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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읽어 본 사람이라면 열 중에 아홉은 '반전'에 대해 감탄하는, 식스 센스에 버금가는 반전으로 유명한 소설.
작년 초에(라고 생각했는데 5월이었군) 첫번째 블로거 추천 오늘의 책으로 소개된 것을 보고 흥미가 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값 도서에 떴다. 그래서 집에 데리고 왔다. 그걸 어제서야 읽었다. <웃는 남자>에서 너무 힘을 뺀 후이고, 개인적으로 복잡하고 속상하지만 내 힘으론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겨서 어지러운 마음에, 술을 마시자니 숙취의 물리적 후유증이 두렵고 에라 술술 넘어갈 만한 책이나 보자 해서 빼내든 책이다. 그리고 결론은, 정말 술 마신 것과 같은 효과를 봤다!
나는 술을 잘 못 마시는데다가 아예 두려워하는 편이다. 일단 맛이 없고, 그래서 첫 잔이 가장 괴롭고, 두세 잔 마시면 금방 알딸딸해지면서 취한 기운에 말리지 않으면 주는대로 받아먹기도 하고, 대여섯잔 그렇게 앉아서 받아 마시다가 테이블에 얌전히 엎드려서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속이 뒤집히면서 사지가 몇 시간은 맞은 듯이 쑤시고 결리고 아파서 깨어나서 울게 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을 때도 거의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남자의 입장에서 적나라하고 건조하게 묘사된 성관계 직후의 묘사로 시작되는 것이 일단 불쾌했다. 이후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자기 관리에 철저하면서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건조하고 냉소적인, 약간의 폼생폼사의 기질이 있는, 혼자서도 즐겁게 바쁘게 할 일이 많아 굳이 결혼이나 연애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그래도 어딘가에 진정한 사랑이 있겠지하는 기대는 버리지 않고 있는 남자 나루세 마사토라가 소개된 후 곧장 사건으로 뛰어든다. 문장은 나루세 마사토라의 식스팩만큼이나 군더더기가 없고, 전개도 스피디하다. 이리하여 한 잔에서 세 잔까지는 좀 빼기도 하고 다음날이 두려운 마음에 미적되지만 세 잔이 넘어가면 취기가 다음 술잔을 부르는 것처럼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고, 한 페이지만 더, 한 페이지만 더 하다가 보면 대망의 '반전'에 이르게 된다. 뭐야 이거……? 그러다가 몸에 힘이 쭉 빠지고 테이블에 얌전히 쓰러지는 것처럼 작가에게 두 손을 들고 정말 뒤로 누워버리게 된다. 그리고 깨어나는 끝맛은.. 나로서는 술에서 깨는 것처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떤 소설이 추리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읽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독자의 두뇌는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탐정과의 대결 모드로 맞춰진다.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와중에도 한 문장 한 문장을 촘촘히 읽고, 작가의 복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자신의 회색 뇌세포를 풀가동한다. 마지막에 탐정이 범인을 밝히면서 사건의 전모를 설명할 때면, 일부는 작가와 더 친한 탐정이 정보를 더 갖고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또 일부는 작가가 슬쩍 던진 실마리들을 무심코 보아 넘겼기 때문에, 독자는 자기에게 예정되었던 패배를 인정하면서 웃음과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것이 셜록 홈즈, 에르큘 푸아로나 미스 제인 마플, 피터 윔지 경, 브라운 신부님 등등을 대하는 독자들의 루틴이다.
이 소설 역시 추리소설을 '표방'하고 있다. 그런데 사건을 풀어가는 사람은 과거에 탐정 사무소에서 얼마간 일했던 경험이 고작인, 현재로서는 경찰이나 탐정들이나 범죄 세계와 어떤 끈도 없는, 탐정이라고 할 수도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사건에 관한 정보는 마지막 반전 직전의 한 가지 사실을 제외하면 주인공이 독자보다 더 아는 것도 없고, 사건의 해결에서도 독자보다 별로 우월한 위치에 선 것 같지도 않다. '수사'(랍시고)를 하는 것을 봐도 발품, 무조건 이웃집 문 두드리기 등으로 그냥 보통 사람이라면 능히 생각하고 실행할 만한 일들을 한다. 범인(들? 단체?)이 누군지도 알고,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도 아는데, 그걸 파헤치는 탐정의 스킬은 그저 그런 것 같이, 그렇게 진행되다가 독자가 '도대체 그 유명한 반전은 언제 나오는 거야?'라고 궁금할 때쯤 정말이지 생각할 수 없었던 사실이 드러난다. 이른바 그 유명한 반전(시작은 여주인공이 자기의 본명을 밝히는 시점인데, 난 처음엔 '뭐야, 이 여자 미친 여자였던 거야..?'했다. 사실 내가 더 미친 쪽에 가까이 있었는데 말이다.. ㅎ). 식스센스도 인정할 만한 반전.
이 반전은 탐정이 독자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먼저 알게 된 사실을 터뜨리는, 일반적인 추리 소설의 반전이 아니다. 이 반전은 작가가 처음부터 독자를 속이기 위해, 일반적인 독자의 선입견-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던-을 200% 활용한 반전이다. 자신에게 있는지도 몰랐던 선입견을 교묘히 이용한 작가의 트릭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도리는 없다. 독자의 허를 찌른다는 작가의 목적에 비추어 보면 사건 전체, 소설 전체가 맥거핀이다. 아니, 제목부터, 아련히 무언가를 그리는 듯한 순정만화 여주인공이 그려진 파스텔 색조의 표지부터, 이 반전의 클라이맥스를 위해 고안된 것이다, 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소설의 사건은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지 오래인 일본의 사회문제를 르뽀에 가깝게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외롭고 체면에 얽매이고 갖가지 행정적 절차에 어두운 노인들을 친절하게 구슬러서 비싼 값으로 물건을 팔고, 더 사도록 고리의 빚을 지게 만들고, 나중에는 노예처럼 부리는 악당들.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에 말년의 평안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전락하는 노인들. 우리 사회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어쩌면 지금 이순간에도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젊은 사람들도 비싼 대학등록금이다 일자리부족이다 해서 다단계판매와 고리의 대부회사의 꾀임에 심심찮게 걸려들어 인생 전체가 빚으로 망가지기도 한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가 고리대금에 의해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무섭도록 사실적이고 건조하게 독자에게 전달함으로써 일종의 고발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고발의 울림은 '식스센스급 반전'에 확 묻혀버린다. 솔직히 읽고 나면 그 '반전' 빼고는 머리가 하얘진다. 게다가 위에서 얘기한 첫 페이지의 바싹 마른 묘사와 잔인한 야쿠자, 그리고 여자란 창녀 아니면 양갓집 규수로 묘사할 수밖에 없는 장르 소설 속의 주인공다운 주인공의 시선이 읽는 내내 못내 불편했다.
아무래도 일본 추리 소설은 내 타입이 아닌가보다.
ps) 초반부에 '원조교제'란 말에서 사실 나는 좀 멈칫했다. 원조교제? 왜 원조교제라고 하지? 그런데 이후에도 별 설명이 없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넘어갔는데, 그것이 첫번째 단서였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