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노트르담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3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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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나면 한참 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소설이 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의 삶이 덮은 책장 사이로 빠져나와서 독자의 어깨 위에 무겁게 앉아 있어서 그들을 다시 책장 사이로 돌려 보내고 나는 '이렇게나 무게 없는 나의 삶'으로 건너오기가 힘든, 그런 소설이 있다. 바로 앞에서 듣는 북소리처럼, 고수는 북채를 멈추고 있는데 그 소리는 울림이 되어 내 몸통에서 진동하는 느낌과 같은 그런 소설들이. 그래서 나로 하여금 자꾸만 소설에 빠지게 하는, 그런 소설이 있다. 오래 전에는 19세기 러시아 작가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 그랬다. 그리고 얼마전에 발자크를 읽고서 아주 오랜만에 그런 기분을 느꼈었다. 그리고 지금,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이다.

이 소설에는 세 명의, '인간'이라기보다 무언가의 화신인 듯한, 어떤 시대(변혁이 일어나던 시대, 구체적으로는 중세와 르네상스가 겹치는 시대)에만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은, 활활 타오르는 인물 세 명과, 물결을 타듯 바람을 타듯, 납작 엎드리기도 하고 허세를 부리기도 하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흔히 볼 수 있는, 가늘고 긴 인물 세 명이 얽힌다. 전자는 추함의 상징인 카지모도와 아름다움 순결의 상징인 라 에스메랄다, 그리고 외곬로 오랫동안 고인 나머지 썩어버린 정열의 상징인 클로드 프롤로 주교이고, 후자는 연극 대본을 쓰다가 망하고 라 에스메랄다 덕분에 거지패에게 의지해서 사는 작가 피에르 그랭구아르, 잘 생겼다는 이유 하나로 라 에스메랄다의 목숨 건 사랑을 받지만 정작 본모습은 바람둥이 난봉꾼인 파리 순찰대 중대장 페뷔스 드 사토페르, 그리고 클로드 프롤로와 거의 스무 살 차이나는 동생으로 프롤로에게 돈을 받아서 역시 술과 노름과 사람들을 조롱하는 재미로 사는 장 프롤로이다. 하나의 성정을 끝간데 없이 밀어붙이는 앞의 세 사람의 끝은 비참했다. 그 중 둘은 다른 인간들로부터 자의반 타의반으로 격리되어 삶도 우울했다. 제때제때 자잘한 욕망을 발산하며 굽혔다가 섰다가를 유연히 반복한 뒤의 세 사람은 나름 불만없이 누리고 살았으리라 생각한다. 그 중 둘은 살아남아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잘 살아간다. 앞의 세 사람은 다른 길을 갈 수 없었거나 보려 하지 않았기에 '운명'이 마련한 길을 그대로 따라갔고, 뒤의 세 사람은 매 순간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요리조리 잘 빠져 나가서 '운명'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앞의 세 명은 뭐든 넘치는 낭만적인 인간들이고, 뒤의 세 명은 그들에 비하면 보기에 하찮은 현실적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노트르담'이 있다. 연금술사의 비밀을 숨기고 있는 정문과 도합 열다섯 개의 종을 이고 있는 두 개의 종탑, 윗쪽에서 종탑을 둘러싸고 있는 돌이무기들, 중앙의 커다란 원화창과 끝으로 돌로 지어진 고딕식 성당 건물 자체.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17세기 초에 벌써 인구 오십만인 거대 도시 파리가 있다.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이들의 그림자가 어찌나 큰지 인물들은 전자이건 후자이건 모두 그 거대한 그림자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 같다.

여기에 빅토르 위고의 끝없이 늘어지는 만연체의 문장과 중간중간 끼어드는 추임새는 마치 우리나라 판소리꾼의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 이 이야기꾼의 말재주와 좌중을 휘어잡는 솜씨 때문에 그저 이야기를 '듣기만' 할 뿐인데도 눈 앞에서 등장 인물들이 뛰어다니는 듯한, 책 읽은 내내 머릿 속은 인물들과 장면들과 사건들로 웅웅거렸다. 이 소설의 모든 묘사가 '생생'하지만, 특히 후반부의 거지떼의 노트르담 습격 묘사는 정말이지 카지모도가 무서워서 벌벌 떨기까지 한 것 같다.

