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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6월에 생일선물로 받은 책을 이제야 읽었다. 마을 도서관을 자처하는 우리집 책들은 내가 읽었든 안 읽었든,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우선 순위를 가진다. 그래서 여태 마실 다니다 며칠 전에 내 손에 돌아왔다. 에구~ 조금은 손때가 묻고 살짝 구김이 갔지만 그게 사랑받은 흔적이리라 위로한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으로 그분의 생애가 담겨 있다. 간밤에 읽으며 찡하게 울리는 시가 많아 내 잠을 앗아 갔었다. 한 편의 짧은 시이자 수필이고 소설같은 느낌이었다. 시 한 편에 오롯이 당신의 인생과 어머니 할머니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인들의 삶이 녹아 있다. 한 편 한 편에 버릴 것 없는 당신 삶의 철학이 배어있다. 이렇게 마음을 꼭꼭 다잡으며 살아낸 세월을 정리하고, 아무런 미련이나 후회없이 다 버리고 떠날 수 있어 홀가분하다는 그분의 말씀이 마음에 박힌다.
36쪽의 '일 잘하는 사내'를 읽으며 여인의 삶으로 결코 평탄하거나 행복을 누리지 못했을 그분의 인생이 다음 생에서라도 기쁨을 누리면 좋겠다. '다시 태어나면 /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 깊고 깊은 산골에서 / 농사짓고 살고 싶다" 꼭 저런 생을 다시 살 수 있도록 가만히 빌어본다.
83쪽 '이야기꾼'이란 시를 보면, 고담 마니아였던 친할머니가 돈 아끼지 않고 고담 책을 사들였고
유식한 이웃 아저씨를 불러다 식구들 모조리 방에 불러 낭독회를 였었다고 한다. 어머니도 글 모르는 까막눈이었지만 고담 마니아였을 뿐만 아니라, 책 내용을 줄줄 외는 녹음기였다고 한다. 바로 이런 분위기가 대가 박경리 선생을 키워, 한국문학의 산맥으로 우리에게 우뚝 세워 주셨을거라 생각했다. 박경리 선생도 예외없이 어린시절부터 이야기를 좋아하고 책읽기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96쪽 '히말라야의 노새'는 작가 박범신을 다시 보게 된 일화를 소개한다.
"히말라아에서 /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 어머니! /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 다르게 보게 되었다 /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위 시에서도 느껴지지만 2부에서는 어머니와 외할머니, 친할머니의 비련과 옹골찬 모습을 감지할 수 있다. 결코 여인의 삶으론 행복하지 못했을 그분들의 삶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한 편의 시로 만나게 된다. 그분이 시를 쓰고 글을 썼기에 혼자 견딜수 있었던 것처럼, 당신의 어머니와 외할머니, 혹은 친할머니의 삶에서도 실소와 당찬 기운이 느껴진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과 6.25, 경제발전을 지향하던 시대의 모순 등, 박경리 선생의 인생 체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 말미에 20쪽이나 올려놓은 박경리 선생의 사진은 특별 보너스 같다. 작가 박경리와 농부가 된 박경리 선생을 다시 만날 수 있어 좋았다. 2001년 11월 11월, 경남 하동에 최참판댁을 복원하고 가졌던 '제1회 토지문학제'에서 뵈었던 당당한 그분이 눈에 선하다, 그.립.다!
마을 도서관을 자처하면서 한때는 내가 안 읽은 책은 빌려주지 않았고, 잃어버릴까봐 아까워서 대여하지 않는 책도 있었다. 이것 또한 쓸데없는 집착이었기에 이제는 마음을 많이 비웠다. 꼼꼼히 적어놓고 빌려준다 해도 못 찾는 책이 더러 있다. 아깝고 안타까워 내 마음방에선 발을 동동 굴렀지만, 나도 남의 책 빌어와 안 준 것도 있고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다' 생각하니 마음이 느긋해지더라. 어쩌면 이게 나이 먹은 표시인지도 모르지만, 몸의 평수가 늘어난 만큼 마음의 평수도 늘어난다면 그도 나쁘지 않으리라. 박경리 선생처럼 모두 버리고 홀가분하게 벗어나는 그 맛을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