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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Stoner
John Williams (1965) / 김승욱 역 / 알에이치코리아 (2015)
2017-3-13 ~ 2017-3-16
<스토너>에 대해 뭔가를 많이 쓰고 싶다. 뭔가를 많이 빨리 써서 머리와 마음으로부터 흘려보내고 싶다.
읽고 난 후 72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이후, 잠 속에서조차도 그를 떨칠 수가 없다.
그렇게 훌륭하고 멋진 인물이냐고? 아니다. 아마 스토너의 일생을 요즘 사람들에게 내가 얘기한다면, 십중팔구는 ˝그런 드응~신같은 인간이 있어?˝라며 짜증을 낼 것이다. 나도 듣기만 했다면, 아마 그런 반응을 보였겠지. 그런데 나는 읽어버렸고, 그래서 그냥 그렇게 짜증 내고 잊어버릴 수가 없다. 왜 그런지를 잘 풀어낼 수가 없어서 답답하고 어쩌면 좀 우울한 것 같기도 하다.
<스토너>를 읽는 내내 카뮈의 ‘멸시로 (응대하여)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이란 없다 Il n‘est pas de destin qui ne se surmonte par le mépris.‘는 경구가 떠올랐다. 이 경구는 사실 윌리엄 스토너에게 1도 어울리지 않는다. ‘멸시‘나 ‘극복‘이라는 단어는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이고, 행위란 그 주체의 의지를 어느 정도는 포함하는 것이다. 그런데 윌리엄 스토너는 일생에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 일이 거의 없다. 그의 일생에 일어난 거의 모든 일들 -심지어 남들은 거의 겪어보지 못할 단 하나의 진실한 사랑까지도-은 그에게 그저 닥쳐 ‘왔고‘, 그는 그것을 그냥 받아냈을 뿐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스토너는, 갯바위같은 인물이었다(그의 이름이 ‘돌 stone‘에서 파생된 듯한 ‘Stoner‘인 것이 더없이 적절하다). 갯바위는 파도를 바람을 햇살을 새나 물고기를 고르지 못한다. 그저 저에게 오는 대로 받고 깎이거나 바래거나 쉼터가 되어주거나 혹은 버려질 뿐이다. 수동도 아니고 온통 피동의 존재. 그런데도 카뮈의 경구를 스토너에게서 떨칠 수 없었던 것은 이 ‘드응~신‘, ‘갯바위‘같은 인물에게 위엄 dignity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자가 된 청소부‘ 류에서 보는 역설적인 위엄이 아니다. 그것은 파도와 바람과 세월이 모두 지나간 후에도 남아있는 석상의 위엄같은 것이다. 또는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보여주는)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p309)의 위엄이다. 그래서 초반에는 스토너가 자신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사건들에 응하는 모습에서 ‘이 뭐 병..?‘스럽다고 잠시 생각할 수 있지만, 그가 진정한 사랑과 헤어지게 되는 데에 이르면 그저 슬퍼지기만 하는 것이다.
윌리엄 스토너의 불행은 대부분 잘못된 결혼 -그가 능동성을 보여 준 정말 드문 사건인데 하필 아주 잘못된-에 기인한다. 이 부부는 한 사람은 환상에 젖어, 한 사람은 막연한 권태에서 탈출하려는 막연한 욕망 때문에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에 이르게 되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불행한 결혼 생활의 잘못을 어느 한 사람에게 모두 지울 수는 없다. 특히 윌리엄 스토너의 평생의 숙적이라 할 만한 그의 아내 이디스도 한꺼풀 벗기고 보면, 자신이 뭘 원하는지, 어떤 생활을 감당할 수 있는지, 한 마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인간이 함께 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비극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가엾은 예이다. 만약 스토너가 아내의 인간적인 약점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견뎌내는 대신 이해하고 다른 방향으로 이끄려고 했다면, 그러니까 죽음의 목전에서 그의 후회대로 그녀를 더 사랑했다면, 이디스도 얼마만큼 달라지고 그들의 결혼 생활도 어느 정도는 비극의 기운을 벗어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의 마지막에, 윌리엄 스토너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는 무엇을 기대했나? What did you expect?‘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지만 (혹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자신을 포함 그 누구에게도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것을 ‘누린‘ 것이 아니라 ‘견뎌낼‘ 수 있었겠지만, 또한 다른 사람의 기대를 짐작할 줄 몰랐다. 이디스는 물론 딸 루시와 진정한 사랑을 나눈 캐서린도 그 때문에 불행해졌다. 단지 이디스는 그런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에 철저하게 불행했고, 루시와 캐서린은 그를 사랑한 만큼 덜 불행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세영문학과 그것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 일에서만큼은 그는 원칙에 대해 거의 순교자적인 열의를 보여준다.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스토너가 훌륭한 삶을 산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단다.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고 그 일에서 어떤 의미를 느꼈기 때문에라고. 나는, 모르겠다. 작가가 구식이라 ‘일 job‘을 강조하고, 나에겐 그의 슬픈 관계들만 보이는 건지.
