사의 영원성의 일부로 이미 예정된'(레프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작가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붙인 인용문의 일부) 길을 간 것이다. 엘파바도 어쩔 수 없었다.


<위키드>는 그 보다 백년 쯤 전에 씌여진 <오즈의 마법사>의 패러디이지만 전혀 다른 문제를 제기하는 전혀 다른 작품이고, 또한 <뮤지컬 위키드>와도 전혀 다르다. 난 <뮤지컬 위키드>의 결론이 더 맘에 든다. 자유의지니, 죄와 비난을 떠난 관계니 하는 건 다 포기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허수아비'로라도 살려서, 모든 공은 친구인 글린다에게 맡기고 숨어 버리기로 한 결정이. 다시 런던이나 뉴욕에 간다면, 또 <뮤지컬 위키드>를 보겠다. 어떤 의미에서 <뮤지컬 위키드>는 진짜 엘파바를 위한 진혼곡이다.

 


 

밑줄 긋기

(1권을 읽을 때는 밑줄 그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래의 밑줄은 모두 2권에서.)


"내 말을 잘 듣고 단단히 기억해 두어라. 별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 별에도, 다른 어느 것에도 없다. 어느 것도 네 운명을 지배하지 못한다."

(p37)

-- 이건 그저 주문에 지나지 않아.


엘피는 아버지를 곁눈질해 보았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무능한 남자로 보였다. ... 언제나 사건의 언저리에서 어색하게 쭈뼛거리기만 하고, 행동을 취하기보다는 반응하는데 급급하고, 현재를 움직이는 대신 과거를 슬퍼하고 미래를 위해 기도하는 인물. (p 171)


"... 자기 입으로 사악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치고 진짜 악인은 없어." 보크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경계해야 할 상대는 자기들이 선량하다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착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지." "네사로즈처럼 말이야." 밀라가 이죽거렸다. (p235)


"악에 대한 진실은 여러분이 말한 것 중 그 어느 것도 아니야. 당신들은 악의 한쪽 면, 즉 인간적인 면만 발견했어. 영속적인 면은 그늘 속으로 들어가 버렸어. 아니면 그 반대이든가. 옛날 속담 같은 거지. 껍데기 속의 용이 어떻게 생겼을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지. 보려고 껍데기를 깨는 순간 용은 더 이상 껍데기 속에 없을 테니까. 악의 본질은 비밀스러움이기 때문에, 이 질문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어."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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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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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읽어 본 사람이라면 열 중에 아홉은 '반전'에 대해 감탄하는, 식스 센스에 버금가는 반전으로 유명한 소설.

 

작년 초에(라고 생각했는데 5월이었군) 첫번째 블로거 추천 오늘의 책으로 소개된 것을 보고 흥미가 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값 도서에 떴다. 그래서 집에 데리고 왔다. 그걸 어제서야 읽었다. <웃는 남자>에서 너무 힘을 뺀 후이고, 개인적으로 복잡하고 속상하지만 내 힘으론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겨서 어지러운 마음에, 술을 마시자니 숙취의 물리적 후유증이 두렵고 에라 술술 넘어갈 만한 책이나 보자 해서 빼내든 책이다. 그리고 결론은, 정말 술 마신 것과 같은 효과를 봤다!

