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책들에서 출간한 소설이면 (<개미> 저자 것 빼고) 일단 관심을 두는 편인데 이 소설은 역자 때문에도 흥미가 생겼다. 장르소설에서 자주 보던 믿을 만한(!) 역자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장르소설일 거라 생각하고 잡았던 건 아니고 뒷표지의 ‘하나의 살인 사건, 서로 다른 기록들’이라는 문구가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뭔가 라쇼몽적인 것을 기대하고? 그런데 받고 보니 맨부커상 쇼트리스트에 올랐었다네? 급호감으로 역시 깨작깨작 읽던 몇 권의 책을 제쳐두고 읽기 시작해서 단숨에 끝냈다.훌륭한 소설이다! 일단 재밌고, 그래서 잘 읽히고, 마지막장을 덮을 때 한숨이 나온다. 진실은 고사하고 사실이 무엇인지조차 의심하게 된다. 독자의 마음에 의심, 그러니까 생각할 거리를 심었다면 그것이 훌륭한 소설이라는 증거다, 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살인사건 보고서의 형식을 빌려 그 시대(19세기 초반 스코틀랜드) 뿐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지는 사회의 문제를 그저 건조하게 드러내서 어떤 직접적인 고발보다 더 통렬하게 계급과 권력의 불의함을 느끼게 한다. 나에게 특히 인상적인 것은 ‘범죄심리학 전문가’의 ‘과학적 지식’이라는 편견이었다. ‘안 봐도 안다, 나는 과학자이고 객관적이니까’ 라니. 배가 고파서 그만 자야겠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연상되었다. 찾아보니 <고도를 기다리며>가 5년 먼저 출간되었네. 대령의 기다림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보다 덜 무의미해 보이긴 하다. ‘무無의미’, 즉 ‘없음’의 상태에서 ‘덜’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데...<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기다림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오래되어 제대로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 기다리기라도 하지 않으먄 얘네들이 무엇을 하겠어...’ 했던 것 같다. 대령의 기다림은 다르다. 그의 기다림은 자존심을 넘어서 자기 존엄을 주장하는 행동이다. 수탉은 그 행위의 작은 깃발이고. 그야말로 ‘똥’을 먹더라도, 버릴 수 없는 자기의 가치. 인간이란 무엇을 먹느냐로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기에. *)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은 괴상한 책크기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이 소설은 짧은 중편 분량인데 소설 뒤에 거의 소설 분량만큼의 역자 해설과 작가의 자세한 연보를 붙여서 156면의 책으로 만들어냈다. 애쓴다... 더 문제는 역자 해설이 너무나 졸문이라는 것이다. 내용보다 문장 자체가. 쓰기 싫어 억지로 쥐어짜낸 글 같다.
서울 가는 KTX에서 대부분 읽고 집에 돌아와서 마저 읽었다. 짧지만 밀도 높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 <아무튼,>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읽어 보고 싶다. 이 책을 읽고 자기만의 서재에 대한 로망을 생각해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문득 작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일단 책으로 가득찬 방에 스스로를 가두어야 한다던 오르한 파묵의 말이 떠오른다. 나자신의 로망도 한번 써보고 싶다. 꿈을 이루려면 일단 구체화시켜야 할 테니까!글을 쓴 사람이 궁금하다. 예민한 자의식이 느껴지는데... 음.
시간 낭비가 아닐까 찜찜해 하면서 결국 다 읽음. 3천년간 스스로를 클론으로 증폭시키고 우주를 지배하던 독재자가 그 클론들 사이의 분열로 서로 싸운다는 설정... 그런 클론이 죽은 사람 머리에 신경계를 공유하는 칩 같은 걸 심어서 만드는 인공지능 보조체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