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 가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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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발자크.
사실 읽은 지 3주나 되었다. 이 책 이후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를 읽고 거의 3주를 책을 읽지 않고 보냈구나.
3주가 지나는 동안 읽은 직후의 충격이 많이 가셔서, 지금은 그냥 가슴 어딘가에 덤덤한 느낌으로 자리잡았다.
읽게 된 아주 직접적인 동기는 '프로이트가 죽기 전에 곁에 두고 읽은 책'이라는 광고 문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질 수 있다면, 가지면 된다.
그러나 가질 수 없다면? 여기에는 두 가지 해결책이 있다. 첫째, 포기하거나 잊는 것. 둘째, 어떻게 해서든 갖(도록 노력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머리(이성)로 욕망과 그 결과를 시뮬레이션하고 폐기하는 방법과 몸(경험)으로 겪어서 욕망을 닳아 없어지게 하는 방법.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원하는 바가 생기면 어떻게 하나. 욕망을 충족시킬 여건이 되는 사람은, 그 욕망의 결과가 이성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겪어서 충족하기를 원할 것이다, 돈이 많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은 돈을 갖는다면 자기는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돈을 긁어 모은다거나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처 욕망을 충족할 만큼 돈을 모으기도 전에 그 과정에서 이미 시들어 버린다), 알콜중독자가 술을 마시면 정신이 흐려지고 건강을 해치게 된다는 걸 이성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여건을 만들어서 술을 마시고 그 결과 때이른 죽음의 손에 떨어지는 것처럼.

발자크는 이 소설에서 욕망을 이기는 두 가지 방법 -즉 욕망의 억제와 그 충동대로 살아가는 것-을, 소유자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 주지만 그 댓가로 소유자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만큼 줄어드는 신비의 나귀 가죽과 그 가죽을 손에 넣은 라파엘 발랑탱의 삶 속에서 극명하게 보여준다. 라파엘 발랑탱은 자신의 지성을 과신하고 파리 사교계에서 부와 미모로 가장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페도라에 대한 욕망으로 동분서주하지만, 가진 것을 모두 잃고 페도라에게서도 조롱만 당하자 결국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자살 하기 전 우연히 들른 골동품 가게에서 신비의 나귀 가죽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유하게 된 라파엘은 소원대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그 소원 성취의 댓가로 가죽이 줄어드는, 즉 자신의 생명이 단축되는 것을 보자 이번엔 그만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그는 거대한 저택에 자신이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아도 모든 필요한 일들이 저절로 이루어지도록 (그러니까 문은 모두 앞에 서면 자동으로 열리고 식사와 옷 같은 것은 충실한 하인이 챙겨주는 대로 입고 먹는 식으로) 갖추어 놓은 후 그 안에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려고 극도로 조심하면서 식물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욕망을 이루지 못해 차라리 죽어버리려고 했던 그가, 무슨 욕망이든 이룰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죽음이 두려워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표면적인 상징은 자명하다. 욕망대로 욕망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때이른)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죽음 속의 삶이라면, 욕망을 억제하며 사는 삶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삶 속의 죽음이라는 것. 이것이 모든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나귀 가죽을 손에 든 라파엘 발랑탱 앞에 놓인 모순이다.

나귀 가죽이 무서운 것은 욕망의 충족과 그에 대해 댓가를 치르는 것이 동시에 눈 앞에 보여진다는 것이다. 술을 마시면 당장은 괴롭지만 그 댓가는 나중에 속쓰림이나 심한 경우에는 죽음으로 치른다. 돈을 쓰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그 댓가는 나중에 카드대금청구서나 빚독촉으로 치른다. 아무리 올 것이 분명하더라도 일단 미래의 일이라면 그보다는 당장의 만족을 취하게 되는 것이 평범한 인간들의 마음인 것이다(카드회사는 이것을 이용하여 슈퍼세이브로 사람들을 꾀어낼 수 있는 것이고). 그런데 어떤 욕망의 댓가를 욕망의 성취와 동시에, 그것도 목숨으로 치러야 한다면? 욕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계약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 가죽의 능력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랜 세월 동안 자기 가게에 그저 걸어놓기만 한 골동품 가게의 주인처럼. 그러나 바라는 것이 많고 강력한 인간이라면 일단 덥석 잡고 볼 것이다. 우리의 라파엘 발랑탱처럼. 그러나 자기 바램/행동의 결과-그것도 죽음이라는 결과-를 그 즉시 눈앞에서 확인한다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즉시 동작그만 상태가 되는 수밖에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과 가장 멀리 떨어진 상태로 내몰린다.

그런데 왜 라파엘은 그 가죽의 신비를 그렇게 믿었을까? 어차피 자살할 결심까지 했었는데, 1-2년쯤 나귀가죽을 가지고 바랄 수 있는 소원을 모두 성취한 후 그 댓가로 '쿨하게' 죽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것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짧고 굵은, 기억에 남는' 삶이 아니었을까. 또는 어쩌면, '가죽이 절대로 줄어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소원을 빌어서 모순을 가죽 자체로 떠넘겨버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내가 아직 '죽음'에 대해 힘들이지 않고 생각할 만큼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이루지 못했거나 이룰 수 없는 욕심이 어떤 댓가를 치르면서라도 떨쳐 버리고 싶을 만큼 내 속에서 맹렬하게 들끓고 있기 때문인지도.

바라는 것은 많지만 얼마쯤은 여건이 안되어서, 얼마쯤은 밀고 나갈 만큼 배짱이 없어서 꾹꾹 누르면서 사는 나는, 많은 중대한 욕망을 채워서 이겨본 적도, 누르는데 성공해서 이겨본 적도 없다. 뭐 싸우지도 않고 그냥 눈치만 보는 정도에 멈추고 있으니 승패가 있을 수 없고, 이 상태가 어쨌든 져서 나를 잃는 상태보다는 낫다고 자위하기도 한다. 이런 나에게 나귀 가죽이 주어진다면, 나는 가죽이 쪼그라들어 결국 내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바라고 누리는 선택을 할 것이다. 물론 첫 번째 소원은 '네가 앞으로 나의 소원을 들어주면서 절대로 쪼그라들지 않기를 원하노라'로 하고! 욕망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이고, 그렇다고 욕망을 향해 내달리기만 하는 삶도 결국은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모순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인데도, 그 모순은 머리로나 이해해 볼 뿐, 내가 골똘한 생각은 결국 이런 것이었다.. ㅎㅎ

사족1) <고리오 영감>에서 만났던 라스티냐크와 비앙숑을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라스티냐크는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확실히 정했구나. 교묘한 술수를 써서 부유한 여자에게 자기 삶을 확실히 의탁하는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가엾은 고리오 영감의 쓸쓸하고 비참한 최후를 혼자서 지켜줄 만큼 진정 '인간다운' 면모가 있었지..

