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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홀 ㅣ 사계절 1318 문고 78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2년 7월
평점 :
이 책을 읽은 지난 주부터 어제(8.16)까지, 나는 책 속의 주인공 '나'처럼 맨홀에 빠졌었다.
'자사고 취소 신청'이라는 막내 학교의 충격적인 선언에 1.2학년 440여명과 학부모들은 집단공황에 빠졌고, 교육청과 재단에 문제의 해결과 대책을 촉구하는 시위와 토론을 하면 할수록 절대 나올 수 없는 맨홀에 빠진 것과 같았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맨홀에서 빠져나올 사다리를 찾기 위해 기꺼이 몇날 며칠 금쪽같은 시간과 몸을 바쳤고, 어제 교육청과 재단과 학부모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그래서 나도 맨홀에서 빠져나와 홀가분하게 리뷰를 쓰게 되었고.^^
2010년 <합★체>로 사계절문학상을 받은 젊은 작가 박지리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가를 꿈꾼 적은 없다. 그래서 아직 소설이 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잘 모른다. 모르면서도 뭔가를 쓰긴 쓴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다."
소설이 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른다면서 써낸 두 편의 장편소설을 다 읽은 소감은 '대단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전작도 그랬지만 이 작품도 묘사가 뛰어나 문장을 읽으면 저절로 머릿 속에 풍경이 떠올랐고, 청소년보호센터에서 짜여진 일정을 보내는 주인공의 상황과 심리도 손바닥을 들여다 보듯 공감되었다. 소설이 뭔지 모른다는 작가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시간 같았던 과거와 현재를 엇갈려 진술하며 독자를 빠져나올 수 없는 독서의 맨홀로 몰아 넣는다.
오랜동안 아버지의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죽음과도 같은 공포를 견뎌야 했던 주인공 '나'는 아버지가 죽는다면 자기 남매의 손에 의해서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화재현장에서 16명을 구하고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소방영웅으로 죽었다. 아버지만 없다면 천국 같을 거라 생각했던 가족과 일상의 평화로움에도 소년의 마음 속엔 분노만 커져 갔다. 소방영웅이 된 아버지의 가면을 벗기고 진실을 발설하지 못한 무력감과 부끄러움은, 결국 증오했던 아버지를 닮은 꼴이 되어 졸지에 친구들과 함께 살인자가 된다.
그래, 난 한 번쯤 인간을 이렇게 패 보고 싶었어. 나만 늘 병신같이 당하란 법은 없으니까. 인간은 웬만해선 죽지도 않잖아. 밤마다 죽을 듯이 맞으면서도 다음 날이면 끈질기게 살아나는 게 인간이잖아. (227쪽)
자식은 그 부모가 하는 걸 본대로 배운대로 행한다. 어른들 말씀이 주정뱅이 자식 주정뱅이 되고, 바람둥이 자식 바람둥이 되며, 폭력 부모의 자식도 폭력을 휘두른다고.... 내 성장기 경험도 이런 말을 증명하는 듯했다.
왜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이토록 노력해야 하는 건지, 정작 그 사람은 우리 누구에게도 미안하다는 그 짧은 사과의 말도 한 적이 없고, 세상 영웅이 되어 죽었으니 이제와서 우리의 용서 따위는 필요로 하지도 않을 텐데, 왜 피해자인 우리가 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이렇게 애를 쓰고 서로 싸우고 눈물을 흘려야 하는 건지.
용서를 하고 나면 내 마음이 가장 편안해질 거라고?
그따위 속임수는 쓰지 마, 누가 편안해지고 싶대? 누가 그딴 걸로 행복해지고 싶다 했냐고. 자기 상처를 판 대가로 행복을 얻는 거라면 차라리 불행한 게 훨씬 양심적인 거 아니야?(160쪽)
소방관인 아버지는 죽음의 공포 때문에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른 건 아닐까 짐작되지만, 명쾌하게 진술하진 않는다. 생명을 담보로 한 특수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정기적인 심리치료를 받고, 가족도 같은 혜택을 받고 배려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도피처이자 구원처인 '맨홀'은 지친 발걸음을 불러 들인다. 맨홀의 은유와 상징은 결코 가볍지 않다.
온 도시를 헤매고 다녔지만 해 질 녘이 되어 걸음이 멈춘 곳은 결국 맨홀 앞이었다. 나는 맨홀 뚜껑을 열고 그 익숙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몸은 너무나 지쳐 있었고 내가 누운 자리는 그 어느 곳보다 안락했다.
나는 편안해지고 싶었다. 엄마와 누나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집안을 그렇게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내가 아는 가장 불쌍한 여자들이었다. 둘을 기쁘고 즐겁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내 모든 기억을 지워야 했다. 엄마 얼굴만 봐도 비쳐 보이는 폭력의 잔상, 누나의 마른 몸에 깃든 학대,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온몸에 불이 붙는 것 같은 내 환각에 차가운 물을 끼얹어 다 소각시켜야 했다. (163쪽)
폭력의 피해자였던 주인공이 한순간 가해자가 되었다. 요즘 학교에서 비일비재한 폭력의 이면에도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진 건 아닐까? 폭력을 막기 위해 학교에 지킴이 봉사자를 배치하고, 경찰이 순회한다고 폭력이 근절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상처받은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위로받을 수 있게 심리치료를 먼저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님이나 선생님, 심리학을 공부하거나 청소년 문제에 관심 있는 분들께 일독을 권한다. 특히 가정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거나, 힘의 폭력에 저항하지 못한 경험을 가진 이들도 일독을 권한다. 나는 성장기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휘두른 폭력을 두어번 목격했고, 결혼하고 남편의 폭력에도 속수무책 어쩌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단 한번의 경험이지만 폭력앞에 무력했던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매를 들지 않았고, 어떤 경우에도 물리적인 힘으로 제압하지 않았다.
폭력이 폭력을 낳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을 끊어내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도망쳤던 맨홀, 상처받은 남매를 보듬어주었던 맨홀은 악인이 영웅이 되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나'를 건져올릴 수 없는 괴물로 작용한다. 그러나 괴물 같은 '맨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폭력의 공포에 늘 함께였던 누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맨홀의 은유와 상징이 섬뜩하게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한 순간 빨려들어 나올 수 없는 맨홀이 없는지 발 밑을 살피고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