나는 술을 잘 못 마시는데다가 아예 두려워하는 편이다. 일단 맛이 없고, 그래서 첫 잔이 가장 괴롭고, 두세 잔 마시면 금방 알딸딸해지면서 취한 기운에 말리지 않으면 주는대로 받아먹기도 하고, 대여섯잔 그렇게 앉아서 받아 마시다가 테이블에 얌전히 엎드려서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속이 뒤집히면서 사지가 몇 시간은 맞은 듯이 쑤시고 결리고 아파서 깨어나서 울게 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을 때도 거의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남자의 입장에서 적나라하고 건조하게 묘사된 성관계 직후의 묘사로 시작되는 것이 일단 불쾌했다. 이후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자기 관리에 철저하면서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건조하고 냉소적인, 약간의 폼생폼사의 기질이 있는, 혼자서도 즐겁게 바쁘게 할 일이 많아 굳이 결혼이나 연애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그래도 어딘가에 진정한 사랑이 있겠지하는 기대는 버리지 않고 있는 남자 나루세 마사토라가 소개된 후 곧장 사건으로 뛰어든다. 문장은 나루세 마사토라의 식스팩만큼이나 군더더기가 없고, 전개도 스피디하다. 이리하여 한 잔에서 세 잔까지는 좀 빼기도 하고 다음날이 두려운 마음에 미적되지만 세 잔이 넘어가면 취기가 다음 술잔을 부르는 것처럼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고, 한 페이지만 더, 한 페이지만 더 하다가 보면 대망의 '반전'에 이르게 된다. 뭐야 이거……? 그러다가 몸에 힘이 쭉 빠지고 테이블에 얌전히 쓰러지는 것처럼 작가에게 두 손을 들고 정말 뒤로 누워버리게 된다. 그리고 깨어나는 끝맛은.. 나로서는 술에서 깨는 것처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떤 소설이 추리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읽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독자의 두뇌는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탐정과의 대결 모드로 맞춰진다.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와중에도 한 문장 한 문장을 촘촘히 읽고, 작가의 복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자신의 회색 뇌세포를 풀가동한다. 마지막에 탐정이 범인을 밝히면서 사건의 전모를 설명할 때면, 일부는 작가와 더 친한 탐정이 정보를 더 갖고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또 일부는 작가가 슬쩍 던진 실마리들을 무심코 보아 넘겼기 때문에, 독자는 자기에게 예정되었던 패배를 인정하면서 웃음과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것이 셜록 홈즈, 에르큘 푸아로나 미스 제인 마플, 피터 윔지 경, 브라운 신부님 등등을 대하는 독자들의 루틴이다.

이 소설 역시 추리소설을 '표방'하고 있다. 그런데 사건을 풀어가는 사람은 과거에 탐정 사무소에서 얼마간 일했던 경험이 고작인, 현재로서는 경찰이나 탐정들이나 범죄 세계와 어떤 끈도 없는, 탐정이라고 할 수도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사건에 관한 정보는 마지막 반전 직전의 한 가지 사실을 제외하면 주인공이 독자보다 더 아는 것도 없고, 사건의 해결에서도 독자보다 별로 우월한 위치에 선 것 같지도 않다. '수사'(랍시고)를 하는 것을 봐도 발품, 무조건 이웃집 문 두드리기 등으로 그냥 보통 사람이라면 능히 생각하고 실행할 만한 일들을 한다. 범인(들? 단체?)이 누군지도 알고,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도 아는데, 그걸 파헤치는 탐정의 스킬은 그저 그런 것 같이, 그렇게 진행되다가 독자가 '도대체 그 유명한 반전은 언제 나오는 거야?'라고 궁금할 때쯤 정말이지 생각할 수 없었던 사실이 드러난다. 이른바 그 유명한 반전(시작은 여주인공이 자기의 본명을 밝히는 시점인데, 난 처음엔 '뭐야, 이 여자 미친 여자였던 거야..?'했다. 사실 내가 더 미친 쪽에 가까이 있었는데 말이다.. ㅎ). 식스센스도 인정할 만한 반전.