사족2) 만일 발자크가 나와 동시대의 작가였대도 이렇게 좋아할 수 있었을까? 발자크는 공화주의를 부정했고, 장자 상속을 강력하게 옹호한 보수주의자였다. 하지만 필력과 문학성은 뛰어났다. 그의 소설은 자신의 시대를 (자신의 정치적 관점을 떠나서) 정확하게 묘사하고 그로부터 시대를 떠나 보편적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깨우는 작품을 남겼다.
이 정력적인 작가를 생각하면, 자꾸만 이문열이 떠오른다. 현재의 이문열을 감히 발자크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은, 발자크는 거의 200년을 전 세계에서 살아남았지만, 이문열은 우리나라 사람 외에는 아직 생소한 작가이고, 그의 작품도 그렇게 오랜 시간의 시험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100년 후에는 어떨지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은 우리 나라에서는 고전으로 남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황제를 위하여>는 읽지 않았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나 <레테의 연가>는 잊히지 않는 소설이다. 그러나 그의 보수성은 이성의 영역을 살짝 넘어 수구반동에 걸쳐 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싫어하고 그의 소설도 더이상 읽지 않는다. 읽지 않아 놓고 이런 말을 하는 건 부당할 수 있지만, <선택> 이후 그의 소설에 그런 수구반동적인 보수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내가 발자크와 동시대를 살았더라도, 발자크의 작품을 읽었을까? 아무래도 그러지 않았을 것 같다. 그의 보수성 때문에 그를 '꼴통' 작가로 단정 짓고 아예 작품도 멀리 하였을 것 같다는 말이다. 소설가의 작품이 반드시 자서전인 것은 아니다. 설사 자서전이라 하더라도, 문학 작품의 완성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으로 성취되는 것이므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또는 발자크가 19세기가 아닌 21세기에 살았더라면 19세기보다 훨씬 더한 미친 물신숭배의 시대에 발자크는 누구보다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작가와 작품은 별개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마땅하다.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작가의 함량 미달의 작품을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수구보수적인 작가라 하더라도 그의 문학성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작품을 읽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쨌든 문학의 역할은 독자에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경험을 넘어선 삶들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다시 이문열로 돌아가서, 이문열의 밥통 같은 사상 때문에 그의 작품을 모두 싸잡아서 비난하거나 피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가 그의 보수성을 알기 전에 읽었던 작품에서 얻었던 감동까지 무시할 필요는 더더욱 없고. 100년 후 독자들은 이문열을 어떻게 평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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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2 11: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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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노트르담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3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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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나면 한참 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소설이 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의 삶이 덮은 책장 사이로 빠져나와서 독자의 어깨 위에 무겁게 앉아 있어서 그들을 다시 책장 사이로 돌려 보내고 나는 '이렇게나 무게 없는 나의 삶'으로 건너오기가 힘든, 그런 소설이 있다. 바로 앞에서 듣는 북소리처럼, 고수는 북채를 멈추고 있는데 그 소리는 울림이 되어 내 몸통에서 진동하는 느낌과 같은 그런 소설들이. 그래서 나로 하여금 자꾸만 소설에 빠지게 하는, 그런 소설이 있다. 오래 전에는 19세기 러시아 작가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 그랬다. 그리고 얼마전에 발자크를 읽고서 아주 오랜만에 그런 기분을 느꼈었다. 그리고 지금,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이다.

이 소설에는 세 명의, '인간'이라기보다 무언가의 화신인 듯한, 어떤 시대(변혁이 일어나던 시대, 구체적으로는 중세와 르네상스가 겹치는 시대)에만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은, 활활 타오르는 인물 세 명과, 물결을 타듯 바람을 타듯, 납작 엎드리기도 하고 허세를 부리기도 하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흔히 볼 수 있는, 가늘고 긴 인물 세 명이 얽힌다. 전자는 추함의 상징인 카지모도와 아름다움 순결의 상징인 라 에스메랄다, 그리고 외곬로 오랫동안 고인 나머지 썩어버린 정열의 상징인 클로드 프롤로 주교이고, 후자는 연극 대본을 쓰다가 망하고 라 에스메랄다 덕분에 거지패에게 의지해서 사는 작가 피에르 그랭구아르, 잘 생겼다는 이유 하나로 라 에스메랄다의 목숨 건 사랑을 받지만 정작 본모습은 바람둥이 난봉꾼인 파리 순찰대 중대장 페뷔스 드 사토페르, 그리고 클로드 프롤로와 거의 스무 살 차이나는 동생으로 프롤로에게 돈을 받아서 역시 술과 노름과 사람들을 조롱하는 재미로 사는 장 프롤로이다. 하나의 성정을 끝간데 없이 밀어붙이는 앞의 세 사람의 끝은 비참했다. 그 중 둘은 다른 인간들로부터 자의반 타의반으로 격리되어 삶도 우울했다. 제때제때 자잘한 욕망을 발산하며 굽혔다가 섰다가를 유연히 반복한 뒤의 세 사람은 나름 불만없이 누리고 살았으리라 생각한다. 그 중 둘은 살아남아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잘 살아간다. 앞의 세 사람은 다른 길을 갈 수 없었거나 보려 하지 않았기에 '운명'이 마련한 길을 그대로 따라갔고, 뒤의 세 사람은 매 순간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요리조리 잘 빠져 나가서 '운명'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앞의 세 명은 뭐든 넘치는 낭만적인 인간들이고, 뒤의 세 명은 그들에 비하면 보기에 하찮은 현실적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노트르담'이 있다. 연금술사의 비밀을 숨기고 있는 정문과 도합 열다섯 개의 종을 이고 있는 두 개의 종탑, 윗쪽에서 종탑을 둘러싸고 있는 돌이무기들, 중앙의 커다란 원화창과 끝으로 돌로 지어진 고딕식 성당 건물 자체.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17세기 초에 벌써 인구 오십만인 거대 도시 파리가 있다.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이들의 그림자가 어찌나 큰지 인물들은 전자이건 후자이건 모두 그 거대한 그림자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 같다.

여기에 빅토르 위고의 끝없이 늘어지는 만연체의 문장과 중간중간 끼어드는 추임새는 마치 우리나라 판소리꾼의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 이 이야기꾼의 말재주와 좌중을 휘어잡는 솜씨 때문에 그저 이야기를 '듣기만' 할 뿐인데도 눈 앞에서 등장 인물들이 뛰어다니는 듯한, 책 읽은 내내 머릿 속은 인물들과 장면들과 사건들로 웅웅거렸다. 이 소설의 모든 묘사가 '생생'하지만, 특히 후반부의 거지떼의 노트르담 습격 묘사는 정말이지 카지모도가 무서워서 벌벌 떨기까지 한 것 같다.

내가 특히 이 소설에서 공감한 인물은 클로드 프롤로 주교였다. 그저 학문이라는 한 길만 보며 고독하게 살아왔을 뿐인데, 그러느라 '인간적인' 욕망 따위는 한 방울도 흘릴 수 없어 속에 꼭꼭 눌러놓았을 뿐인데, 라 에스메랄다라는 아름다움의 화신을 보고 한 눈에 너무 깊이 반한 나머지 오랜 세월 쌓였던 정열은 한꺼번에 끓다가 결국 고약하게 변해가고 눈먼 운명이 모는 대로 끌려가는 사람. 라 에스메랄다 앞에선 프롤로 주교의 고백은 글자 그대로 뜨거워서 내가 다 데이는 것 같다. 그렇게까지 부패해버린 정념이라니, 그런 것까지 고백해야만 하는 그의 괴로움이라니.