아무튼, 현실 세계에서 스토너와 같은 인물을 직접 겪게 된다면 ‘아이고 저런 드응~..‘했을 것을, 섬세하면서 명료한 문장으로 그려진 그의 내면세계를 읽으면서는 그저 슬프고 또 슬프기만 할 뿐이라는 게 나에겐 아이러니다. 그리고 그런 아이러니를 느끼게 해 주는 것이 문학의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슬픔과 아름다움과 고요함과 우아함이 뒤섞인, 잊지 못할 소설이다.
사족) 책 뒤표지의 광고 문구 ‘슬픔과 고독을 견디며/ 오늘도 자신만의 길을 걷는 당신을 위한 이야기/ 사는 모습은 달라도, 우리는 누구나 스토너다‘ 따위의 카피를 쓴 작자가 누군지 한 1분쯤 째려 보고 싶다. 왠지 이렇게 산 사람도 있는데 너는 행복한 줄 알아라 식의 뉘앙스가 느껴지지 않나? 게다가 윌리엄 스토너같은 사람보다는 이디스 스토너같은 사람이 주류다. 어디서 이 소설에다가 값싼 위로의 느낌을 덧씌우려고. 쳇.
사족 2) 원서를 샀다. 내가 이 소설을 정말 좋아하나 보다.
***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젊은 나이였지만(아버지는 스물다섯 살, 어머니는 겨우 스무 살),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부모는 항상 늙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서른 살 때 이미 쉰 살처럼 보였다. 노동으로 인해 몸이 구부정해진 아버지는 아무 희망 없는 눈으로 식구들을 근근이 먹여 살리는 척박한 땅을 지긋이 바라보곤 했다. 어머니는 삶을 인내했다. 마치 생애 전체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 순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p 9)
그는 한참 동안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련한 연민과 내키지 않는 우정과 친숙한 존중이 느껴졌다. 또한 지친 듯한 슬픔도 느껴졌다. 이제는 그녀를 봐도 예전처럼 욕망으로 괴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예전처럼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다시는 없을 터였다. 슬픔이 조금 가라앉자 그는 그녀의 몸에 부드럽게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끈 뒤 그녀 옆에 누웠다. (p 141)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압도적일 정도로 단순해서 대처할 수단이 전혀 없는 문제가 점점 강렬해지는 순간에 도달했다. 자신의 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그의 생각에는 그런 것 같았다). 문제의 의문이 지금 자신이 직면한 가장 뻔한 원인, 즉 자신의 삶에서 튀어나온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나이를 먹은 탓에, 그가 우연히 겪은 일들과 주변 상황이 강렬한 탓에, 자신이 그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탓에 그런 의문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는 보잘것없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것들 덕분에 이런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우울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느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無)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p 251 - 252)
하지만 윌리엄 스토너는 젊은 동료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 기억 밑에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가 분빌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낸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무명의 존재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다 간 선조들에게서 혈연을 통해 물려받은 것에 대한 지식이 항상 의식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선조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보여주자는 공통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p 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