이 반전은 탐정이 독자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먼저 알게 된 사실을 터뜨리는, 일반적인 추리 소설의 반전이 아니다. 이 반전은 작가가 처음부터 독자를 속이기 위해, 일반적인 독자의 선입견-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던-을 200% 활용한 반전이다. 자신에게 있는지도 몰랐던 선입견을 교묘히 이용한 작가의 트릭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도리는 없다. 독자의 허를 찌른다는 작가의 목적에 비추어 보면 사건 전체, 소설 전체가 맥거핀이다. 아니, 제목부터, 아련히 무언가를 그리는 듯한 순정만화 여주인공이 그려진 파스텔 색조의 표지부터, 이 반전의 클라이맥스를 위해 고안된 것이다, 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소설의 사건은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지 오래인 일본의 사회문제를 르뽀에 가깝게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외롭고 체면에 얽매이고 갖가지 행정적 절차에 어두운 노인들을 친절하게 구슬러서 비싼 값으로 물건을 팔고, 더 사도록 고리의 빚을 지게 만들고, 나중에는 노예처럼 부리는 악당들.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에 말년의 평안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전락하는 노인들. 우리 사회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어쩌면 지금 이순간에도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젊은 사람들도 비싼 대학등록금이다 일자리부족이다 해서 다단계판매와 고리의 대부회사의 꾀임에 심심찮게 걸려들어 인생 전체가 빚으로 망가지기도 한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가 고리대금에 의해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무섭도록 사실적이고 건조하게 독자에게 전달함으로써 일종의 고발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고발의 울림은 '식스센스급 반전'에 확 묻혀버린다. 솔직히 읽고 나면 그 '반전' 빼고는 머리가 하얘진다. 게다가 위에서 얘기한 첫 페이지의 바싹 마른 묘사와 잔인한 야쿠자, 그리고 여자란 창녀 아니면 양갓집 규수로 묘사할 수밖에 없는 장르 소설 속의 주인공다운 주인공의 시선이 읽는 내내 못내 불편했다.

 

아무래도 일본 추리 소설은 내 타입이 아닌가보다.

 

ps) 초반부에 '원조교제'란 말에서 사실 나는 좀 멈칫했다. 원조교제? 왜 원조교제라고 하지? 그런데 이후에도 별 설명이 없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넘어갔는데, 그것이 첫번째 단서였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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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 상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85
빅토르 위고 지음, 이형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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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상) -2012-2-28 ~ 2012-3-4

웃는 남자 (하) -2012-3-4  ~ 2012-3-5


<파리의 노트르담>과 <레 미제라블>에 이은 세번째 위고.

<레 미제라블>까지 읽고 또 위고를 읽을지는 몰랐다. 앞의 두 작품을 읽을 때 너무나도 진이 빠졌던 까닭이었다. 

(마땅히 소설의 첫번째 항목이어야 할) 재미가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로(!) 페이지를 찢고 나올 것처럼 무섭도록 개성이 강하고 격정적인 인물들과, 혁명의 시대를 몸소 겪으면서 역사와 인간에 대해 혜안을 지니게 된 작가의 우렁차고도 집요한 연설들 때문에, 책을 읽어가는 일이 가파르면서도 웅장하고 아름다운 산을 오르는 일과 비슷한 과업(!)이 되게 했다. 내 앞에서 단숨에 뛰어올라가 위쪽에서 어서 올라오라며 손짓하고 소리치는 작가의 스태미너(!)에 질리면서도, 나 역시 꾸역꾸역 올라가 끝을 보고 말리라는 절박함까지 느끼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을 왜 집에 데려왔는지 그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알라딘에 없어서 굳이 몇년동안 거래가 없던 교보문고에서 주문해가면서까지 말이다. 위고가 스스로 쓴 작품 중 최고라고 했다는 말 때문이었나?

그렇게 손에 넣은 책을 두달여 동안 그냥 책꽂이에 꽂아두었다가 이제 꺼내서 읽게 된 건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공연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공연은.. 환상적이었다! 뮤지컬은 또 다른 작품이니까 그 이야기는 다른 포스트에서 하도록 하고. 뭐 게을러서 못 한다면 할 수 없고.

아무튼 그렇게 잡은 이 책을 읽는 일은.. 이전의 두 작품을 읽을 때와 비슷했다. 진저리를 치고 헉헉대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좀 졸기도 하다가 마지막엔 뭐에 얻어맞은 듯한 기분으로 책장을 덮으면서, 내 속에서 무언가 썰물처럼 쏴아 빠져나가는 기분.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소설 속의 세상 뿐 아니라 이 세상까지도 멈춰주거나 끝났으면 하는, 텅 빈 가슴의 바램.