그러나 라 에스메랄다는 가차 없이 그를 거절한다. 자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갑자기 퍼부어지는 뜨거운 고백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을 수도 있다. 아닌게 아니라 프롤로가 처음 그녀에게 고백한 장소는 차감고 축축하고 깜깜한 돌 감옥 안이었고, 라 에스메랄다는 며칠 밤낮인지도 모르는 채 그곳에서 추위와 배고픔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슬픔에 혼자 버려져 있었을 때니 타이밍도 매우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거절의 이유는 두려움 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너는 못생겼다. 가라!'는 것이었다. 비록 천대받는 유랑 집단인 집시의 일원이었지만, 아름다운 외모와 춤 솜씨, 노래 솜씨로 뭇 사람들의 웃는 얼굴만 보아온 그녀의 순진함은 '아름다운 것은 선하고, 추한 것은 악하다'라고 믿고 있어서 잘생긴 페뷔스에게서는 사랑을 발견하고 매달리는 반면, 오랜 고독과 자신도 압도당하면서 놀란 그녀에 대한 정념으로 음울한 모습을 한 프롤로 주교에게서는 악을 보는 것이었다.  

사실 작가도 처음에는 =, = 공식을 부정하지 않는 것 같다. 아름다운 라 에스메랄다는 그럴 수 없이 착한 마음씨의 소유자에 순수하고 순결하기까지 하며, 끔찍한 괴물처럼 생긴 카지모도는 프롤로 주교에게 온순한 짐승처럼 복종하는 것 외에는 귀도 먹은데다가 아주 심술궂다. 프롤로 주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되면서 적어도 카지모도는 악에서 선으로 극적인 변화를 겪으며, 페뷔스는 아예 양의 탈을 쓴 늑대인데다가, 라 에스메랄다의 선함은 선함이 아니라 그저 물정 모르는 순진함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결국은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 (내면의) 선함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더 나아가서는 아름다움과 추함, 선함과 악함은 그 정도의 수많은 조합으로 뒤섞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정열이고, 정열이 카지모도와 라 에스메랄다와 심지어는 클로드 프롤로 주교에게까지 어느 정도 숭고함을 부여한다. 이 세 인물의 격렬함은 위고가 작품 군데군데 삽입한 파리의 사법 제도와 형별 제도의 비판(귀머거리가 귀머거리를 재판하는 카지모도의 재판이나, 마녀 재판)이나 왕에 대한 조롱(바스티유 성 루이 11세의 방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플랑드르인들의 숨죽인 논평)같은 위트와 유머가 반짝이는 부분들조차 별 감흥없이 읽고 지나가게 할 정도이다. 그에 비하면 페뷔스나 그랭구아르나 장 프롤로는 초라하고 비루하다. 그렇게 살아남으니 좋으니하고 묻고 싶을 정도로.

발자크나 위고, 도스토예프스키, 반 고흐를 보면 19세기 유럽에 대해 동경이 생긴다. 도대체 그 시대는 어떤 시대였길래 이들을 그렇게도 격렬한 작품을 쓰고 그리도록 만든 것일까? 만일 내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그리고 그 시대의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매일매일 이어지는 일상에 치여 자기 시대가 인류의 역사에서 그렇게 많은 천재들을 방출하면서 들끓는 시대였다는 것을 아마도 몰랐겠지. 하지만 지금 그들의 작품을 보고 나서 타임머신 같은 것을 타고 그 시대로 가면, 그런 천재들을 낳은 시대의 끓는 대기를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이 책을 산 것은 작년 4월 말로, 파리 여행에서 본 노트르담에 대한 기억 때문에 읽어 보려고 했었다. 내가 방문한 시간에 미사가 있었는데, 높은 천장 때문에 약간 어둑한 성당에서 파이프 오르간이 연주에 맞추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성가를 부르는 것을 들으며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와서 숨을 죽이고 울었더랬다. 옆에 앉았던 중년의 수녀님이 연민의 눈으로 내 팔을 잡고 성찬대로 끌었지만, 신앙이 없는데 차마 성찬을 받는 신성모독은 할 수 없어서 못 나가고 계속 울었었다. 미사가 끝나고 해질녁에 좁은 나선형 계단을 몇백개 올라 노트르담 종탑 꼭대기에 올랐을 때, 내려다 보이는 센 강과 파리 시내도 아름다왔지만 벽에 매달린 각양각색 얼굴의 돌이무기들은 (그 때는 들은 풍월로만 알고 있었던) 종지기 카지모도의 외로움과 처연함을 아마도 이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짐작하게 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읽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문장이 길었다. 그리고 대충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카지모도도 라 에스메랄다도 프롤로 주교도 한참 동안 등장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압권인 건 역자 주였다! 첫 장부터 거의 모든 역사적 인물의 생몰연대와 지명의 현재 위치에 대한 주석이 붙고, 작가가 주석 없이 인용한 원전들을 일일이 붙여 놓았다. 한마디로 어깨 숫자 때문에 진도가 안 나가고, 그 주의 내용이란 게 읽는 흐름을 방해할 뿐 소설을 즐기는 일반 독자의 작품 이해에 큰 소용이 없는 것들이라 짜증만 쌓여갔다. 최고는 3부이다. 3부는 노트르담 종탑에서 내려다 보이는 파리의 모습에 대한 설명인데, 파리의 지리를 거의 모르기 때문에 주가 없어도 읽기에 고역이었을 판에, 매 지명마다 여기는 현재의 어디, 저기는 현재의 어디라는 식의 주가 붙고, 어떤 건물에 대한 설명에서는 이것은 언제 지어진 것이니까 위고가 착각했다느니, 이것은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느니 하는 자질구래한 주가 끝도 없어서 그만 책을 덮고 말았다. 차라리 파리 지도나 끼워 넣고 그런 주를 붙이든가 했으면 찾아보는 재미라도 있지, 도대체 현대의 파리를 가본 적도 없고, 어쩌면 앞으로 갈 일도 없는 수많은 독자에게 그런 주석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게다가 번역에서 한국어 단어 선택도 고루하다. 탄상이란 말이 많이 나오는데, 감탄이 더 많이 쓰이는 말 아닌가? 첨두홍예는 아예 사전을 찾아봤다. 그리고 왕은 계속 임금님이라고 부르고, 거지들의 성당 습격이 있던 날 밤 바스티유에서 루이11세가 그의 신하들과 나누는 대화는 마치 우리나라 사극에서 상감 마마와 대신들이 대화하는 것처럼 번역이 되어 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뒷날개에는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중략)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라고 이 문학전집의 기획 의도를 밝히고 있는데, 이런게 '오늘의 독자'를 감동시키기 위한 '오늘의 번역'이란 말인가? 고전이라면 아무리 발번역으로 독자에게 전달되어도 그 이야기의 힘이 결국은 독자를 감동시키리라 믿지만, 우리말을 다시 해석해야 하는, 원문은 정말 어떻게 표현되었을까를 고민하는 스트레스와 함께 오는 감동은 어느 정도 빛바랠 수밖에 없다.

