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첼란.

그는 결국 1970년 나이 50에 센 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가 남긴 시는 전 세계로 번역되어 비껴간 인연의 모르는 사람들이 인연으로 읽고 방을 서성이며 그의 절규를 (기쁘게) 음미한다.

목 넘김이 거친 유골함에서 나온 모래섞인 맥주 같은 그대의 시여! 날은 어둡고 몸은 쇠한데 쉬이 넘어갈 날 언제려는가. 타는 몸, 날아오르는 연기, 사라진 고통 어둠 속 소멸된 몸, 생생하여 울부짖는 시인이여 망각하라, 타인에게 넘기라. 공중으로 흩어진 희뿌연 그대 부모 몸! 남지 않은 몸, 남은 넋이여, 안식 있으라.

 

1962년 전혜린은 파울 세엘란의 시 중 <죽음의 둔주곡>을 번역하여 국내에 최초로 소개했다. 파울 세엘란으로 시작한 그 이름은 파울 체란, 파울 첼란, 파울 셀란, P.첼란이다가 지금은 파울 첼란으로 굳혀졌다.

여러 출판사에서 여러 독문학자들에 의해 15회 이상 파울 첼란의 시는 번역되고 거의 절판되었으나(전영애와 허수경의 번역판은 판매 중_시인 같은 번역가, 번역가 시인), 제목은 모두 <죽음의 둔주곡>이거나 같은 뜻인 <죽음의 푸가>.

 

버릴 책이 없도록 심혈을 쏟는 전영애는 <죽음의 푸가-파울첼란 시선>2011년 민음사에서, 언젠가 들러봐야 할 먼 곳에 묻힌 시인 허수경은 <파울 첼란 전집> 5권을 2020년 문학동네에서 냈다

두 책 다 (내가 싫어하는)띠지가 있고, 민음사는 책갈피 줄이 없고 문학동네는 매달았다. 전영애는 직역, 허수경은 의역으로 번역했다.

일례로 <풍경>이라는 같은 제목으로 번역한 세 줄짜리 시를 보면,

너희 키 큰 포퓰러-이 땅의 사람들!(전영애)

그대 높은 포퓰러들이여-이 땅의 인류여!(허수경)

이 구절로 포퓰러 밑에 스러진 사람들이 느껴지고, 이들의 번역에서 동물의 생명권을 환기시키기 위해 마리대신 으로 부르거나 으로 세는 엠지세대 감각이 느껴지는데, 나무도 '그루' 대신 '명' '분'은 가능하다.


이들의 번역은 순혈 직역과 순혈 의역이라 칭할 수도 있는데, 나 같은 독자 입장으로선 이렇게 한 쪽으로 제대로 쏠린 방법론의 번역이 (두 권을 같이 보기만 한다면, 다 살 수만 있다면) 가장 좋다. 복수의 번역가들은 암묵적으로 짐을 나누고 이 점을 참고해주면 고맙겠다.

라떼야 아무리 조악한 번역이라도 감지덕지 읽었고, 심지어 두세 명의 노고가 느껴지는 번역판도 소중히 간직했다. 직역의역 논쟁이 있지만 직역보단 의역이 아무래도 읽기엔 편하다. 그러면서도, 멋모를 땐 그냥 읽었소만 임의로 갖다 붙인 번역자 당신의 문장 말고, 그래서 원저자는 정확히 뭐라고 썼습니까, 라며 따져들고 싶을 때도 있다골머리를 앓으며 한 단어 한 단어 선택을 위한 고심과 들인 시간과 노오력은 오간데 없어지는 것이다.


어차피 어쩔 수 없는 공통저자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내 생각대로만 번역했다고 점점 대놓고 주장하는 경향이 요즘 늘고 있는데 그런 역자는 (나에게) 신뢰가 깎인다. 독자란 최대한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문장이 매끄럽게 이어지도록 번역해주길 바라는 (불가능한) 주문을 하는 사람들이므로.

 

현 우크레인 영토인 루마니아 에서 태어나고, 가정 내부의 독일어 선택적 언어 상황과 2차대전이라는 복잡한 시대상황, 부모가 나치에 의해 유태인 집단 수용소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자신은 도망쳐, 최종 파리에 정착해 화가와 결혼하고 아들 낳고 살았으나, 이 나라 저 나라 욂겨 댕겼으니’ (게다가 육체노동 없는 정신노동으로만 전량 소진되었음이니) 어느 순간 정신 줄 놓고 쫒기는 망상에 시달린 게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본명인 안첼을 거꾸로 하여 첼란으로 시를 발표한 그는 시 제목은 참으로 명확하여 나의 심장으로 파고들어온다 마는 내용은 눈 감고 만져서 이름 맞추기 게임의 검은 통에 든, 아리송한 모르는 물체와도 같다. 생각 날 듯 날 듯 모르겠는 것.