위고의 소설들이 읽기 힘들다고 느껴질 정도로 감정을 벅차게 하는 것은, 이 작가가 자신의 작품 속에 온갖 가치들을 적나라하게 대립시켜 놓고, 그 대립 사이에서 이야기를 출렁이게 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美]과 흉칙함[醜], 순수[善]와 악함[惡], 지배자와 피지배자, 극도의 사치와 극도의 빈곤 등이, 그의 작품 속에서는 적당한 것이 없다. 미(美)도, 추(醜)도, 선(善)도, 악(惡)도 모두 그럴 수 없이, 그야말로 결정체로서 제시된다. 그 사이에서 벌어지니 이야기들의 출렁임이 어떻겠는가. 두개의 최고봉 사이의 급격한 경사면을 따라 만들어진 롤러코스터 위에서 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 혹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한번에 닿으려고 가장 큰 진폭으로 움직이는 진자 위에 실린 듯, 독자는 벅참과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인물들이 모여 벌어지는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온통 과장과 격함으로 채워진, 막장 드라마와도 비슷한 인물과 이야기가 100년의 시간과 동서양이라는 공간, 전혀 다른 언어와 문화라는 몇 중의 장벽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러니까 진정한 위고의 매력은 무엇일까? 첫째는 롤러코스터 자체의 매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인물들(라 에스메랄다, 꼬제뜨, 그리고 이 소설의 '데아'), 그렇게 추하게 생긴 인물들(카지모도와 이 소설의 '그윈플레인'), 그렇게 숭고한 인물들(쟝발장과 어느 정도는 이 소설의 '우르수스'),  그렇게 사악한 인물들(떼나르디에, 그리고 이 소설의 '바킬페드로')이 위고의 문장으로 빚어져 눈 앞에 떠오르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그 묘사의 생생함 때문에 꿈꾸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책장을 곁눈질로 힐끗대기도 하고, 눈물이 날 것처럼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고, 구역질이 나거나 소름이 돋기도 한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세상이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인물들에 반사되어 그저 회색으로 있는 둥 없는 둥 사는 내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그의 장광설. '이야기'의 측면에서 보면 작품 속에서 편집해도 무방할 것 같은 장광설이지만 그 속에 담긴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확고한 관점, 뜨거운 인류애와 당시 사회상에 대한 촌철살인의 유머러스한 경구들은 (물론 때로는 독서를 지루하게 하지만) 마치 대가의 즐거운 강연을 경청하듯 독자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런 장광설에서 무엇보다 배우는 것은, 인간은 혼자가 아닌, '인류'의 일부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자기 시대에 함께 사는 다른 인간들의 고통에 무감할 수도 무감해서도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그의 인물들 중 선한 이들은 '운명'이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아무리 고립시키려고 수를 쓰더라도, 인간의 의지와 그 정신에 꺾이지 않는 무엇이 있음을 증명한다.