다행히 3부를 넘어서서는 사건이 빠르게 진행되고 주석도 확 줄어서 3일만에 2권까지 완독했지만, 앞부분의 쓰잘데기 없는 역자 주석 때문에 이 소설을 그렇게나 오래 책장에 박아두었던 걸 생각하면 열이 확 오른다. <파리의 노트르담>은 누구에게나 다 읽어 보라고, 카지모도, 라 에스메랄다, 프롤로 주교만 있는게 아니라 페뷔스, 그랭구아르, 장 프롤로, 자루 수녀 귀뒬, 거지들, 성당과 파리도 있다고 권해주고 싶지만, 왠만하면 민음사 책은 피하라고 하고 싶다. 그래도 읽고 싶다면, 역주를 깡그리 무시하든가 3부는 일단 건너 뛰고 젤 나중에 읽든가(3부 끝부분에 건축의 발달과 인쇄술과의 바톤 터치에 대한 위고의 주장이 있으므로 결국 읽는 것이 낫다) 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결론은,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은 'Must-Read'의 고전으로 별 다섯이지만, 민음사에서 출판된 '책'은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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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환상문학전집 11
필립 K. 딕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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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제목, 우리말로 번역하면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이 되고 싶어 하나?' 쯤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전기양이란, 인간이 생사여탈권(전기스위치)를 쥐고 있기에 조용히 인간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대답은 당연히 "No!"인 질문으로. 

이런 생각은 걸출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 때문이었다. 그 영화는 내게 '생존의 한계를 거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고 조물주를 찾아나선 네 명의 레플리컨트(넥서스6 모델의 휴머노이드 로봇)의 대장정과 실패'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을 읽고 나니, 영화를 너무 머릿속에 넣고 읽기 시작했다는 아쉬움이 든다. 영화는 소설에서 그야말로 설정만 빌려왔을 뿐, 전혀 다른 이야기로 기억하는 것이 나을 듯하기 때문이다.

<블레이드 러너>가 내 인생의 영화 리스트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DVD를 Director's Cut이라고 한 번 사고, 'Five-Disc Ultimate Collector's Edition'이라고 또 살 만큼은 좋아하는(사실 이런 말랑한 느낌의 단어가 이 영화와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두려워하는'이라고 할 수도 없고, '마음에 품고 있는'도 어색하긴 매한가지다) 영화이긴 하다. (얼티미트 콜렉터스 이디션에는 1982년 미국극장개봉판, 전세계극장개봉판, 1992년에 발표된 감독판, 그리고 2007년에 그 DVD를 내면서 실은 파이널컷까지 네 개의 영화가 실려있는데 그걸 다 보고 뭐가 어디는 있는데 어디는 빠졌구나 하는 것까지 비교하지는 못했다.)

영화의 줄거리는 너무 유명하니까 여기서까지 다시 주절거릴 필요는 없겠고, 핵심 기둥(물론 내가 생각하기에)은 1)릭 데커드라는 '블레이드 러너(원래 소속된 곳에서 도망쳐 나온 레플리컨트들을 수색해서 잡는 경찰의 일종)'가 식민 행성에서 탈출한 네 명(개?)의 전투용 휴머노이드 로봇-안드로이드-레플리컨트를 추격하면서 한 명씩 물리치는 이야기, 2)릭 데커드와 레플리컨트 제조기업 총수의 미모의 조카 레이첼 사이의 이야기와, 이식된 기억을 가지고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었던 레이첼이 릭 데커드의 테스트를 통해 레플리컨트임이 드러나고 그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이야기, 3)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위에서도 언급하였던 것 같이, 네 명의 안드로이드들이 자신들의 수명을 연장해 달라고 탄원(?)하기 위해 조물주인 타이렐사의 총수를 만나려고 하는 이야기이다.

영화에서는 로이 배티를 대장으로 네명의 레플리컨트가 그들 중에서도 특히 수명이 거의 다한 레플리컨트인 프리스의 수명을 연장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자신들의 조물주인 타이렐을 만나려고 하는 것이 모든 사건의 출발점이 된다(영화상에서는 거의 끝부분에 드러난다). 레플리컨트가 자기 존재의 한계 때문에 고민하다가 뛰쳐나와서 직접 조물주와 대화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 이건 너무나도 익숙한 장면 아닌가. 지극히 인간적인, 역사가 생긴 이래 모든 (인간) 존재의 고민이자 꿈이 자신의 약함이나 세상의 일그러진 모습에 대해, 이 모든 것을 '직접 만드신 이'를 만나서 따져도 보고, 설명도 듣고, 가능하면 고침 받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소망을 품고 타이렐 앞에 선 레플리컨트 로이 배티를 보면, 신 앞의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레플리컨트의 4년이라는 수명은, 영화 속에서는 과학 기술의 한계가 문제라기보다,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과 육체를 지닌 넥서스6 모델의 안드로이드에 대해 안전핀으로 도입된 것이었다. 즉 조물주가 자신의 힘을 완전히 넘어서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레플리컨트에게 '일부러' 이식한 한계였던 것이다. 피조물인 로이 배티는 조물주를 직접 만나서, 조물주가 홀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쓰다듬는 것에 잠시 동안 감격하다가, 그가 자신에게 이식한 한계의 이유와 당장은 그것을 고칠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이 조물주의 머리를 두 손에 쥐어짜서 으스러뜨린다. 그 때 그의 표정은, 아마도 '신이 죽었다는 걸 사람들은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라고 물었던 니체의 표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사실 이렇게 니체를 오용하면 안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니체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주워 들은 것밖엔 없으니까 말이다)?

레이첼이라는 인물도 생각할 거리를 무수히 준다. 그녀의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은 (이식된 줄 몰랐던) 어렸을 때의 몇 가지 기억과, 엄마가 자신의 머리를 빗겨주는 한 장의 흑백 사진 뿐이다. 뒤집어서 보면, 누군가에게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는데 필요한 것은 결국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나다'라는 정체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기억이란, (현재의 과학 기술로는) 이식될 수는 없는 것이라 쳐도, 자신에 의해서든 남에 의해서든, 특히 자신에 의해서라면 얼마든지 조작된 채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이렇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기억하고 있는 영화의 원작이라고 알려진 이 소설은, 그러나 영화의 중요한 전제들-로이 배티 일당이 식민 행성을 탈출하여 지구로 온 이유, 그리고 그들이 필사적으로 타이렐이라는 조물주를 만나려고 한다는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의 중심은 확실히 릭 데커드라는 현상금 사낭꾼인 인간이다. 그가 현상금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웃들은 진짜 양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전기양인 애완동물 대신에 '진짜 살아있는 동물'을 사기 위해서이다(그것이 그 시대의 최고의 사치이기 때문이며, 결국은 그의 물욕이다). 로이 배티 일당이 화성을 탈출한 이유는 모호하며(단지 화성이란 살 곳이 못되는 아주 척박한 땅이라는 것 뿐), 그들의 4년짜리 수명은 과학기술의 한계이고, 거기다가 이들은 조물주를 만나려고 하지도 않는다. 대신 방사선 낙진으로 두뇌가 망가져 '닭대가리'가 되어 인간들에게 소외당한 채 외롭게 살아가는 이지도어와, 인간 이상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오페라 가수(혹은 오페라 가수 행세를 하는)인 안드로이드 루바 루프트가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누가 인간이고 누가 안드로이드인지, 인간을 '기계 안드로이드'로부터 구분되게 하는 '인간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게 한다.

