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남자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85
빅토르 위고 지음, 이형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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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 -2012-2-28 ~ 2012-3-4

웃는 남자 () -2012-3-4  ~ 2012-3-5


<파리의 노트르담>과 <레 미제라블>에 이은 세번째 위고.

<레 미제라블>까지 읽고 또 위고를 읽을지는 몰랐다. 앞의 두 작품을 읽을 때 너무나도 진이 빠졌던 까닭이었다

(마땅히 소설의 첫번째 항목이어야 할) 재미가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로(!) 페이지를 찢고 나올 것처럼 무섭도록 개성이 강하고 격정적인 인물들과, 혁명의 시대를 몸소 겪으면서 역사와 인간에 대해 혜안을 지니게 된 작가의 우렁차고도 집요한 연설들 때문에, 책을 읽어가는 일이 가파르면서도 웅장하고 아름다운 산을 오르는 일과 비슷한 과업(!)이 되게 했다. 내 앞에서 단숨에 뛰어올라가 위쪽에서 어서 올라오라며 손짓하고 소리치는 작가의 스태미너(!)에 질리면서도, 나 역시 꾸역꾸역 올라가 끝을 보고 말리라는 절박함까지 느끼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을 왜 집에 데려왔는지 그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알라딘에 없어서 굳이 몇년동안 거래가 없던 교보문고에서 주문해가면서까지 말이다. 위고가 스스로 쓴 작품 중 최고라고 했다는 말 때문이었나?

그렇게 손에 넣은 책을 두달여 동안 그냥 책꽂이에 꽂아두었다가 이제 꺼내서 읽게 된 건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공연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공연은.. 환상적이었다! 뮤지컬은 또 다른 작품이니까 그 이야기는 다른 포스트에서 하도록 하고. 뭐 게을러서 못 한다면 할 수 없고.

아무튼 그렇게 잡은 이 책을 읽는 일은.. 이전의 두 작품을 읽을 때와 비슷했다. 진저리를 치고 헉헉대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좀 졸기도 하다가 마지막엔 뭐에 얻어맞은 듯한 기분으로 책장을 덮으면서, 내 속에서 무언가 썰물처럼 쏴아 빠져나가는 기분.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소설 속의 세상 뿐 아니라 이 세상까지도 멈춰주거나 끝났으면 하는, 텅 빈 가슴의 바램.


위고의 소설들이 읽기 힘들다고 느껴질 정도로 감정을 벅차게 하는 것은, 이 작가가 자신의 작품 속에 온갖 가치들을 적나라하게 대립시켜 놓고, 그 대립 사이에서 이야기를 출렁이게 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흉칙함[], 순수[]와 악함[], 지배자와 피지배자, 극도의 사치와 극도의 빈곤 등이, 그의 작품 속에서는 적당한 것이 없다. (), (), (), ()도 모두 그럴 수 없이, 그야말로 결정체로서 제시된다. 그 사이에서 벌어지니 이야기들의 출렁임이 어떻겠는가. 두개의 최고봉 사이의 급격한 경사면을 따라 만들어진 롤러코스터 위에서 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 혹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한번에 닿으려고 가장 큰 진폭으로 움직이는 진자 위에 실린 듯, 독자는 벅참과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인물들이 모여 벌어지는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온통 과장과 격함으로 채워진, 막장 드라마와도 비슷한 인물과 이야기가 100년의 시간과 동서양이라는 공간, 전혀 다른 언어와 문화라는 몇 중의 장벽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러니까 진정한 위고의 매력은 무엇일까? 첫째는 롤러코스터 자체의 매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인물들(라 에스메랄다, 꼬제뜨, 그리고 이 소설의 '데아'), 그렇게 추하게 생긴 인물들(카지모도와 이 소설의 '그윈플레인'), 그렇게 숭고한 인물들(쟝발장과 어느 정도는 이 소설의 '우르수스'),  그렇게 사악한 인물들(떼나르디에, 그리고 이 소설의 '바킬페드로')이 위고의 문장으로 빚어져 눈 앞에 떠오르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그 묘사의 생생함 때문에 꿈꾸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책장을 곁눈질로 힐끗대기도 하고, 눈물이 날 것처럼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고, 구역질이 나거나 소름이 돋기도 한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세상이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인물들에 반사되어 그저 회색으로 있는 둥 없는 둥 사는 내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그의 장광설. '이야기'의 측면에서 보면 작품 속에서 편집해도 무방할 것 같은 장광설이지만 그 속에 담긴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확고한 관점, 뜨거운 인류애와 당시 사회상에 대한 촌철살인의 유머러스한 경구들은 (물론 때로는 독서를 지루하게 하지만) 마치 대가의 즐거운 강연을 경청하듯 독자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런 장광설에서 무엇보다 배우는 것은, 인간은 혼자가 아닌, '인류'의 일부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자기 시대에 함께 사는 다른 인간들의 고통에 무감할 수도 무감해서도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그의 인물들 중 선한 이들은 '운명'이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아무리 고립시키려고 수를 쓰더라도, 인간의 의지와 그 정신에 꺾이지 않는 무엇이 있음을 증명한다.