이 소설 <웃는 남자>는 <파리의 노트르담>과 <레 미제라블>이 그의 작품인 것만큼 위고 작품의 특징을 모두 보여주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변주곡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상을 좀더 자유롭게 확대하면 그윈플레인과 데아는 <파리의 노트르담>의 카지모도와 라 에스메랄다가 2백여 년 후 18세기 초 영국에 환생한 모습인 것 같기도 하다. 파리의 카지모도에게 뒤틀린 척추가 있다면, 영국의 그윈플레인에게는 '귀밑까지 찢긴 입, 드러난 잇몸과 으깨어진 코, 영원히 웃는 가면'의 얼굴이 있다. 그러나 카지모도의 지성은 거의 짐승 수준인 반면, 그윈플레인의 지성은 자유와 정의를 알고 바라는 인간의 것이다. 추한 외모에 걸맞는 정신을 가진 인간과 외모로는 뭇사람의 비웃음을 사지만 그들보다 훨씬 고귀한 영혼은 가진 인간 중 누가 더 불행한 출발점에 선 걸까. 한편, 데아는 라 에스메랄다만큼 순결하고 아름답고 다정한 처녀이다. 그러나 라 에스메랄다에게 아무런 장애가 없었던 반면, 데아는 장님이다. 그래서 라 에스메랄다는 페뷔스의 겉모습만 보고 넘어갔지만, 데아는 그윈플레인의 겉모습을 보지 못하는 대신 영혼을 보고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프롤로. 프롤로는 신에 대한 사랑을 핑계로 성당 속에 자신을 가두고 인간에 대한 연민을 깡그리 잊지만, 영국의 우르수스는 비록 인간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늑대를 반려로 삼아 스스로를 고립시키지만 성당에 숨는 대신 떠돌이의 삶을 자처해서 진정한 인간의 연민, 곧 가장 약하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그윈플레인과 데아를 거두어 끝까지 그들을 지켜준다. 그러나 <레 미제라블>의 떼나르디에 같은 뼛속까지 악당은 변하지 않고 똑같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서만 기쁨을 느끼는 바킬페드로로 환생한 듯하다. 파리에서 세상에 유혹당하고 그 때문에 고초를 겪는 것은 라 에스메랄다이지만, 영국에서는 출생과 기형적 외모에 비밀이 있었던 그윈플레인이 그러한 일을 겪게 되는데, 파리에서는 29세로 위대한 작가가 되겠다는 야심이 지배적이었던 위고는, 영국에서는 66세의 노인으로 공화정을 옹호하다가 프랑스에서 추방된 상태로 망명 생활을 하며 작가로서의 야망보다 뜨거운 인류애를 그윈플레인에게 고스란히 전해 주고, 그윈플레인은 극심한 빈곤과 착취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서, 그러나 그럴 수 없이 기괴하게 '웃는 얼굴'로 귀족들을 고발하고 철저하게 웃음거리가 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역사가 되풀이된다는 것은, 인간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뼛속까지 세밀하게, 아무런 이유 없이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악당들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파를 밀어버리겠다고 어린아이의 얼굴을 벗기고 끔찍한 새 얼굴을 심는 왕과 콤프라치코스, 어떻게 해서든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드는 떼나르디에와 누군가의 호의를 모욕으로만 느끼고 복수(!)하려 드는 바킬페드로와 같은 악당들과 그들을 이용하는 운명 때문에 고통받는 쟝발장과 꼬제뜨, 그윈플레인과 데아를 보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나아간다. 자기에게 보여준 라 에스메랄다의 연민의 힘으로 카지모도는 짐승에서 인간으로 진화하고, 미리엘 주교의 전부를 건 용서로 쟝발장은 결국에는 양심의 승리를 놓지 않게 되고, 우르수스와 데아의 사랑 때문에 그윈플레인은 권력과 재물의 정점에 올라 그것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비참한 이들을 옹호하고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었다. 결국 그들은 모두 비참한 상태에서 생을 끝내게 되지만, 그들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숭고함이며, 나라는 사람이 그들을 몰랐을 때와는 달라져야만 하고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어렴풋이나마 각성하게 된다. 

과장과 낭만으로 격렬하게 출렁이는 위고를 읽는다는 것은,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일종의 정화의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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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esum 2012-10-10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댓글에다가 자기가 무슨 백일장에 나온 글을 심사하는 사람인 것처럼 제대로 이해를 했다는 둥 못했다는 둥 겨우 그 책에서 그거 건졌냐는 둥 평을 다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 전에 쓴 이 글에도 오늘 확인해 보니 그런 댓글이 달렸었는데. 어찌나 기분이 나쁜지 대댓글을 다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야기에 진실이 하나뿐이고 읽는 법이 하나밖에 없다고 그리고 자기야말로 바로 그 진실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소설 읽을 줄 모르는(! 그렇다 나는 그런 이들을 그렇게 생각한다) 인간들이 남 가르치는 태도를 보면 순식간에 토나온다.
구역질 참으면서 대댓글 달았다가 그냥 날렸다. 뭐하러 남이 찍 갈긴 돼먹지 않은 '평가'를 계속 달아놓고 화내는가.
소설의 마지막 진실은 결국 독자 개인의 진실입니다. 어디다대고 선생질.
 
네 아내를 믿지 말라 ㅣ 스펠만 가족 시리즈
리저 러츠 지음, 김지현 옮김 / 김영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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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짓 존스 이후 최고의 칙릿이며, 키다리 아저씨 같은 고전이 될 수도 있다. 세번째 이야기까지 위트가 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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