인간과 비인간-기계 안드로이드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보이그트-캄프 감정이입 테스트라는 일종의 심리테스트인데, 이 테스트의 가정은 '기계-안드로이드는 감정이입에 서툴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이외의 생명이 거의 사라진 지구에서 생명체가 고통받는 상황에 대한 묘사-곰가죽, 사슴머리, 낙태, 등등-를 들려준 후의 동공 반응 같은 것이 얼마나 빨리 나타나는지를 체크하는 것이다. 이 테스트의 해석에는 물론 자의적인 요소가 없지 않지만, 경험이 많은 관찰자라면 거의 실수하지 않으며, 릭 데커드는 바로 이 테스트 전문가이다.

그런데 사건이 진행되면서 릭 데커드는 바로 이 테스트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 죽이는 것을 즐기고, 감정이입의 능력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금 사냥꾼 필 레시는 자신이 진짜 다람쥐를 보살피고 키우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그는 인간이었고, 그는 루바 루프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 상황에 감정이입을 하는, 그러니까 기계에 감정이입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이 감정이입 테스트라는 것에도 구멍은 있다. 이 테스트는 정말 공감하는지 여부를 측정한다기보다는 공감의 결과라고 생각되는 빠른 신경 반응을 체크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드로이드 생산회사인 로젠(소설에는 타이렐이란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은 이 테스트를 통과할 만큼 빠른 신경반응을 보이는 '향상된' 모델을 만드려고 하고 있고, 레이첼은 어느 정도 그 테스트를 통과하기까지 한다(물론 릭 데커드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지만). 하긴, '공감'을 어떻게 측정한단 말인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로봇'이라는 주제는 이 소설이 씌여진 1968년에는 참신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사실 이 소설에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로봇'보다는 '로봇보다 더 로봇같은 인간'의 존재가 더 두드러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소설을 읽기 전에도 이런 주제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접했었다(그 이야기들이 다 필립 K 딕이나 아이작 아시모프에게 최초의 상상력을 빚지고 있겠지).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으로는 <터미네이터>와 <A.I.>가 있구나. 그런 걸 볼 때마다 나는,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따 인간을 만드셨다고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에게 과연 그 자신의 형상을 본딴 무엇을 만들 만한 능력 또는 자격이 있을까에 대해 생각했었다. 자신을 닮은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만들어진 피조물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부모가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많지 않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자식이야 언젠가는 나와는 독립된 인간으로 떼어낼 수밖에 없으니 어느 정도의 기간만 책임지면 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인간은 자식을 자신의 필요 때문에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로봇, 안드로이드라면? 인간이 로봇을 만드는 이유는 자신의 필요에 복종시키기 위해서이다. 그것을 더욱 인간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드려고 노력한다면, 인간이 알기에 인간의 일을 인간만큼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인간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필요해서 복종시키려고 만든 로봇을 또 다른 독립적인 존재,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인간의 이성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은 그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든 감정이든과 상관없이, 안드로이드가 충분히 인간과 가깝게 만들어졌다면, 그는 조물주 인간이 모르는 생각, 즉 자유의지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독립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안드로이드는 인간에게 반기를 들고..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이 올 수도 있겠지. 사실 그 기계는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처럼 반응하는, 어떤 면에서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인데 말이다.

이 지점에서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원하는가?', 즉 '안드로이드는 (인간처럼) 전기양을 가지길 원하는가?', "안드로이드는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가?'의 뜻으로 받아들이는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글쎄. 안드로이드가 굳이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원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안드로이드가 원하는 것은 인간이 누리는 것과 같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냐 인간이 아니냐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면 어떻고 안드로이드면 어떤가. 자기만의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라면,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라면, '언젠가는 죽는다'를 뺀 다른 운명에 대해 선택권을 갖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인간성에 관한 질문, 인간과 로봇-안드로이드와의 관계에 관한 질문에 대한 고민 외에도 이 소설은 미래 사회의 디스토피아적 묘사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쓸만한 인간은 모두 우주 식민 행성으로 떠나 버리고, 방사선 낙진 예보나 들으면서 별 희망도 없는 닭대가리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늙은이들(릭 데커드는 둘다 아니지만, 현상금 사냥꾼으로서의 자신의 일 때문에 떠나지 못한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이 키플 더미와 함께 살아가는 지구. 인간 이외의 생명이 거의 모두 멸종하여 살아있는 동물을 애완동물로 키우는 것이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죽을까봐 두려워서 옆에 가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고, 자연스러운 기분도 느끼거나 표현하지 못해 기분전환기에 의존하며, 고독은 감정이입기에 접속해서 '머서'라는 인물과 융합하는 것으로 해소하는 인간들(이 '감정이입기'라는 것을 가만히 보면,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접속한 온라인과 비슷한 것으로 느껴지면서 오싹함이 몰려온다). 이런 묘사가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도심 외에 대부분의 건물은 폐허와 다름없이 텅 비었으며, 광고판은 '지구를 떠나라'는 메시지만 반복하는 어둡고 숨막힌 도시로 표현된다. 리들리 스콧의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이 책의 디스토피아를 내 머릿속은 어떻게 그려냈을지 모르겠다.

하여튼 이 책을 읽고 마지막까지 한 생각은, 복제 인간 따위는 제발 만들지 말자. 우린 아직 안드로이드를 감당할 만큼 감정적으로 성숙하지 않았다. 그런 날은 오지도 않을 것이야. 좀 생뚱맞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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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진실 - 의사들은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는가?
데이비드 우튼 지음, 윤미경 옮김 / 마티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의학사에 관한 책을 세 권째 연달아 읽었다. 평소에는 한 분야에 대한 책을 묶어서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식의 독서가 바로 수많은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독서법이긴 하지만, 세상에 읽어야 할 책이 얼마나 많은데 같은 주제에 대한 책을 여러 권씩 그것도 붙여서 읽느냔 말이다. 그랬는데도, 직업에 관련된 일이다 보니 이렇게도 하는구나. 이렇게 읽고 나니 뭔가 아는게 많아진 듯한 느낌이 든다. 음.
사실 이 책도 읽지 않은 채로 책장에 꽂힌 지가 2년은 넘은 것 같은데 어떤 계기로 알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제목보다는 부제, '의사들은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는가?'에 혹했을 것이다.   