내가 특히 이 소설에서 공감한 인물은 클로드 프롤로 주교였다. 그저 학문이라는 한 길만 보며 고독하게 살아왔을 뿐인데, 그러느라 '인간적인' 욕망 따위는 한 방울도 흘릴 수 없어 속에 꼭꼭 눌러놓았을 뿐인데, 라 에스메랄다라는 아름다움의 화신을 보고 한 눈에 너무 깊이 반한 나머지 오랜 세월 쌓였던 정열은 한꺼번에 끓다가 결국 고약하게 변해가고 눈먼 운명이 모는 대로 끌려가는 사람. 라 에스메랄다 앞에선 프롤로 주교의 고백은 글자 그대로 뜨거워서 내가 다 데이는 것 같다. 그렇게까지 부패해버린 정념이라니, 그런 것까지 고백해야만 하는 그의 괴로움이라니.

그러나 라 에스메랄다는 가차 없이 그를 거절한다. 자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갑자기 퍼부어지는 뜨거운 고백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을 수도 있다. 아닌게 아니라 프롤로가 처음 그녀에게 고백한 장소는 차감고 축축하고 깜깜한 돌 감옥 안이었고, 라 에스메랄다는 며칠 밤낮인지도 모르는 채 그곳에서 추위와 배고픔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슬픔에 혼자 버려져 있었을 때니 타이밍도 매우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거절의 이유는 두려움 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너는 못생겼다. 가라!'는 것이었다. 비록 천대받는 유랑 집단인 집시의 일원이었지만, 아름다운 외모와 춤 솜씨, 노래 솜씨로 뭇 사람들의 웃는 얼굴만 보아온 그녀의 순진함은 '아름다운 것은 선하고, 추한 것은 악하다'라고 믿고 있어서 잘생긴 페뷔스에게서는 사랑을 발견하고 매달리는 반면, 오랜 고독과 자신도 압도당하면서 놀란 그녀에 대한 정념으로 음울한 모습을 한 프롤로 주교에게서는 악을 보는 것이었다.  

사실 작가도 처음에는 =, = 공식을 부정하지 않는 것 같다. 아름다운 라 에스메랄다는 그럴 수 없이 착한 마음씨의 소유자에 순수하고 순결하기까지 하며, 끔찍한 괴물처럼 생긴 카지모도는 프롤로 주교에게 온순한 짐승처럼 복종하는 것 외에는 귀도 먹은데다가 아주 심술궂다. 프롤로 주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되면서 적어도 카지모도는 악에서 선으로 극적인 변화를 겪으며, 페뷔스는 아예 양의 탈을 쓴 늑대인데다가, 라 에스메랄다의 선함은 선함이 아니라 그저 물정 모르는 순진함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결국은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 (내면의) 선함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더 나아가서는 아름다움과 추함, 선함과 악함은 그 정도의 수많은 조합으로 뒤섞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정열이고, 정열이 카지모도와 라 에스메랄다와 심지어는 클로드 프롤로 주교에게까지 어느 정도 숭고함을 부여한다. 이 세 인물의 격렬함은 위고가 작품 군데군데 삽입한 파리의 사법 제도와 형별 제도의 비판(귀머거리가 귀머거리를 재판하는 카지모도의 재판이나, 마녀 재판)이나 왕에 대한 조롱(바스티유 성 루이 11세의 방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플랑드르인들의 숨죽인 논평)같은 위트와 유머가 반짝이는 부분들조차 별 감흥없이 읽고 지나가게 할 정도이다. 그에 비하면 페뷔스나 그랭구아르나 장 프롤로는 초라하고 비루하다. 그렇게 살아남으니 좋으니하고 묻고 싶을 정도로.

