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 혹은 방송 관계 회사들을 방문하게 되면서출판사에 비해 얼마나 보안이 잘되어 있는지 놀랐다. - P45

책은 느린 매체이지만, 그럼에도 가장 첨예한 생각들을 담는다. 첨예함은 때로 폭력적인 이들의 주의를 끌고 만다. 상상하기 싫은 사람들이 상상하기 싫은 일들을저지르려 할 때, 더 준비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방송계처럼 상시 보안 인력을 갖추는 것까지는 어렵더라도직원들과 관계자들의 안전을 위해 지금보다는 경계가필요할 것 같다. - P47

출판계의 많은 공적 자원이 심사를 통해 배분된다.
심사는 이렇게 이루어진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을 만큼 여전히 어떤 곳의 심사는 과정이 흐릿하고 편파적이기 그지없으며, 또 어떤 곳의 심사는 공정을 기하기 위해 언제나 새로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뒤쳐진 곳과앞서 나가는 곳을 합치면 평균적으로 나아지고 있는 것같기는 하지만 편차 자체가 줄어들어야 할 일이다. 더나아질 수 있을 만한 방법들을 떠올려보았다. - P51

그럼에도 책을 사랑하고 책을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늘 있어서 진입 경쟁률은 높은 편이다. 어렵게 진입하신 분들이 오래 일하면 좋겠지만, 꼭 그렇게 되지는않는 듯하다. "책을 멀리서 사랑할 때가 나았다"는 말을빈번히 듣게 되는데, 적은 임금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소회가 이어지곤 한다. 경제적인 면은 미리 감수하고 택했는데 기다리고 있던 것은 중구난방인 회사 내부와 비인격적 대우였다고 말이다. - P57

해외여행 중에 방문했던, 한 자리에서 백 년을 훌쩍넘긴 서점들이 부러웠다. 우리에게도 그런 공간들이 늘어나면 좋겠다. 어느 지역을 떠올릴 때 곧바로 함께 부를 수 있는 서점의 이름들이 사라지지 않고 더해지기만을 바란다. 긴 마감을 끝냈으니 가보지 않았던 곳에 가서, 그곳의 공기를 품은 책을 사오고 싶다. - P62

마땅한 존중을 이야기할 때가 왔다. - P59

"요새 원고료가 얼마예요?"
"장당 만원쯤 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 P66

클릭 수가 돈이 되는 현실에서, 글의 제목을 결정하는 데스크 담당자 중에는 일부러 한껏 공격을 유도하는이도 섞여 있다. 본문의 내용과 거리가 먼 제목에 몇 번이나 해를 입었고, 역사가 있어 어느 정도 품격을 기대하는 매체에서도 그런 일을 겪다보면 신뢰가 무너진다. - P69

이상한 취향이지만 괴서들을 좀 좋아하는 편이다. 용두사미라고 요약할 수 없을 만큼 중구난방으로 전개되는책, 키메라처럼 얼기설기 엮은 책, 괴상하다 못해 우스워지는 그런 책들에도 매력이 있고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책이 언젠가 고전의 반열에 오를양서로 발간되었던 시대는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와글와글하고 부글부글하게 잡탕 냄비가 끓어야 탁월한 무엇도 그 틈에서 탄생하리라 믿는 편이다. - P75

고."
"그 책이 정말 나와버린 걸 믿을 수가 없다."
"그 출판사는 멀쩡한 곳인 줄 알았는데 그런 책을 내 - P76

출판인들이글을 더 많이 쓰면 좋겠다 - P82

출판인들이, 인접 영역의 텍스트 노동자들이 저작의영역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면 좋겠다. ‘처음부터 작가였던 사람들만 진짜 작가‘라는 인식에는 아무래도 동의할 수가 없다. 텍스트를 사랑하며 다루는 사람들이 언제든 몸을 바꾸어 직접 생산도 할 수 있는 유연한 환경을그려본다. 8 - P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화보다 서울이 더 춥게 느껴졌던 나는 4월까지 코트를 입었고 옷자락에 묻은 기름자국도 그렇게 봄까지 학교생활을 함께했다. - P83

"아직도 코트 입고 다녀?"
잘생긴 이목구비 때문에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얼굴이지만 나는 누군지 못 알아본 척을 했다. 금성무는 자전거에서 내리더니 내 코트자락을 가리키면서 "아직도세탁 안 한 거야?" 하고 다시 말했다. - P85

누군가 놓친 유원지 풍선처럼 날아가버려도 그만일 테니까. 대문 밖만 나가면 아는 얼굴들이 나타나는 섬과, 사람물살을 헤치고 다닐 때마다 생소한 얼굴들이 차고 슬프게그를다가왔다 사라지는 이곳의 봄은 완전히 다른 계절이었다. - P87