 

그는 나무의 가지를 치고 열매를 솎고 도끼로 나무를 패고 풀을 뽑고 허수아비를 만들고 새참을 먹고 원두막에서 한숨 자고 하늘의 흘러가는 구름으로 날씨와 대기상태를 점치고 밤에 호박나이트에 잠시 들러 춤을 추고 집으로 와서 자녀에게 책을 읽어주고 교훈적 발언을 하고 다음날 먹을 야채를 다듬어놓고 속히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독자는 잔혹한 사람들. 저렇게 고통으로 점철된 이의 글이 읽고 싶어 대기하는 사람들. 죽은 뒤 전문가의 안내를 따라 독자 개별로 이루어지는 심리부검. 가련한 생이여, 푸성귀를 뜯으며 생명의 신비를 음미할 자신의 텃밭도 맘대로 들어가도 무방할 친한 남의 논도 없구나.


허수경은 독일에서 암으로 죽고 그곳에 묻혔지만 살 집이 없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시를 남긴바 있다. 그게 가슴을 친다. 책값은 너무 싸고, 번역가의 수고비도 너무 낮다. 책값을 2.5배 올리고, 책을 더 소중히 간직하고 출판사도 사려 깊게 출판하고, 정부는 절판된 책들이 빛을 보도록 지원이 있길 바란다. 이 시집들 강추하는 이유는 읽을 수록 느낌 오므로.

죽은 파울 첼란, 헤린, 수경. 이제 우리 마음 속 집에서 살길.

(feat.김창완_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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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진의 <자전거 도둑>이 다음 차례인데 쓸 수 없었다. 안중근 책도 쓰려고 했으나 빌렘 신부와의 면회 광경만 떠오르면 감정이 북받쳤다. 어제 늦은 밤에 인터넷에서 우연히 글을 하나 읽었는데 재밌어서 웃게 되고 드디어 물꼬가 트이는 기분이 들면서 고비를 넘게 됐다. 내용이 이렇다.


어느 문학동호회에서 전혜린 무덤에 갔는데, 일단 좀 헤매다가 도착을 했다(검색이라도 했으면 방문 실수요자를 위해 복잡하게 써 둔 내 글이 툭 뜨거나, 묘지 길안내 사진이 있는 다른 사람 글이라도 떴을 텐데).

글쓴이는 간판이 슈바빙이라는 이유 하나로 전혜린을 떠올리곤 그 레스토랑을 자주 찾아가 앉아 있곤 했고, 절판 전까지 지인들에게 전혜린의 수필집을 선물했을 정도로 찐팬인데, 세월이 흘러 처음 마주한 묘비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한다. 그리곤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을 터인데 왜 고쳐지지 않았는지 안타까워한다. 묘비 앞면 뒷면 모두다 로 잘못 표기되어 있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냐고(성새임! 항시 건강하세이. 덕분에 흐린 마음이 밝게 다림질 되었습니이다. 살았으면 구십이 넘었을, 언제나 젊은 청년 우리의 헤린은 자신의 이름을 원래 그렇게 쓰곤 했답니이다).

 

즐겁게 놀랐다.” 

1959년 새해 아침 뮌헨의 전혜린은 스위스에서 온 헤르만헤세의 편지를 받고 이렇게 썼다. 이것에 맞설 표현은 맛있게 맵죠?” 밖에 없다. 세살 때 천자문을 어예 띠겠노마는 그것을 해냈고(비룡소 마법천자문 카드로 6세에는 가능하다), 오로지 자신만이 쓸 수 있는 문장력도 겸비했다. 너무 쓸 게 많으면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 게다가 삶의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면 게임오버다. 직접 쓴 문학작품이 없음에도 있는 듯 착각에 빠트리는 독특한 이 번역가는 수필가로도 불리는데 일기가로도 불릴 수 있으려나.

지금현재 죽은 헤세에게 석장의 그림엽서와 축하인사를 받을 사람이 누가 있는가. 지금현재 크리스마스 답장으로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 우편으로 보낼 문인이 전 세계 어디에 있는지 그 미담을 나는 알지 못한다.

 

<늙은 말을 모는 늙은 마부와 늙은 마부를 아버지로 둔 상대적으로 젊은 딸> <젊었을 적과는 다른 말과 마부의 상태> <살 돈이 없음을 하라> <말하지 못하는 말> <한 방살이의 고뇌> <감자먹는 부녀> <뜨거운 감자와 생감자 사이> <족쇄의 가족> <소멸된 명랑함> <자동차 탄생의 계기> <나는 좀 쉬고 싶은 말이지 말입니다> <아비는 거머리놈이었다> <돌아온 집> <5촉 등을 켜다오> 라고 제목을 해도 어울릴 <토리노의 말>에서, 아침에 깬 딸은 왜 아버지 침상 밑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겉옷을 집어 올리는가.

딸은 왜 자립을 꿈꾸지 않는가, 딸과 할바시는 왜 함께 종말을 맞아야 하는가. 생각의 폭을 넓힐 것을 주문한 혜린이 이것에 대해 쓴다면 일기장에 어떻게 남겼을까. 우리는 어느 대목에서 매혹될까.

