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의 동침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반공교육의 세례를 받고 자란 나는, 한국전쟁이라는 진부하고 식상한 소재의 영화는 즐기지 않는다. 흥행에 성공했다는 <태극기 휘날리며>도 보지 않았고 <포화속으로> 역시 1%의 끌림도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따라 <웰컴투 동막골>처럼 흥행에도 성공하고 좋은 영화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공한 영화를 본뜬 아류작들에 대한 관객의 평가는 냉정하다. 

4월의 마지막 날 알라딘 제공 할인쿠폰이 남았는데 조조로 볼만한 영화가 <적과의 동침>밖에 없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배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매력적인 소재도 아니었지만, 포스터가 대놓고 <웰컴투 동막골>을 떠오르게 해서 어떻게 다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설마하니 농협의 해킹을 북한소행으로 몰아가는 현시국의 분위기에 맞춘 영화는 아니겠지, 하는 기대도 있었고...

 
친정엄마는 6.25가 터진 그 이듬해 혼인을 하고, 오십 리 눈길을 가마도 없이 걸어오셨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가 제법 사는 시쳇말로 방귀를 뀌는 집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전쟁 통에 모든 게 초토화되어 제대로 격식을 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도 시집가고 장가들며 자식을 낳아 키우고 살았으니,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마을 사람들의 삶이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느냐 죽느냐의 절박한 상황인데, 너무 웃기려 드는 대사와 상황들이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웃음코드의 감초인 유해진이나 김상호의 역할도 그간 출연한 다수의 영화에서 보여준 캐릭터와 다르지 않아 식상하다. 비슷한 캐릭터로 이 영화 저 영화 닥치는대로 찍는 거 같아 좀 안타깝다. 변희봉의 역할도 기존에 출연한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고, 그나마 신정근 역할이 눈에 들어왔지만 전체적으로 영화가 산만해서 별점을 많이 줄 수는 없다.    

불과 두 시간 남짓한 영화에 너무 많을 걸 담으려는 욕심은 영화를 산으로 가게 한다. 제목처럼 적과의 동침에 초첨을 맞춰 김정웅(김주혁)과 설희(정려원)의 감정코드와 마을의 생존이라는 두개의 축에 무게를 실었다면 좋았을텐데... 의도적인 대사와 행동으로 빵빵 터지는 웃음코드가 흥행의 열쇠는 아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생존의 불안과 긴장감을 극대화했다면... 하긴 요즘 그런 심각한 영화를 누가 좋아하겠나 싶기는 하다. 산만하고 절박한 생존의 문제가 희화적으로 그려지던 영화도 마지막 10분은 뭘 보여주려 했는지 수긍하게 만든다. 마지막 10분의 처절함과 찡한 울림은 나쁘지 않았다.

전쟁은 누군가의 죽음을 담보로 하고,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라고 전쟁의 잔혹함이 비켜가진 않는다. 구장(변희봉)을 중심으로 한, 재춘(유해진)과 석정리 사람들은 살기 위한 전략으로 인민군을 환영하며 적과의 동침을 선택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절의 귀재로 살아온 백씨(김상호)의 행동도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기에 설득력이 있다. 순진을 가장한 영악한 마을 사람들의 작전에 끌려오는 인민군이 오히려 바보스럽다고나 할까, 인민을 섬긴다는 그들의 선전을 믿기에 모질게 대하지 않는 건가? 

10년 전, 설희와 정웅의 아버지들이 독립자금을 운반하던 동지로 수난을 당한 일을 기억하는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다. "날 믿지 못할 순간이 와도 날 한번만 믿어주시오!" 라는 정웅의 절박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설희는 살기 위해 다시 저항하려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한다. 마을 주민 모두를 죽이라는 상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을 살리려는 정웅의 인간애는 지지받지 못하고 총알과 포탄을 피해가지 못한다.  

"이념과 체제의 대립이 없는 세상에서 다시 만나요." 라고 백석시집에 남긴 정웅의 글귀가 마음에 남는다. 
평택 석정리의 실화가 바탕이 된 영화로, 엔딩 자막이 올라가며 할머니 할아버지의 인터뷰가 나온다. 노근리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은 연못>이나 <웰컴투 동막골>과 비교하면 여러가지로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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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05-01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도는 좋았어도 용두사미로 끝났군요. 웰컴투 동막골 이후 그만큼의 감동과 재미를 주는 영화를 못본 것 같아요. 월드컵 중계를 북한군과 같이 보는 이성재 주연의 영화....제목을 모르겠네요.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만 본거라서 전부를 알 수 없지만 흥행도 별로고 입소문도 안 난 것이 이 작품처럼 그저 아류에 머무른 게 아닐까 싶어요.

순오기 2011-05-02 18:43   좋아요 0 | URL
마지막은 괜찮았어요~
소재는 진부해도 해석에 따라 좋은 영화가 될 수 있는데 말이죠.
이성재 주연 영화는 뭔지 모르겠네요. 공동경비구역도 괜찮았죠.

마녀고양이 2011-05-01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신랑이 '적과의 동침' 볼까 하던데
무스탕님과 순오기 언냐의 리뷰로..... 그냥 drop 시켰습니다. 아하하.
<포화 속으로> 잼없더라구요. 이것도 꼭 그럴거 같아서요. 에휴.

2011-05-01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1-05-02 18:44   좋아요 0 | URL
동막골, 쉬리, 공동경비구역, 의형제~ 이런 영화들은 괜찮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