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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가죽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세 번째 발자크.
사실 읽은 지 3주나 되었다. 이 책 이후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를 읽고 거의 3주를 책을 읽지 않고 보냈구나.
3주가 지나는 동안 읽은 직후의 충격이 많이 가셔서, 지금은 그냥 가슴 어딘가에 덤덤한 느낌으로 자리잡았다.
읽게 된 아주 직접적인 동기는 '프로이트가 죽기 전에 곁에 두고 읽은 책'이라는 광고 문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질 수 있다면, 가지면 된다.
그러나 가질 수 없다면? 여기에는 두 가지 해결책이 있다. 첫째, 포기하거나 잊는 것. 둘째, 어떻게 해서든 갖(도록 노력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머리(이성)로 욕망과 그 결과를 시뮬레이션하고 폐기하는 방법과 몸(경험)으로 겪어서 욕망을 닳아 없어지게 하는 방법.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원하는 바가 생기면 어떻게 하나. 욕망을 충족시킬 여건이 되는 사람은, 그 욕망의 결과가 이성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겪어서 충족하기를 원할 것이다, 돈이 많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은 돈을 갖는다면 자기는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돈을 긁어 모은다거나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처 욕망을 충족할 만큼 돈을 모으기도 전에 그 과정에서 이미 시들어 버린다), 알콜중독자가 술을 마시면 정신이 흐려지고 건강을 해치게 된다는 걸 이성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여건을 만들어서 술을 마시고 그 결과 때이른 죽음의 손에 떨어지는 것처럼.
발자크는 이 소설에서 욕망을 이기는 두 가지 방법 -즉 욕망의 억제와 그 충동대로 살아가는 것-을, 소유자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 주지만 그 댓가로 소유자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만큼 줄어드는 신비의 나귀 가죽과 그 가죽을 손에 넣은 라파엘 발랑탱의 삶 속에서 극명하게 보여준다. 라파엘 발랑탱은 자신의 지성을 과신하고 파리 사교계에서 부와 미모로 가장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페도라에 대한 욕망으로 동분서주하지만, 가진 것을 모두 잃고 페도라에게서도 조롱만 당하자 결국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자살 하기 전 우연히 들른 골동품 가게에서 신비의 나귀 가죽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유하게 된 라파엘은 소원대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그 소원 성취의 댓가로 가죽이 줄어드는, 즉 자신의 생명이 단축되는 것을 보자 이번엔 그만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그는 거대한 저택에 자신이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아도 모든 필요한 일들이 저절로 이루어지도록 (그러니까 문은 모두 앞에 서면 자동으로 열리고 식사와 옷 같은 것은 충실한 하인이 챙겨주는 대로 입고 먹는 식으로) 갖추어 놓은 후 그 안에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려고 극도로 조심하면서 식물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욕망을 이루지 못해 차라리 죽어버리려고 했던 그가, 무슨 욕망이든 이룰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죽음이 두려워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표면적인 상징은 자명하다. 욕망대로 욕망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때이른)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죽음 속의 삶이라면, 욕망을 억제하며 사는 삶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삶 속의 죽음이라는 것. 이것이 모든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나귀 가죽을 손에 든 라파엘 발랑탱 앞에 놓인 모순이다.
나귀 가죽이 무서운 것은 욕망의 충족과 그에 대해 댓가를 치르는 것이 동시에 눈 앞에 보여진다는 것이다. 술을 마시면 당장은 괴롭지만 그 댓가는 나중에 속쓰림이나 심한 경우에는 죽음으로 치른다. 돈을 쓰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그 댓가는 나중에 카드대금청구서나 빚독촉으로 치른다. 아무리 올 것이 분명하더라도 일단 미래의 일이라면 그보다는 당장의 만족을 취하게 되는 것이 평범한 인간들의 마음인 것이다(카드회사는 이것을 이용하여 슈퍼세이브로 사람들을 꾀어낼 수 있는 것이고). 그런데 어떤 욕망의 댓가를 욕망의 성취와 동시에, 그것도 목숨으로 치러야 한다면? 욕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계약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 가죽의 능력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랜 세월 동안 자기 가게에 그저 걸어놓기만 한 골동품 가게의 주인처럼. 그러나 바라는 것이 많고 강력한 인간이라면 일단 덥석 잡고 볼 것이다. 우리의 라파엘 발랑탱처럼. 그러나 자기 바램/행동의 결과-그것도 죽음이라는 결과-를 그 즉시 눈앞에서 확인한다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즉시 동작그만 상태가 되는 수밖에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과 가장 멀리 떨어진 상태로 내몰린다.