 

<의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의학'사상'의 역사가 당대의 정치경제적 상황의 역사와 맞닿아 있음을 횡설수설 논한 책이라면, 이 책은 의학'기술'의 역사가 문화적, 심리적, 제도적 걸림돌 때문에 갈짓자를 그리면서 나아왔다는 것, 즉 대부분은 실패한 역사라는 것을, 시종일관 진지하고 격앙된 어조로 빽빽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첫번째로 자신의 이러한 '실패한 의학의 역사'를 기술하려는 태도가 기존의 의학사의 관점 및 서술과 아주 다르다는 것부터 강조하고 있다. 의학도 잘 모르고, 역사도 잘 모르는 내가 이런 식의 역사 서술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할 수는 없겠다. 오히려, 이것이 내가 읽은 의학사에 관한 책 중 거의 첫번째이니, 앞으로 의학사 책을 더 읽는다고 하면 이 책의 논점이 기준이 될 수도 있겠지. 이런 것이 아마 폭이 좁은 독서의 단점이겠다.   

 

두번째로, 이 책이 서술하고 있는 '의학'의 역사는, 의학이 한번도 순수한 자연과학인 적이 없었고, 또한 그럴 수도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오직 의학의 '기술'적인 측면의 역사이다. 거의 2천 년 동안 서양의 의학은 질병이 아닌 '사람'을 치료했고, 따라서 치료 방법도 사혈, 사하제, 구토제로 충분했다. 이런 '의학'이 2천 년을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효과는 '치료' 때문이 아니었다. 무얼 해도 낫지 않는 병이 있는가 하면, 아무 거나 해도 나을 수 있는 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자연치유력(요즘의 과학으로는 그 질환에 대한 인체의 면역의 재구축 쯤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을 기반으로 다양한 위약 효과(의사에 대한 신뢰, 환자의 의지를 모두 포함한)였다. 요즘 같으면 같은 원인의 질환을 가진 환자 백 명을 같은 방법으로 치료했을 때 적어도 서른 명에게는 효과가 있어야 그 치료법의 효용을 인정해 주겠지만, 옛날에는 그런 통계적 사고나 지식이 없었으니, 단 한 명만 나아도 그 치료법은 계속 행해질 수 있었다. 더 고약한(?) 것은 나머지 99명 중 심지어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나빠졌거나 생명을 잃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례에서도 의사는 쉽게 책임을 벗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환자가 의사를 완전히 믿지 못했다거나, 지시를 '완벽하게' 따르지 못했다고 몰아붙이는 것이 간단했으니까 말이다. 이 정도면 정말 종교 수준이다.

과학이 임상에 적용되는 과정의 지연을 논하는 것은 오직 '서양'의학에서만 가능하다. 왜냐면 동양 의학은 과학이 아니라 '생각의 틀', 곧 우주관이며 철학이기 때문에 어차피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사실 이 책에서는 '동양 의학'이란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사의 해악'을 논할 때, '의사'에 '한의사'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 책이 굳이 논의를 의학 '기술'에 집중하고 있는 이유는 의학의 효과, 즉 질병을 치료하거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실제로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의학도 질병을 치료하거나 생명을 연장하는 '효과'를 위해 존재하므로, 이 의학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해악'을 끼쳐왔는지를 물어볼 수 있겠다. 그런데 한의학이 과학이 아니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서양 의학의 발달 과정을 논하는 글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은 이런 질문들로 바빴다. 이런 생각 또한 '자연과학의 분과'로서의 의학 교육만 받아와서 사고의 패턴이 이미 그 쪽으로 자리잡았기에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일까.

세번째로, 저자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강조하는 것은 현대에 과학이 실험실에 발견한 것이 얼마나 빨리 임상에 적용되는지를 볼 때, 16세기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자연과학의 발달이 의학기술에 적용되는데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그리고 결론은 당대의 문화적, 심리적, 제도적 요소들의 저항, 즉 자연과학 이외의 요소들 때문이라고 내린다.   

 

 

현대 의학의 연구 결과라고 해서 일반 의사들이나 환자들이 느끼기에 그렇게 빨리 진료실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연구 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그것이 임상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제안은 거의 보편화되어 있다 (사실 요즘의 연구는 임상과 관련이 높은, 임상 적응의 가능성이 많은 주제에 집중되는 경향까지 있다). 단지 그 제안이 실제로 성과물로 나오기까지는, 신약을 예로 든다면, 피할 수 없는 생체 실험(동물 실험)의 엄정함이 더욱 요구되고, 환자에게 직접 적용하는 임상 시험도 세 단계에 걸쳐서 충분한 기간과 환자에게 시행하도록 되어 있어서,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중반 이전(정확하게는 리스터의 방부 외과 수술이 시행된 1865년)에는 생물학 연구와 생체 실험을 하는 사람들이 그 실험의 결과로 인체를 더 잘 이해하게 됨으로써 더 나은 치료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연구는 오직 지식 추구를 위한 것이었고, 의학은 결코 과학이 아니라 갈레노스의 '철학'을 인간에게 적용시키는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의학 기술을 발달시키려고 하면, 지금까지 해온 것이 뭔가 잘못이나 부족함이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그런데 1865년 전의 의사들에게는 '전통'이라는 것이 부족하고 심지어는 잘못되었다는 자각이 없었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인간의 자연치유력과 위약 효과 때문에 나은 사람들을 자신의 공이라고 쉽게 생각했고,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질병'을 치료한다는 통계적 개념의 부재로 인해, 한 명이라도 나았으면 그 치료의 효과는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대 의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패의 세균설'이 확립되고 그것을 임상에 적용한 방부 외과 수술이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이 17세기 전반 현미경의 발명보다 무려 150년이나 늦어졌던 것이고, 그 사이에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의사의 손에 병을 얻어 사망하였던 것이다.

효과의 평가만 문제였던 것이 아니다. 문화적이면서 심리적인 문제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의사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하는 지식의 (내용은 달라도) 양과 비용이 굉장히 높았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애써 얻은 지식을 어느 날 잘못되었다고 바로 버리기에는 심리적 저항이 매우 강했다(예를 들면, 마취제가 발견된 후 바로 수술장에 적용되기 까지 5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던 것은, 당시 외과의사는 마취 없이 수술을 할때 환자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번개같은 속도'로 절단이나 절개를 하도록 배웠는데, 마취를 하면 그런 '번개같은 속도'를 보여줄 수가 없으므로 반의도적으로 무시했다고 한다). 사실 이건 어떤 전문가 집단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며, 현재진행형의 문제이기도 하다. 생뚱맞은 비유일지도 모르지만, 시어머니에게 심하게 괴롭힘을 당한 며느리가 나중에 자기 며느리를 심하게 괴롭히는 시어머니가 되는 이치이기도 하고.

