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혼모가 설 자리는 없는 것일까?
-
-
옷이 나를 입은 어느 날 ㅣ 반올림 9
임태희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6년 11월
평점 :
미혼모의 딸 주홍이가 미혼모가 되어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쥐를 잡자>의 작가 임태희, 소설적 구성이나 주제를 밀도 있게 그려 각인된 그녀는 1978년생의 젊은 작가다. 사람이 옷을 입는 게 아니라, 옷이 사람을 입는다는 톡톡 튀는 발상은 그야말로 짱이다. 이런 참신한 발상은 좋았는데 대체 무얼 말하고 싶었는지 냉큼 다가오진 않았다.
청소년들의 심리와 현상을 잘 포착해 솜씨 있게 풀어내, 중2 우리 막내는 많이 공감된단다. 아이들의 치기어린 대화나 패션 쇼핑 행태, 친구들과 싸운 후 자기 편이 되어 달라고 상대를 흉보고 하소연하는 게 딱 저희들 모습이란다. 푸른책들에 실린 작가 인터뷰에는, 버스를 타면 일부러 교복 입은 아이들 옆에 가서 그네들의 호들갑에 귀를 연다고 했다. 아이들이 가는 가게에도 따라 들어가 보고, 아이들이 나누는 이야기 한마디라도 더 주워들으려고 학교 가서 앉아 있다 오기도 한다고 했다. 아이들 소리에 마음의 귀를 기울였기에 그네들이 공감하는 청소년을 그려냈구나, 이해가 됐다.
어떤 책을 읽어도 나는 항상 엄마 마인드가 작동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나'의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학교와 학원, 독서실을 오가는 생활에도, 부모를 속이려면 얼마든지 눈속임 할 수 있는 이들의 능력을 부모들은 알고 있으려나,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 아이들이야 학원을 다니지 않고 사설 독서실에도 가지 않았으니, 24시간 감시카메라가 돌아가는 감옥소에 보내지 않은 것을 고마워 하라고, 나는 뻔뻔하게 큰소리 치는 엄마다.^^ 독서실 입실 시간도 총무만 구워 삶으면 얼마든지 변칙이 가능하다는 아이들. 집에서는 교복차림이나 엄마 맘에 드는 점잖은 차림으로 나서도, 화장실을 거치면 일순간 변신하는 아이들. 학원비나 문제집 값에서 빼돌리고 꿍친 돈으로 쇼핑을 즐기는 아이들의 실체를 그 부모는 알고 있을까? 이웃들은 다 알아도 그 부모만 눈 멀고 귀 먹었다는 건, 내 주변에서도 발견하는 일상이다.
교복을 입은 채 쓰러져 잠들었던 나는 깨어나면서 "이런, 세상에! 교복이 나를 입고 있잖아." 중얼거린다. 그때 마음 속에 울리는 '기묘한 속삭임'인 '그 녀석이 달라 붙는다. 아마도 작가는 녀석을 등장시켜 나의 솔직한 속내를 보여주려 한 듯하다. 아니면 녀석의 소리는 화자의 진술에 공감을 얻어내기 위한 장치인가 생각되었다. 하여간 녀석의 등장으로 소설은 살짝 복잡하게 꼬이지만 심심하거나 밋밋하지 않게, 동대문상가로 쇼핑 나간 다섯 여학생의 일요일 하루를 펼쳐 놓는다.
나와 '옷 사러 갈 때만 펄펄 나는 애(날개옷), 나의 멋쟁이 패션 요원 K(요원 K), 리더형 인간(리더), 남자 친구 있는 애(애정과다)'까지 다섯 친구다. 옷장엔 '언제나' 입을 만한 옷이 없기 때문에, 비밀과 거짓말과 작전을 동원한 패션 쇼핑이 필요하다. 아이들마다 개성과 취향이 다르지만 혼자 결정하기 곤란할 땐, 친구의 조언이나 결단이 도움 되기도 한다. 쇼핑을 하는 와중에도 들려오는 녀석의 소리와 옷들의 소리에 옷이 사람을 입고, 옷이 사람을 거부하거나 선택한다는 걸 확 깨닫는다. 이런 깨달음을 진지한 주제로 펼쳐갈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리더와 요원 K의 싸움으로 삼천포로 빠진 느낌이고 결말도 아쉽다. 그래도 건질만한 구절이나 맘에 드는 대사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얘기를 표출했구나 짐작해본다.
'교복만큼 확실한 족쇄는 없다'(10쪽)
"난 그냥 무난한 옷을 입어. 외로운 건 질색이거든. 튀는 건 어쨋거나 외로운 거니까. 외로움도 견딜 줄 알아야 한다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난 고독을 즐길 줄 모르고 상처 받는 일이 무척 겁이 나. 굳이 나를 왕따시킬 빌미를 제공하고 싶지도 않아. 그래서 옷 입을 때 신경을 쓰는 거야. 아마 다들 그럴걸?" (83쪽)
"핵심은 자신감이야.자신감도 일종의 옷이거든.그 옷은 사람의 결점을 커버해 줄 뿐 아니라 결점을 장점으로 바꾸어 주기도 하지." (82~3쪽)
"우리니까 너 같은 인간도 입어 주는 거야. 우리가 조금만 까다로웠어도 어림없지." (107쪽)
완전 아줌마 몸매인 나를 거부하지 않고, 나를 입어주는 옷에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