이 소설 <웃는 남자><파리의 노트르담><레 미제라블>이 그의 작품인 것만큼 위고 작품의 특징을 모두 보여주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변주곡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상을 좀더 자유롭게 확대하면 그윈플레인과 데아는 <파리의 노트르담>의 카지모도와 라 에스메랄다가 2백여 년 후 18세기 초 영국에 환생한 모습인 것 같기도 하다. 파리의 카지모도에게 뒤틀린 척추가 있다면, 영국의 그윈플레인에게는 '귀밑까지 찢긴 입, 드러난 잇몸과 으깨어진 코, 영원히 웃는 가면'의 얼굴이 있다. 그러나 카지모도의 지성은 거의 짐승 수준인 반면, 그윈플레인의 지성은 자유와 정의를 알고 바라는 인간의 것이다. 추한 외모에 걸맞는 정신을 가진 인간과 외모로는 뭇사람의 비웃음을 사지만 그들보다 훨씬 고귀한 영혼은 가진 인간 중 누가 더 불행한 출발점에 선 걸까. 한편, 데아는 라 에스메랄다만큼 순결하고 아름답고 다정한 처녀이다. 그러나 라 에스메랄다에게 아무런 장애가 없었던 반면, 데아는 장님이다. 그래서 라 에스메랄다는 페뷔스의 겉모습만 보고 넘어갔지만, 데아는 그윈플레인의 겉모습을 보지 못하는 대신 영혼을 보고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프롤로. 프롤로는 신에 대한 사랑을 핑계로 성당 속에 자신을 가두고 인간에 대한 연민을 깡그리 잊지만, 영국의 우르수스는 비록 인간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늑대를 반려로 삼아 스스로를 고립시키지만 성당에 숨는 대신 떠돌이의 삶을 자처해서 진정한 인간의 연민, 곧 가장 약하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그윈플레인과 데아를 거두어 끝까지 그들을 지켜준다. 그러나 <레 미제라블>의 떼나르디에 같은 뼛속까지 악당은 변하지 않고 똑같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서만 기쁨을 느끼는 바킬페드로로 환생한 듯하다파리에서 세상에 유혹당하고 그 때문에 고초를 겪는 것은 라 에스메랄다이지만, 영국에서는 출생과 기형적 외모에 비밀이 있었던 그윈플레인이 그러한 일을 겪게 되는데파리에서는 29세로 위대한 작가가 되겠다는 야심이 지배적이었던 위고는, 영국에서는 66세의 노인으로 공화정을 옹호하다가 프랑스에서 추방된 상태로 망명 생활을 하며 작가로서의 야망보다 뜨거운 인류애를 그윈플레인에게 고스란히 전해 주고, 그윈플레인은 극심한 빈곤과 착취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서, 그러나 그럴 수 없이 기괴하게 '웃는 얼굴'로 귀족들을 고발하고 철저하게 웃음거리가 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역사가 되풀이된다는 것은, 인간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뼛속까지 세밀하게, 아무런 이유 없이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악당들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파를 밀어버리겠다고 어린아이의 얼굴을 벗기고 끔찍한 새 얼굴을 심는 왕과 콤프라치코스, 어떻게 해서든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드는 떼나르디에와 누군가의 호의를 모욕으로만 느끼고 복수(!)하려 드는 바킬페드로와 같은 악당들과 그들을 이용하는 운명 때문에 고통받는 쟝발장과 꼬제뜨, 그윈플레인과 데아를 보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나아간다. 자기에게 보여준 라 에스메랄다의 연민의 힘으로 카지모도는 짐승에서 인간으로 진화하고, 미리엘 주교의 전부를 건 용서로 쟝발장은 결국에는 양심의 승리를 놓지 않게 되고, 우르수스와 데아의 사랑 때문에 그윈플레인은 권력과 재물의 정점에 올라 그것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비참한 이들을 옹호하고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었다. 결국 그들은 모두 비참한 상태에서 생을 끝내게 되지만, 그들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숭고함이며, 나라는 사람이 그들을 몰랐을 때와는 달라져야만 하고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어렴풋이나마 각성하게 된다

과장과 낭만으로 격렬하게 출렁이는 위고를 읽는다는 것은,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일종의 정화의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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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esum 2012-10-10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댓글에다가 자기가 무슨 백일장에 나온 글을 심사하는 사람인 것처럼 제대로 이해를 했다는 둥 못했다는 둥 겨우 그 책에서 그거 건졌냐는 둥 평을 다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 전에 쓴 이 글에도 오늘 확인해 보니 그런 댓글이 달렸었는데. 어찌나 기분이 나쁜지 대댓글을 다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야기에 진실이 하나뿐이고 읽는 법이 하나밖에 없다고 그리고 자기야말로 바로 그 진실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소설 읽을 줄 모르는(! 그렇다 나는 그런 이들을 그렇게 생각한다) 인간들이 남 가르치는 태도를 보면 순식간에 토나온다.
구역질 참으면서 대댓글 달았다가 그냥 날렸다. 뭐하러 남이 찍 갈긴 돼먹지 않은 '평가'를 계속 달아놓고 화내는가.
소설의 마지막 진실은 결국 독자 개인의 진실입니다. 어디다대고 선생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