발자크나 위고, 도스토예프스키, 반 고흐를 보면 19세기 유럽에 대해 동경이 생긴다. 도대체 그 시대는 어떤 시대였길래 이들을 그렇게도 격렬한 작품을 쓰고 그리도록 만든 것일까? 만일 내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그리고 그 시대의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매일매일 이어지는 일상에 치여 자기 시대가 인류의 역사에서 그렇게 많은 천재들을 방출하면서 들끓는 시대였다는 것을 아마도 몰랐겠지. 하지만 지금 그들의 작품을 보고 나서 타임머신 같은 것을 타고 그 시대로 가면, 그런 천재들을 낳은 시대의 끓는 대기를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이 책을 산 것은 작년 4월 말로, 파리 여행에서 본 노트르담에 대한 기억 때문에 읽어 보려고 했었다. 내가 방문한 시간에 미사가 있었는데, 높은 천장 때문에 약간 어둑한 성당에서 파이프 오르간이 연주에 맞추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성가를 부르는 것을 들으며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와서 숨을 죽이고 울었더랬다. 옆에 앉았던 중년의 수녀님이 연민의 눈으로 내 팔을 잡고 성찬대로 끌었지만, 신앙이 없는데 차마 성찬을 받는 신성모독은 할 수 없어서 못 나가고 계속 울었었다. 미사가 끝나고 해질녁에 좁은 나선형 계단을 몇백개 올라 노트르담 종탑 꼭대기에 올랐을 때, 내려다 보이는 센 강과 파리 시내도 아름다왔지만 벽에 매달린 각양각색 얼굴의 돌이무기들은 (그 때는 들은 풍월로만 알고 있었던) 종지기 카지모도의 외로움과 처연함을 아마도 이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짐작하게 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읽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문장이 길었다. 그리고 대충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카지모도도 라 에스메랄다도 프롤로 주교도 한참 동안 등장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압권인 건 역자 주였다! 첫 장부터 거의 모든 역사적 인물의 생몰연대와 지명의 현재 위치에 대한 주석이 붙고, 작가가 주석 없이 인용한 원전들을 일일이 붙여 놓았다. 한마디로 어깨 숫자 때문에 진도가 안 나가고, 그 주의 내용이란 게 읽는 흐름을 방해할 뿐 소설을 즐기는 일반 독자의 작품 이해에 큰 소용이 없는 것들이라 짜증만 쌓여갔다. 최고는 3부이다. 3부는 노트르담 종탑에서 내려다 보이는 파리의 모습에 대한 설명인데, 파리의 지리를 거의 모르기 때문에 주가 없어도 읽기에 고역이었을 판에, 매 지명마다 여기는 현재의 어디, 저기는 현재의 어디라는 식의 주가 붙고, 어떤 건물에 대한 설명에서는 이것은 언제 지어진 것이니까 위고가 착각했다느니, 이것은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느니 하는 자질구래한 주가 끝도 없어서 그만 책을 덮고 말았다. 차라리 파리 지도나 끼워 넣고 그런 주를 붙이든가 했으면 찾아보는 재미라도 있지, 도대체 현대의 파리를 가본 적도 없고, 어쩌면 앞으로 갈 일도 없는 수많은 독자에게 그런 주석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게다가 번역에서 한국어 단어 선택도 고루하다. 탄상이란 말이 많이 나오는데, 감탄이 더 많이 쓰이는 말 아닌가? 첨두홍예는 아예 사전을 찾아봤다. 그리고 왕은 계속 임금님이라고 부르고, 거지들의 성당 습격이 있던 날 밤 바스티유에서 루이11세가 그의 신하들과 나누는 대화는 마치 우리나라 사극에서 상감 마마와 대신들이 대화하는 것처럼 번역이 되어 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뒷날개에는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중략)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라고 이 문학전집의 기획 의도를 밝히고 있는데, 이런게 '오늘의 독자'를 감동시키기 위한 '오늘의 번역'이란 말인가? 고전이라면 아무리 발번역으로 독자에게 전달되어도 그 이야기의 힘이 결국은 독자를 감동시키리라 믿지만, 우리말을 다시 해석해야 하는, 원문은 정말 어떻게 표현되었을까를 고민하는 스트레스와 함께 오는 감동은 어느 정도 빛바랠 수밖에 없다.

다행히 3부를 넘어서서는 사건이 빠르게 진행되고 주석도 확 줄어서 3일만에 2권까지 완독했지만, 앞부분의 쓰잘데기 없는 역자 주석 때문에 이 소설을 그렇게나 오래 책장에 박아두었던 걸 생각하면 열이 확 오른다. <파리의 노트르담>은 누구에게나 다 읽어 보라고, 카지모도, 라 에스메랄다, 프롤로 주교만 있는게 아니라 페뷔스, 그랭구아르, 장 프롤로, 자루 수녀 귀뒬, 거지들, 성당과 파리도 있다고 권해주고 싶지만, 왠만하면 민음사 책은 피하라고 하고 싶다. 그래도 읽고 싶다면, 역주를 깡그리 무시하든가 3부는 일단 건너 뛰고 젤 나중에 읽든가(3부 끝부분에 건축의 발달과 인쇄술과의 바톤 터치에 대한 위고의 주장이 있으므로 결국 읽는 것이 낫다) 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결론은,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은 'Must-Read'의 고전으로 별 다섯이지만, 민음사에서 출판된 '책'은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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