현대의 의학은 결코 '나쁜 의학'이 아니다. 저자도 1865년부터 의학 기술은 환자에게 적용되었을 때 실제로 도움이 되는 기술로 발달해왔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한 '의원성(iatrogenic)' 질병에 대한 개념도 잡혀 있어서, 환자의 상태가 나빠진다면 어떤 것이 치료와 관련된 것이고, 어떤 것이 질병 자체과 관련된 것인지를 구분하여 판단하고, 아무리 그 질병을 없애는 데 효과가 있는 치료법이라고 하더라도 그 치료 때문에 수반되는 합병증이나 후유증이 매우 크다면 과감히 그 치료법은 폐기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학은 결코 완전히 '과학과 기술'만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치유력과 위약 효과라는 것이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영혼'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을 과학이 뉴런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완전히 설명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결국은 카오스(초기 조건의 아주 작은 변화 때문에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일 것이기 때문에, 의학이라는 것이 의사라는 인간이 환자라는 인간을 대하는 만나는 순간의 태도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좋은 의학'이란 환자에게 진정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의사의 마음으로부터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낼 것이기 때문에, 의학의 전통은 '어떤 경우든지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는 선서를 명문화한 히포크라테스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어가는 환자의 곁에서 환자의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소생시킬 방법이 없노라 인정하고, 동정의 마음을 다해 손을 잡아주는 것도 결국은 의학이기에.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진보 또는 변화의 속도는 미래의 결과를 내다보는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너무 늦고, 현재의 좋은 점에 안주하려는 (혹은 현재의 장점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너무 빠르다는. 어떻게 해서든 변화가 이루어져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된 이들이 이전 세상을 돌아보면, 참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사건들을 많이 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굳이 그런 불합리한 사건들을 끄집어 내어 파헤쳐 보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같은 불합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게 바로 역사로부터 배운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패러다임의 급격한 전환기에 처한 개인이 아날로그적 일상을 이어가면서 실제로 그런 변혁의 조짐을 읽고 따라가는 것은, 아니 '지금 변혁이 일어나고 있구나'하는 것을 읽어내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다. 뭔가 달라지는 조짐이 있을라치면 온갖 방법으로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요소'를 끌어내어 일단 안심하고자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또는 나쁜(지금까지 잘못 해왔다는) 소식에 첫 번째로 보이는 태도가 아니던가. 저자는 결국 '의학사'를 예로 들어 어떤 분야에서든 진정한 진보를 가로막는 평범한 인간들의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덧)

1. 교정되지 않은 오자가 많다. 열 개 정도 되는 것 같다.
2. 의학사에 영원히 이름을 새긴 훌륭한 분들의 (지금의 가치관에 의하면) 말도 안되는 바보 같은 생각과 행동에 대해 뒷담화를 듣듯 여러가지를 알게 되었다. 한가지 예를 들면 갈레노스는 '거친 바다를 본 꿈은 창자에 질병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효과적인 사하를 위해 가볍고 부드러운 사하제를 사용해야 한다'고 썼다고 한다. 이거야 원. 걸리버 여행기의 라퓨타성의 상류계급 사람들이 대변의 모양을 보고 그 사람의 생각을 유추한다(누군가를 암살해야 한다고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본 대변은 좀더 푸르스름하다나 어쨌다나)는 행태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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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이란 무엇인가 - 동서양 치유의 역사
파울 U. 운슐트 지음, 홍세영 옮김 / 궁리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현대에 (서양)의학은 자연과학, 생명과학의 한 분과이고, 의사는 과학자이다. 과학자로서 의사는 엄격하게 '과학적인 근거', 즉 많은 관찰과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세운 '가설'이 실험을 통해 재현하는 것이 관찰과 경험에 일치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실험을 통과한 '가설'은 이제 '과학적 사실'이 된다. 물리학이나 화학의 연구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의학(의료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은 또한 기술이기도 하다. 다른 과학 분야에서 과학자가 밝힌 사실에 근거에 기술자가 기계를 만들고 운용하듯 의사도 생명과학-의학에서 밝혀진 사실을 토대로 치료법을 고안, 개발하고 인체에 적용하게 된다. 복잡한 기계를 맨구석의 가장 작은 나사 하나부터 이해하듯, 일단 '정상' 인체의 구조와 기능, 작동 원리를 낱낱히 이해하고, 오작동하는 기계를 손볼 때 기계의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찾아서 그 부분을 손보듯, 인체가 '이상'을 보일 때 어느 부분, 어느 장기의 이상인지 찾아서 그 장기의 기능을 가능한 한 정상에 가깝게 돌려놓는 것이 의사가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과학자와 기술자가 하는 일이 어느 정도 독립적이라면, 의학에서는 기초의학 연구에 더 집중하는 의사와 임상 치료에 더 집중하는 의사로 나눌 수는 있어도, 기본적으로 한 사람의 의사가 과학자의 생각과 기술자의 일을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계적인 것에 적용되는 과학/기술과 의학은 결정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고 생각한다. 첫째, 기계의 '정상'상태는 고정된 한 가지이고 비교적 환경과 독립적인 반면, 인체의 '정상' 상태는 사람마다 다르고, 한 사람안에서도 환경과 끊임없이 뭔가를 주고 받고 있기 때문에 더욱 복잡하고 넓은 '정상 범위'가 있을 뿐이다. 둘째, 기계는 그 기계의 제작을 가능하게 할 과학과 기술의 발달 전에는 아예 존재할 수 없고, 일단 만들어진 기계는 완전히 인간의 손에 있는 '매뉴얼' 대로이지만, 인체는 그렇지 않다. 인체와 질병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 전에도 있었고, 병에 걸리면 그 실체를 완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일단 개입해야만 한다. '현대 의학'이라는 것이 인체의 세부적인 구조와 기능과 작동원리를 하나씩 과학적 사실로 파헤쳐 가는 동안에도 아직 과학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며, 그런 부분에서 발생하는 질병에도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방으로 더듬거리며 들어가듯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만들거나 적용해 놓고 나중에 그 원리를 찾아 매뉴얼을 만든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예를 들면 수혈 같은 것이 있다. 심한 출혈을 보이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피를 넣어주었을 때 소생하는 것을 경험했다고 하자. 그러나 수혈이 모든 과출혈 환자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수혈을 시작하자마자 거의 즉각적으로 사망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인간이 혈액형에 대해 완전히 알게 되기 전까지는 누구의 피를 어떤 사람에게 주어야 살거나 죽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운에 맡기는 수밖에. 하지만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수혈을 무조건 금지할 수 있었을까?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면역계의 많은 것들이 연구가 진행될수록 새로운 사실들, 일부는 이전에 예측했던 것과 정반대의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는 와중에, 골수 이식같은 치료는 어떤 사람은 완전히 회복시키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이식편대숙주반응을 심하게 일으켜서 원질병이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비참한 상태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면역계의 모든 것을 인간이 완벽하게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골수 이식 치료를 하지 말자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의과대학에서는 자연과학으로서의 의학이 성립된 이후의 지식과 기술만으로도 엄청난 양을 거의 주입식으로 학습해야 한다. 당장 임상이라는 전장에 나가기 위해 총 다루는 법 익히는 것도 빠듯한 것이다. 그래서 의학의 '자연과학' 이외의 측면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도 못하고 졸업하게 된다. 그렇게 교육받은 의사가 자연과학의 관점과 방법론에 입각하여 인간을 '인체'라는 '기계'로 보고 의학 지식과 기술을 적용하고 평가하는 틀을 벗어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데 현대의 의학이 '자연과학 - 생명과학'의 한 분과로서 자신의 위치를 정하고, 진단과 치료 행위 일체를 '과학적'으로 하려고 하지만, 위에서 얘기한 대로 '인간/인체'를 다루는 의학이라는 학문은 '자연과학' 속에 통합될 수 없는 아주 넓은 부분이 존재한다. 그리고 매일의 진료에서 의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당연히 의학의 이런 비-자연과학적 측면이다.

