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세계 서던 리치 시리즈 3
제프 밴더미어 지음, 정대단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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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탄까지 오니 공포의 원인과 그 세계의 대략적이나마 윤곽을 그릴 수 있어서 공포 자체는 많이 경감되었다. 그러나 속속들이 명확한 것은 아무 것도 제시되지 않는다. 작가가 자신도 잘 모르는 세계에 대해 쓴 것인 마냥.

읽으면서 아주 오래 전 에드거 앨런 포의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을 읽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서 고든 핌이 선원이고 마지막에 어떤 형용할 수 없는 괴물 같은 존재를 맞닥뜨린 것 같다... 정도만 기억이 나는데 그 때 읽으면서 느꼈던 공포 다음 혼란과 지루함이 지금 이 시리즈를 덮으면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또 <메이즈 러너>의 설정과 비슷한 면이 있는데 <메이즈 러너>는 영 어덜트 소설답게 모든 것을 결말에서 깔끔하게 풀어주지만 이 소설은 뭐 전혀.

위어드 픽션은 내 취향은 아닌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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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의 땅 서던 리치 시리즈 1
제프 밴더미어 지음, 정대단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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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판타지라면 덮어놓고 사는 편인데 나탈리 포트만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진다 뭐지 궁금해서 우선 읽었다. 뭔가 설렁설렁 읽을 것으로 기분 전환을 하고 싶기도 했고. 가슴 졸이면서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기게 되는데 다 읽고 난 지금 무엇을 읽었는지 잘 모르겠다. 스릴러이기도 하고 호러이기도 하고 판타지이기도 하고. 위어드 픽션이라고 불린다 한다. 그런 장르명(?)이 있는 줄 몰랐다.

<에일리언> 시리즈와 비슷한 느낌이다. 특히 마지막 문장.
그리고 내 취향이 아니다. 너무나 많은 의문들이 거의 해소되지 않은 채로 끝나버린다. 그것도 호러가! 공포의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지 읺은 채 끝나버리면, 뭐 악몽이라도 꾸라는 건가!

너무나 모르는 게 많아서 그냥 2탄을 빨리 읽어버려야겠다. 이어지는 이야기도 아니라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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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방인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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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시험 때문에 초치기로 교과서에 실린 이창래의 글을 보고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결국 읽기로 한 것은 스파이 소설이란 소릴 어디서 봤기 때문이다... 뭐 스파이가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하지만(정체성을 탐구하는데 스파이만큼 훌륭한 도구가 또 있을까?), 장르로서 스파이 소설은 아니었다.

전체 23장 중 6장 정도까지는 정말 모호했고 지루했다. 진정한 자기를 숨기는 것이 본능인 스파이(어쩌면 진정한 자신이란 게 뭔지 몰라서 또렷한 목소리가 안나오는 건지도 모르겠다)의 1인칭 주인공/관찰자 시점으로 풀려가는 이야기라 더 그랬던 것도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이에게 사고가 생긴다... 기억하고 있는 어떤 사고보다 충격적인 묘사였다. 이 때부터 다시 심기일전하고 읽었지만... 사건을 화자의 심리로 은유로 느릿느릿 따라가면서 도대체 내가 읽는 것이 한국어가 맞나, 모르는 단어는 없는데 진정한 의미는 잡히질 않나, 독해력이 이렇게 형편없었나... 아무튼 끈질기게 읽었고 마지막 장은 모든 주제를 명료하게 폭발시킨다. 개운치 않은 여운... 그 말이 맞다.

영어로 쓰인 소설은 ‘서정적이고 신랄하고 명민한 언어‘라는 평가도 있던데 번역을 거쳐서 그런가(아니면 정말로 형편없는 독해력 탓일지도!) 잘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속 깊은 곳을 찌르는 몇몇 문장들을 건질 수는 있었다. 원제 <Native Speaker>와 한국어 번역서의 제목 <영원한 이방인>은 어찌 보면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단어들인데 묘하게도 같은 의미를 지시한다. 개운치 않은 여운의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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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9 1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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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9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푸른숲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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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는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외계인인) 헵타포드처럼 시간을 인식했던 것 같다.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보았고 한꺼번에 살았다. 천재이자 지치지 않는 노동자로서, 당장 외에는 아무 것도 볼 줄 몰랐던 동시대의 거의 모든 사람에게 쫓기면서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그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살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그가 아닌 어느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와 동시대에 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동시대에 살았다면 불멸을 바라보며 엄청난 노동을 감내한 이 사내를, 하루만큼의 전망도 갖지 못하고 사는 나는 결코 알아볼 수 없었겠지. 너무나 우스꽝스러워서 차라리 미친 거 아닐까 의심하며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150년 뒤에 살아서 츠바이크 같은 사람의 격렬하고도 생생한 안내를 따라 발자크라는 인간을 만난다.