그런데 왜 라파엘은 그 가죽의 신비를 그렇게 믿었을까? 어차피 자살할 결심까지 했었는데, 1-2년쯤 나귀가죽을 가지고 바랄 수 있는 소원을 모두 성취한 후 그 댓가로 '쿨하게' 죽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것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짧고 굵은, 기억에 남는' 삶이 아니었을까. 또는 어쩌면, '가죽이 절대로 줄어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소원을 빌어서 모순을 가죽 자체로 떠넘겨버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내가 아직 '죽음'에 대해 힘들이지 않고 생각할 만큼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이루지 못했거나 이룰 수 없는 욕심이 어떤 댓가를 치르면서라도 떨쳐 버리고 싶을 만큼 내 속에서 맹렬하게 들끓고 있기 때문인지도.
바라는 것은 많지만 얼마쯤은 여건이 안되어서, 얼마쯤은 밀고 나갈 만큼 배짱이 없어서 꾹꾹 누르면서 사는 나는, 많은 중대한 욕망을 채워서 이겨본 적도, 누르는데 성공해서 이겨본 적도 없다. 뭐 싸우지도 않고 그냥 눈치만 보는 정도에 멈추고 있으니 승패가 있을 수 없고, 이 상태가 어쨌든 져서 나를 잃는 상태보다는 낫다고 자위하기도 한다. 이런 나에게 나귀 가죽이 주어진다면, 나는 가죽이 쪼그라들어 결국 내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바라고 누리는 선택을 할 것이다. 물론 첫 번째 소원은 '네가 앞으로 나의 소원을 들어주면서 절대로 쪼그라들지 않기를 원하노라'로 하고! 욕망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이고, 그렇다고 욕망을 향해 내달리기만 하는 삶도 결국은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모순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인데도, 그 모순은 머리로나 이해해 볼 뿐, 내가 골똘한 생각은 결국 이런 것이었다.. ㅎㅎ
사족1) <고리오 영감>에서 만났던 라스티냐크와 비앙숑을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라스티냐크는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확실히 정했구나. 교묘한 술수를 써서 부유한 여자에게 자기 삶을 확실히 의탁하는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가엾은 고리오 영감의 쓸쓸하고 비참한 최후를 혼자서 지켜줄 만큼 진정 '인간다운' 면모가 있었지..
사족2) 만일 발자크가 나와 동시대의 작가였대도 이렇게 좋아할 수 있었을까? 발자크는 공화주의를 부정했고, 장자 상속을 강력하게 옹호한 보수주의자였다. 하지만 필력과 문학성은 뛰어났다. 그의 소설은 자신의 시대를 (자신의 정치적 관점을 떠나서) 정확하게 묘사하고 그로부터 시대를 떠나 보편적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깨우는 작품을 남겼다.
이 정력적인 작가를 생각하면, 자꾸만 이문열이 떠오른다. 현재의 이문열을 감히 발자크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은, 발자크는 거의 200년을 전 세계에서 살아남았지만, 이문열은 우리나라 사람 외에는 아직 생소한 작가이고, 그의 작품도 그렇게 오랜 시간의 시험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100년 후에는 어떨지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은 우리 나라에서는 고전으로 남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황제를 위하여>는 읽지 않았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나 <레테의 연가>는 잊히지 않는 소설이다. 그러나 그의 보수성은 이성의 영역을 살짝 넘어 수구반동에 걸쳐 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싫어하고 그의 소설도 더이상 읽지 않는다. 읽지 않아 놓고 이런 말을 하는 건 부당할 수 있지만, <선택> 이후 그의 소설에 그런 수구반동적인 보수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내가 발자크와 동시대를 살았더라도, 발자크의 작품을 읽었을까? 아무래도 그러지 않았을 것 같다. 그의 보수성 때문에 그를 '꼴통' 작가로 단정 짓고 아예 작품도 멀리 하였을 것 같다는 말이다. 소설가의 작품이 반드시 자서전인 것은 아니다. 설사 자서전이라 하더라도, 문학 작품의 완성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으로 성취되는 것이므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또는 발자크가 19세기가 아닌 21세기에 살았더라면 19세기보다 훨씬 더한 미친 물신숭배의 시대에 발자크는 누구보다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작가와 작품은 별개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마땅하다.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작가의 함량 미달의 작품을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수구보수적인 작가라 하더라도 그의 문학성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작품을 읽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쨌든 문학의 역할은 독자에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경험을 넘어선 삶들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다시 이문열로 돌아가서, 이문열의 밥통 같은 사상 때문에 그의 작품을 모두 싸잡아서 비난하거나 피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가 그의 보수성을 알기 전에 읽었던 작품에서 얻었던 감동까지 무시할 필요는 더더욱 없고. 100년 후 독자들은 이문열을 어떻게 평가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