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을 읽고 인생을 바꿔야 한다면 이 책이다. 뜨거운 가슴으로 차갑게 쓰여진 책이고 그만큼 쉽고도 괴롭게 읽힌다. 읽는 내내 죽비 같은 것이 내 머리를 후려치는 느낌이었다. 캐나다의 노동자들의 환경이 이러할진데 도대체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역자들이 모두 작업환경전문의인데 그런 전문의가 (정말 부끄럽게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수련받은 병원에도 있었던가? 있는 걸 알았다고 하더라도 전공과를 선택해야 했던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근시안이었고 내 새끼손가락의 고통을 다른 사람의 단말마의 고통보다 더 크다고 생각했었기에 이 과를 선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은 특히 과학자들의 ‘공감 격차’를 우려하고 있다. 자신이 과학자로서 노동자의 편에 서서 공감 격차를 줄이고 노동자의 작업 환경을 개선하고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일생을 ‘싸워 온’ 저자다. 노동자의 ‘편에 섰다’는 것부터 그는 중립이니 불편부당이니 하는 과학의 신화를 맹신하는 과학자들에게는 진짜 과학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그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판단이 개입하는 순간 중립도 불편부당도 눈속임일 뿐이다. 오늘날 판단의 저울은 누구의 선에 들려 있는가? 바로 자본이다. 자본이 과학자를 사고 과학자는 얼마든지 그 자본에게 유리한,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불리하지는 않은 결과가 나오도록 연구를 설계할 수 있고 적절한 표현을 이용해서 결과를 포장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을 인정하는 과학자는 한 사람도 없겠지만. 사실 완전한 ‘공감’이란 정말 그 자신이 되어보기 전에는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의 입장에 일시적으로 서게 된다 하더라도 나 자신이 그곳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는 알고 있다면, 어쩔 수 없이 계속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과는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저생활비로 한번 살아보라고 시켰더니 마트에서 세일하는 햄 같은 것을 사다가 상을 차리고 ‘황제의 식탁’ 운운 했던 과거 모 국회의원의 태도는 카메라에 찍혀서 알려졌기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일 뿐 나라는 인간도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완전한’ 공감을 원한단 말인가? ‘완전’은 불가능하지만 공감의 ‘격차’를 줄이는 일은 가능하고 당연히 해야할 일이다. 위의 국회의원을 경멸하는 것은 처음부터 공감에 대한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없어도 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천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천박한 인간이 되는 것은 그저 천박한 선택일 뿐이다. 결론: 나 자신의 공감 격차를 점검하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훌륭한 책. 그러나 20년은 늦게 읽은 책.
알라딘에서 내 주문을 검색해 보니 트루먼 커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구매한 게 2006년이다... 여지껏 읽지 않았다. 왠지 무서울 것 같고 작가에 대한 소문(?)도 좋지 않고... 그런데 이 작가가 명랑과 긍정 그 자체인 오드리 헵번의 <타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자라고? 호기심에 동해 집어 듬. 오드리보다는 소문의 커포티에게 더 가까운 이야기란 생각이 든다. 쓸쓸하고 낭만적이고 다시 쓸쓸하고 또 낭만적이고... 다른 생에서 살았던 별에 대한 향수鄕愁 같은 것을 생각하게도 하고. 가차없이 깔끔한 문장이 여백을 많이 내어 내 감정이 더 많이 박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제 정말로 <인 콜드 블러드>를 읽어 볼까나.
한때 신앙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빠져나온 혹은 통과해서 나온 작가가 그런 자신을 돌아보며 자기 맘대로 ‘소설’로 쓴 초기 기독교의 역사. <엠마뉘엘 카레르의 장편소설>이라고 써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소설’이 아니다. 그 때문에 읽는 내내 당황스러웠지만 뭐라고 부르든 읽을 만한 책이다. 나 자신을 속으로 불가지론자보다는 무신론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바깥으로도 그렇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부모님의 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배운 기독교, 그렇게 알고 있고 빠져 나온 기독교와 지금의 나에 대해 한 바닥 글을 써보고 싶게 한다. 언제나 될지.
현재 프랑스 평단에서 가장 환영받는 작가라는 엠마뉘엘 카레르를 이 책으로 알게 된 게 제발 안타까운 일이었으면 좋겠다. 온통 바늘투성이인 자의식(“뾰로통하게 토라져 누군가가 달래 주기만을 기다리는, 사랑받기 위해 미워하는 시늉을 하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 떠나려는 시늉을 하는 이런 어린애”)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찌질한 ‘부르주아’(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계급을 느낀’ 건 또 처음인 듯)의 징징거림을 솔직함이나 정직함으로 오해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나는 그의 다른 소설 <왕국>을 이미 사다놓았을 뿐이고, 이 소설 이전에 썼다는, 작가가 벗어나는데 7년이나 걸렸다는 <적>도 궁금하다. 자기 얘기 하는 거 아니면 찌질해 보이지는 않겠지...?
결국 릴라였다. 마녀였고 여자였고 인간인. 좋은 소설이란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해준 소설이다. 마지막까지 읽으니 <나폴리 4부작>이 정말 좋은 소설이고 특히 4권이 훌륭하다. 2016 맨부커 인터내셔널 파이널 리스트에 올랐던 모든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나라면 한강의 <채식주의자>보다는 이 소설에 표를 주겠다. 결국 나는 주말 동안 이 책을 읽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내일은 퇴근하고 청소와 빨래를 할 수 있겠지. 가엾은 화초들에게도 물을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