"내가 괘럽와서 못 겐듸겠어요. 열몇살 어린 것 식집살이를 다 하고, 같이 늙어간 형님 봐서 참아왔어도 이제는전부 싫어요. 상황 되면 중국도 다시 갈 거고." - P93

"한참을 보고 있으니까 고기 살라고요? 하고 물어 내가 돈은 없어요. 했더니 영두 할머니가 어디 먼 데서 오셨시까? 하고 슥 묻더니 물고기 한 사라를 그냥 주더라고켜 먹어요. 하면서.. - P97

장사하러 나온 외할머니와 손님으로 만났다는 건 뭔가시시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수수께끼 하나는 푼 셈이니까나는 실망감을 감추며 그랬군요. 했다. - P97

리사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마음에 안 들어했다면 안나는 나의 이런저런 면들을 지나치게 좋아했다. 그래서 마치 스프레이 방향제처럼 칭찬을 뿌려댔다. 내가 금방이라도 돌아설까봐 붙잡아놓고 싶은 것처럼. - P99

"사람을 믿는 게 잘못은 아니야. 네 말대로 그렇게 혼자라면 믿어야 살 수 있으셨겠지.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누군가를 믿기도 해." - P102

"백화점 과일이라고 하나 다른 거 없어. 한국 사람들은거뜻하면 사치를 부려서는." - P105

내가 답하자 리사는 복숭아씨를 벤치 아래로 뱉고는땅속으로 밟아 밀어넣었다. 그리고 창경궁은 밤에 봐야정말 사람이 살았던 곳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정말 사람이 사는 집처럼 적당히 비밀스러워진다고. - P113

"수준을 들키는 것보다는 낫지." - P113

‘포도를 너무 좋아해서 죽다니." - P118

"그래서 섬으로 왔구나. 지금 반에서는 괜찮니?"
"적어도 우린 벌집 아래 누군가를 세워놓진 않아." - P122

명령들이 만들어주는 영향력만큼 허망한 게 있을까.
그런 식의 만족감이란 겨울의 빈 새둥지처럼 허망하고 쓸쓸하지 않나. 사람들에게는, 진심을 주지 않음으로써 누•군가를 결국 무력화하는 힘이 있는데 어떤 부류들은 그런진실에는 무관심하곤 했다. - P128

벚꽃철이면 그 당시 경성 인구의 10분의 1인 2만 5천명의 입장객이 하루 만에도 들어와 북새통을 이루는 창경궁에서 가장 조용한 곳은 의외로 맹수사였다. 사람들이 붙어 휘파람을 불며 관심을 끌려 했지만 교토에서 들여온사자는 단 한번도 포효한 적이 없었으며 위장병을 앓았다. 백두산에서 사로잡아 온 호랑이도 있었지만 암컷 한마리뿐이었기에 그다지 용맹함을 드러낼 필요 없이 심심해했다. - P131

"어렵겠니?"
자신은 없었지만 거절할 도리는 없었다.
"아니요. 할게요, 할머니." - P141

"계속 사람이 살면 창덕궁 담 모양을 제대로 못 본다는거지. 야, 근데 궁만 보면 됐지, 바깥담까지 누가 보냐? 너창덕궁 담다 보고 싶어, 안 보고 싶어?" - P140

"나, 평생 들을 멋지다는 말 도희씨에게 다 들은 것 같아. 자존감 장난 아니게 높아진다."
"들을 만하십니다." - P147

. 가만히 침묵할 때 오히려 뭔가가 더 힘있고 따뜻하게 부풀어올랐다. - P156

"사랑한다고."
"뭐라고?" - P156

"구원이 뭔데?"
어려운 질문이었다. 누가 그것에 답을 할 수 있을까. - P157

순종이 창덕궁과 창경궁에 박물관과 식물원 그리고 동물원을 만드는 데 동조한 것도 교육을 위해서였다. 순종은 어찌 되었든 왕궁 문을 직접 열어 근대 문물 수용에 앞장서는 행동을 취했다. 유서 깊은 궁에 백성들의 흙발이들어서는 일은 참을 수 없다며 대신들이 들고일어나자 - P1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소한 불운을 확인할 때마다 내가 가진 커다란 행운들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으니까. 나의 행운들을 생각하면 작은 불운에는 초연해질 수 있다. 예를들면 내가 다닌 여자고등학교에 대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학교를 좋아하는 고등학생은 많지 않을 것이다. - P165

학교에는 또 아주 오래된 작은 성당이 있었는데, 언제 늘어가도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종교와는 상관없이, 그냥혼자 있고 싶은 아이들은 가서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 P169

청소년기 특유의 샘솟는 열망은 누군가의 ‘팬‘이 되는데 쏟아부었다. 미국 가수를 좋아할 때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고, 한국 가수를 좋아할 때는 수없이 많은 가사를썼다. 고등학교 때는 인기 있는 언니들하고 친해지고 싶어서 풍물패에 들어갔다. - P175