저자 서문의 일부이다.  

   
  이 책에는 서양과 동양의 의학사상이 전개되어온 흥미진진한 과정이 담겨 있다.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당대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의학 사상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양 문명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놀랍게도 서로 다른 두 문화 사이에는 2천 년에 걸친 전통의 유사성이 폭넓게 존재한다. 유럽문화에 바탕을 둔 '서양의학'이 19세기와 20세기에 중국에서 그토록 열광적으로 환영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학'은 역동적이고 독립적인 형태의 대안요법으로서 앞으로 중국과 서구에서 장기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을까? 의학사상의 전개를 방향짓거나 규제하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의료정책으로 모든 사람에게 한 가지 의학이론체계만을 지정해 주어도 좋은 것일까? 세계화는 의학사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까? 이 책의 내용은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교육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연과학으로서의 의학이 아닌 의학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의학은 분명 관찰-가설-실험-증명의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는 자연과학이 아니다. 다만 음양과 오행이라는 선험적 틀이 있고 인체의 어떤 현상이든 그 틀에 맞추어 설명할 수 있다. 틀은 하나이지만 적용하는 방식은 제각각일 수 있다. 게다가 그렇게 제각각 적용하면 다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는데도 다 옳다! (한의학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한의학은 '과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 '의학'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효과를 보인다(이중맹검 시험을 하면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과학이 아니니 이런 시험이 필요하지도 않겠지만). 그래서 동서양 의학의 역사를 비교한다는 이 책을 읽으면 이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 책의 내용은..? 아주 꽝이다. 
'의학'의 '역사'를 말할 때, '의학'은 현재의 좁은 의미의 의학, 서양의 자연과학의 전통 위에 과학적 방법론을 표방하고 발전하고 있는 의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내가 아는 의학이 그 좁은 의미의 의학 밖에 없어서 더 당황하고 짜증났다 (그래서 저자는 '의학'의 역사라기보다 '치유'의 역사라고 부제를 달았는데 그걸 빨리 알아채지는 못했다). 하지만 겨우 '의학'이란 개념에 적응한 후에도 이 책이 꽝이란 건 변하지 않는다.
첫째, 중언부언. '누가 "의학 사상"이라고 할 만한 것을, 어떤 계기와 어떤 추동력으로 고안해냈나?'라는 질문을 던지고, 3천년전의 역사로부터 그 대답을 찾는 논의부터 시작하는데, '자료가 부족하다, 그렇기에 이런 정도를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질문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정도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자료가 부족하다, 따라서 확실한 것은 없다', 이런 식으로 거의 200 페이지 가까운 중언부언이다.

(그나마 근대에 관한 서술에서는 좀 낫다. 자료의 양이 좀 나아져서 그런 건가?) 

둘째, 논지를 전개하는 방식도 지지부진하다. 마치 1차 자료를 정리하면서 자료의 여백에 자기 느낌을 써놓은 것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묶어서 책으로 펴낸 것 같다. 반어적 의문문("왜 하필 '그 사람'이 '그 시대'에 '바로 그 생각'을 했을까")에 하나마나한 대답이 수도 없고, 강조의 느낌표 남발에, 어색한 비유(창살 하나를 바꾸는 것은 쉬웠다!)들. 그냥 설명을 하지 비유가 더 어렵다.

셋째, 번역도 엉망이다. 원저는 독일어인데 영어로부터 중역한 책이라고 한다. 원저가 이렇게 딱딱 끊어지는 문장으로 되어 있어서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해서 어쩔 수 없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독해집이라니. 주어 서술어도 제대로 맞추지도 않고, 대명사도 도대체 얘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건지도 애매한 문장이 한둘이 아니고. 문장은 그렇다 쳐도, 한 문단을 여러번 되풀이해서 읽어도 중심어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번역이다. 내가 지식이 짧아서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룬 것이 분명히 아니다. 왜 독일어 전문번역자가 번역을 하고 한의사에게 감수받는 형식으로 하지 않고, 한의사가 영어로부터 중역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간단하다. 

첫째, '의학사상', 즉 인체와 질병을 바라보는 관점과 틀은 동양은 동양대로, 서양은 서양대로 당대의 정치경제적 조건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경향은 놀랍게도 최근까지 -그러니까 자연과학의 분과로서의 의학이 확립된 현재까지-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둘째, 중의학은 기능 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면서 발전해온 반면, 서양의학은 (형태학적) 세부구조를 규명하는데 관심을 가져왔다.

셋째, 에너지 위기나 환경오염, 점차 비인간화 되어가는 기술 중심 의학 등 여러 가지 도전 속에서 현대인들은 (과학 중심의 서양) 의학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데, 음양오행과 순환적 세계관의 '타당성'을 지닌 중의학이 그 대안으로서, 비유기체적인 것을 지양하고 생명체적인 기에 집중하며, 따뜻함과 공감, 그리고 조화로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의학은 (특히 치유의 측면에서) 한번도 순수과학인 적이 없었으며 늘 '현실'과 '타당성'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번째까지는 그렇다는 것이니 그렇다고 치고. 네번째 결론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이 책에서는 동서양의 각각의 의학사상의 변화 발전을 논의하면서 '현실'과 '타당성'을 계속 대비시키고 있다. 여기서 현실과 타당성 각각에 해당하는 원문 단어를 모르겠는데, 읽어가면서 보면 '현실'이란 '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현실'의 깊이는 자연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더 깊어진다. '오염된 물 때문에 콜레라가 발생한다'는 '현실'은 콜레라균이 입증됨으로써 '오염된 물의 콜레라균 때문에 콜레라가 발생한다'는 더 자세하고 세부적인 '현실'이 된다. 이에 비해 '타당성'이란 '말이 되는 것', 즉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만한 설명 쯤의 뜻인 것 같다. 따라서 '타당성'이란 '현실'이 아닐 수도, 또는 아직 발견되거나 증명되지 않은 현실일 수도 있다.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반드시 자연과학적 증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한의학과 음양오행설은 확실히 자연과학이 아니라 생각의 틀, 철학 체계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현대의 의학에서 이미 자연과학적으로 그 원인과 경과가 규명되어서 그것을 응용한 치료법까지 나와 있는 질병을 치료할 때도 이런 한의학과 음양오행설을 신뢰할 수 있을까? 하긴. 생각해보니 그런 질병은 원인균이 증명된 세균에 의한 질환밖에 없구나. 지금 인류를 가장 괴롭히는 병인 암과 기타 만성질환(에이즈도 아직 골칫거리지만 그 병은 원인 바이러스가 규명되었으니 더 나은 치료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니 빼고)은 그 복잡한 기전이 아직 완전히 규명되지는 않았으니 '타당성'의 영역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결론적으로, 다 읽어내는데 두달이나 걸렸고, 몇번이나 시간 아까와서 집어치우려고 했지만 그래도 끝부분에 서문에서의 질문에 대한 무슨 답이 있을까 싶어 끝까지 참고 읽었지만, 다 읽고 나서, 저자가 서문에서 내건 질문에 대한 온전한 대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한마디로 이렇게 지지부진하고 다 읽은 후에 아무런 성취감도 느끼지 못한 책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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