<외제니 그랑데>와 <사촌 베뜨>를 어떻게든 읽어봐야겠다. 일단 내일 <잃어버린 환상>이 집에 도착하니 그것부터 읽고. 에 또 불어 공부를 해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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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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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ner
John Williams (1965) / 김승욱 역 / 알에이치코리아 (2015)
2017-3-13 ~ 2017-3-16

<스토너>에 대해 뭔가를 많이 쓰고 싶다. 뭔가를 많이 빨리 써서 머리와 마음으로부터 흘려보내고 싶다.
읽고 난 후 72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이후, 잠 속에서조차도 그를 떨칠 수가 없다.
그렇게 훌륭하고 멋진 인물이냐고? 아니다. 아마 스토너의 일생을 요즘 사람들에게 내가 얘기한다면, 십중팔구는 ˝그런 드응~신같은 인간이 있어?˝라며 짜증을 낼 것이다. 나도 듣기만 했다면, 아마 그런 반응을 보였겠지. 그런데 나는 읽어버렸고, 그래서 그냥 그렇게 짜증 내고 잊어버릴 수가 없다. 왜 그런지를 잘 풀어낼 수가 없어서 답답하고 어쩌면 좀 우울한 것 같기도 하다.

<스토너>를 읽는 내내 카뮈의 ‘멸시로 (응대하여)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이란 없다 Il n‘est pas de destin qui ne se surmonte par le mépris.‘는 경구가 떠올랐다. 이 경구는 사실 윌리엄 스토너에게 1도 어울리지 않는다. ‘멸시‘나 ‘극복‘이라는 단어는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이고, 행위란 그 주체의 의지를 어느 정도는 포함하는 것이다. 그런데 윌리엄 스토너는 일생에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 일이 거의 없다. 그의 일생에 일어난 거의 모든 일들 -심지어 남들은 거의 겪어보지 못할 단 하나의 진실한 사랑까지도-은 그에게 그저 닥쳐 ‘왔고‘, 그는 그것을 그냥 받아냈을 뿐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스토너는, 갯바위같은 인물이었다(그의 이름이 ‘돌 stone‘에서 파생된 듯한 ‘Stoner‘인 것이 더없이 적절하다). 갯바위는 파도를 바람을 햇살을 새나 물고기를 고르지 못한다. 그저 저에게 오는 대로 받고 깎이거나 바래거나 쉼터가 되어주거나 혹은 버려질 뿐이다. 수동도 아니고 온통 피동의 존재. 그런데도 카뮈의 경구를 스토너에게서 떨칠 수 없었던 것은 이 ‘드응~신‘, ‘갯바위‘같은 인물에게 위엄 dignity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자가 된 청소부‘ 류에서 보는 역설적인 위엄이 아니다. 그것은 파도와 바람과 세월이 모두 지나간 후에도 남아있는 석상의 위엄같은 것이다. 또는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보여주는)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p309)의 위엄이다. 그래서 초반에는 스토너가 자신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사건들에 응하는 모습에서 ‘이 뭐 병..?‘스럽다고 잠시 생각할 수 있지만, 그가 진정한 사랑과 헤어지게 되는 데에 이르면 그저 슬퍼지기만 하는 것이다.