대기실에 박나은 배우가 등장하는 순간 내가 여태 했던다짐이나 기대는 다 잊었다. ‘와,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싶은 분위기가, 환한 빛이 느껴졌다. 저절로 존댓말이 나왔고, 차마 치근댈 수 없었고, 쑥스러워서 얼굴을마주 보기도 어려웠다. - P1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집필과강연 사이 - P41

업무용 메일함을 찬찬히 살펴보니, 원고 청탁과 강연 청탁의 비율이 1대 3에 다다랐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쓰는 일보다 말하는 일을제안 받는 빈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 P41

출판계는충분히 안전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열매는 지난해 시월 상달, 우리 둘의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

처음에 배운 건 수리의 종류에 관한 용어들이었다. 중수와 중창과 재건의 차이 같은 것. 면접을 끝내고 받아 온『고건축용어사전』에서 가장 먼저 찾아본 말들이었다. 면접은 친구 은혜가 소개해준 자리였다. 건축사사무소인데문화재 공사 백서 기록담당자를 채용하고 싶어한다고, - P11

빨래터는 실제 정류장 이름이었고 궁에서 흘러나오는개울이 있는 곳이었다. 여름이면 사람들이 모이고, 동네고양이들도 목을 축이며 빨래터 수문을 통해 창덕궁을 드나들곤 했다. 비탈을 내려가보면 빨래터 물길은 사람이허리를 굽히고 걸어갈 만한 지하 통로로 이어졌다. - P15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야겠다 싶은 장소들은 아예발길을 끊어서 최대한 망각할 수 있게 노력해왔지만 이일을 맡으면 그곳에 대해 생각하고 더 알게 될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년 남짓의 내 임시 일자리가 있었고 600년 전에 건축된 고궁이 있었고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싶어 망각을 결심한 낙원하숙이 있었다. - P17

"아부지가 낮이 없네."
"낯 없는데 어떻게 말은 하네." - P25

"그러면 뭔데? 왜 나랑 절교하는데?"
은혜는 해송들 위로 낮게 비행하는 쇠기러기들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앉을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날개를 길게편채호를 그리고만 있는 새들. - P29

"대온실이 국가등록문화재이긴 한데 좋은 마음으로 안보게 되잖아요. 일제 잔재라고. 창경궁 복원공사 때 다른시설 다 철거되는데 겨우 살아남았죠. 생존 건물인 셈이에요. 기관에서는 그런 면을 꼭 써달라고 하더라고요." - P33

"그 정도 용기도 없으면서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거야?
다시 강화도로 가겠다는 거야?" - P39

우리는 할머니가 한켤레씩 사준 스케이트를 각자 가지고 있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 받은 선물이었다. - P45

낙원하숙으로 온지 며칠 되지 않아 나는 이 집의 사람들이 기이하게 불행하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보면 강화석모도에서 혼자 전학 온 중2짜리 여자애가 그 집의 최약체였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하숙집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어떤 병든 습벽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서울로 온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나는 늘 그렇듯 미래를 낙관했다. - P47

바다에 나가면언제나 놀 만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수영을 했느냐는 말은 네 첫 친구가 누구였냐는 말과 같았다. 머릿속에 없어도 그뒤로 기쁨이 계속되었기에 상실을의식할 필요가 없는 망각이었다. - P53

"포도나무를 재배하여 포도주 양조사업을 육성하매 안으로는 쌀술을 포도주로 대체하고 더 나아가 세계 만방에수출한다면 대대의 국민복(國民福)을 일으킬 것이다" - P59

"그 복병은 아주 작은 것이었어. 1밀리미터도 되지는 포도뿌리혹벌레." - P61

가. 제안 사항창경궁 대온실 수리 보고서 작성을 위한 설계도서내 연혁 및 원형 고증 작성과 관련한 소장 자료 열람 협조를 요청드립니다. - P71

"그러니까요, 배우신 분이 그러면 더 안 되죠. 여기도한국어 하시는 분들 계세요. 자, 에브리바디 레츠고백투조선. 사아, 조센에타이무스릿푸시테미마쇼카? 아버님도궁궐 잘 보고 가시고요." - P77

"그런데 빈집 지키는 기분 같은 걸 느낄 때가 있어요.
뭐라도 채워져 있는 곳은 대온실밖에 없잖아요. 원래 쓰임새대로 있는 건 거기뿐이야." - P79

그건 주유소에서 내 코트를 망쳐버린 금성무 역시 원서동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였다. 번호를 받은 건나였지만 세탁비를 물어내라고 연락하지는 못했다. 차라리내 연락처를 알려줬어야 했는데, 나는 뒤늦게야 생각했다. 그러면 물때를 기다리듯 편안하게 연락을 기다리면되는데. - P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