윌리엄 스토너의 불행은 대부분 잘못된 결혼 -그가 능동성을 보여 준 정말 드문 사건인데 하필 아주 잘못된-에 기인한다. 이 부부는 한 사람은 환상에 젖어, 한 사람은 막연한 권태에서 탈출하려는 막연한 욕망 때문에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에 이르게 되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불행한 결혼 생활의 잘못을 어느 한 사람에게 모두 지울 수는 없다. 특히 윌리엄 스토너의 평생의 숙적이라 할 만한 그의 아내 이디스도 한꺼풀 벗기고 보면, 자신이 뭘 원하는지, 어떤 생활을 감당할 수 있는지, 한 마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인간이 함께 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비극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가엾은 예이다. 만약 스토너가 아내의 인간적인 약점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견뎌내는 대신 이해하고 다른 방향으로 이끄려고 했다면, 그러니까 죽음의 목전에서 그의 후회대로 그녀를 더 사랑했다면, 이디스도 얼마만큼 달라지고 그들의 결혼 생활도 어느 정도는 비극의 기운을 벗어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의 마지막에, 윌리엄 스토너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는 무엇을 기대했나? What did you expect?‘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지만 (혹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자신을 포함 그 누구에게도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것을 ‘누린‘ 것이 아니라 ‘견뎌낼‘ 수 있었겠지만, 또한 다른 사람의 기대를 짐작할 줄 몰랐다. 이디스는 물론 딸 루시와 진정한 사랑을 나눈 캐서린도 그 때문에 불행해졌다. 단지 이디스는 그런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에 철저하게 불행했고, 루시와 캐서린은 그를 사랑한 만큼 덜 불행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세영문학과 그것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 일에서만큼은 그는 원칙에 대해 거의 순교자적인 열의를 보여준다.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스토너가 훌륭한 삶을 산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단다.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고 그 일에서 어떤 의미를 느꼈기 때문에라고. 나는, 모르겠다. 작가가 구식이라 ‘일 job‘을 강조하고, 나에겐 그의 슬픈 관계들만 보이는 건지.

아무튼, 현실 세계에서 스토너와 같은 인물을 직접 겪게 된다면 ‘아이고 저런 드응~..‘했을 것을, 섬세하면서 명료한 문장으로 그려진 그의 내면세계를 읽으면서는 그저 슬프고 또 슬프기만 할 뿐이라는 게 나에겐 아이러니다. 그리고 그런 아이러니를 느끼게 해 주는 것이 문학의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슬픔과 아름다움과 고요함과 우아함이 뒤섞인, 잊지 못할 소설이다.

사족) 책 뒤표지의 광고 문구 ‘슬픔과 고독을 견디며/ 오늘도 자신만의 길을 걷는 당신을 위한 이야기/ 사는 모습은 달라도, 우리는 누구나 스토너다‘ 따위의 카피를 쓴 작자가 누군지 한 1분쯤 째려 보고 싶다. 왠지 이렇게 산 사람도 있는데 너는 행복한 줄 알아라 식의 뉘앙스가 느껴지지 않나? 게다가 윌리엄 스토너같은 사람보다는 이디스 스토너같은 사람이 주류다. 어디서 이 소설에다가 값싼 위로의 느낌을 덧씌우려고. 쳇.

사족 2) 원서를 샀다. 내가 이 소설을 정말 좋아하나 보다.

***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젊은 나이였지만(아버지는 스물다섯 살, 어머니는 겨우 스무 살),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부모는 항상 늙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서른 살 때 이미 쉰 살처럼 보였다. 노동으로 인해 몸이 구부정해진 아버지는 아무 희망 없는 눈으로 식구들을 근근이 먹여 살리는 척박한 땅을 지긋이 바라보곤 했다. 어머니는 삶을 인내했다. 마치 생애 전체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 순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p 9)

그는 한참 동안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련한 연민과 내키지 않는 우정과 친숙한 존중이 느껴졌다. 또한 지친 듯한 슬픔도 느껴졌다. 이제는 그녀를 봐도 예전처럼 욕망으로 괴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예전처럼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다시는 없을 터였다. 슬픔이 조금 가라앉자 그는 그녀의 몸에 부드럽게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끈 뒤 그녀 옆에 누웠다. (p 141)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압도적일 정도로 단순해서 대처할 수단이 전혀 없는 문제가 점점 강렬해지는 순간에 도달했다. 자신의 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그의 생각에는 그런 것 같았다). 문제의 의문이 지금 자신이 직면한 가장 뻔한 원인, 즉 자신의 삶에서 튀어나온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나이를 먹은 탓에, 그가 우연히 겪은 일들과 주변 상황이 강렬한 탓에, 자신이 그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탓에 그런 의문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는 보잘것없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것들 덕분에 이런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우울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느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無)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p 251 - 252)

하지만 윌리엄 스토너는 젊은 동료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 기억 밑에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가 분빌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낸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무명의 존재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다 간 선조들에게서 혈연을 통해 물려받은 것에 대한 지식이 항상 의식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선조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보여주자는 공통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p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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