 

알리고 싶은 것을 부드럽게 소개하되 마음이 여려 성찰적이 되고 마는 고종석은 <문학이라는 놀이>를 통해 전혜린 사후 발표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비판 한다. 1996년 발행된 김화영의 <바람을 담는 집>을 재인용하여, 그가 고백했듯 상당부분 글을 김화영이 아예 뜯어고쳤음을 상기시키고, 그러고도 그 책은 악문의 전시장이라고 한다. 정신들 차리라는 충고처럼 들리는데 맞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다음 사람을 찾기 전까지.

 

따사로워서 마음을 온순해지게 만드는 문장가 정찬은 언젠가 한겨레 칼럼에서 이덕희가 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살았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자기 고유의 죽음을 가져야 한다. 죽음에 있어 모방은 하수다(내가 존경하는 스콧니어링 모방은 제외되어야 하나 그것도 알 수 없다. 백세는 이제 별 나이 아니므로). 죽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그럼에도 계속 산 것은, 아마도 자신의 죽음이 세간에 떠들썩하게 주목받는 것을 원치 않아 숱한 인내심으로 고유의 죽음이 올 때까지 끝까지 기다렸으리라.

 

혜가 헤라서 걱정인 문학동호회 성새임들은 전혜린 책들을 놓고 현수막을 펼쳐 사진을 찍고 막걸리를 바치고 풀이 자라있다고 걱정했다. 나는 이제 그곳이 조금 빠삭하여 어떤 동물들이 있는지를 알고 어느 계절이 방문하기 좋은지도 알고 풀은 장마가 와도 흙을 잡아주므로 오히려 걱정할 일이 아니고 막걸리는 동물을 부르니 맹물이 좋고 사진에 찍힌 무덤 옆 언덕의 꽃은 내가 심었는데 흙이 퍽 건조하여 며칠간 꼬박 물 주러 다녔고 그 물이 어디서 났냐면 그 밑의 도랑물을 떠다 날랐는데 여름엔 양이 많고 맑아 나도 많이 마시고 다음날 개운하게 일어났고 성새임들이 올라간 그 길은 풀이 극심히 무성하여 내가 낫으로 베었는데 여름풀은 금세 또 자라니 별 표가 안 났을 수 있는데 그 무덤과 그 비석으로 인해 이토록 반갑습니다.

(feat.홍민_잃어버린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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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옛날부터 우리 고국을 이 무한한 만주 벌판과 분리시키고 있는 국경의 강은 막을 길 없이

흐르고 흘렀다.  (중략)  소리없이 압록강은 흘렀다. (186쪽)




언젠가 우체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알지 못하는 집 앞에 섰다.

그 집 정원에는 한 포기 꽈리가 서 있었고 그 열매는 햇빛에 빛났다. 우리 집 뒷마당에서 그처럼 많이 봤고, 또 어릴 때 즐겨 갖고 놀았던 이 열매를 내가 얼마나 좋아하였던지. (217~218쪽)

수암- 이것은 나와 함께 자라난 내 사촌 형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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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헤린

1934년 1월 1일 나서 

1965년 1월 10일 가다


하늘이주신시간에

시간을보태고

사랑에또사랑을보탠

다음눈감아여기잠든이

전헤린여사여

김남조 선생이 짓고

박중근 쓰다


천구백육십육년

구월이십구일

중추절에 은사의 영전에 바침

성균관대학교 독문과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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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산31번지 용인천주교공원묘지(묘지번호; NF54)


신분당선 강남역에서 - 정자역까지 가서 택시로 묘지까지 이동하면 가깝고도 편하고,


버스로 갈 때는 강남역(10번출구에서 백미터 쪽)에서 1151번을 타고 

(오산리, 천주교묘지입구역) 정거장에서 하차(입구일 뿐 다른 장소임, 1시간 정도 간격으로 노란색 셔틀버스; 57번, 외에는 간다고 표기되어 있어도 오기임)가 천주교묘지로 가는 게 있으나 택시를 부르면, 1만원 추가로 준다고 해야 오고 아니면 너무 가까운 거리라고 안 옴. 차라리 강남역에서 신분당선 타고 정자역에서 택시 타는 게 나음. 그러나 성남은 성남에서만 운행하는 규칙에 위배된다고 정자역 택시들도 승차거부(?) 하기 시작했으므로 강남역에서 버스 1151이 낫고, 깜찍한 폭스바겐을 이참에 하나 뽑길 권함. (되돌아올때도 묘에서 걸어나와서 묘지입구역 정거장에서 1151이 편함. 몰랐던 처음에는 이렇게 갔는데...


도보 2킬로미터(30분 정도 대형 트럭이 오가는 위험한 찻길을, 대형중형소형미세초미세초초미세초초초초 다 쓸수는 없소, 무한대 먼지를 마시며 걸어가면) - 천주교용인공원묘지가 나타남 - 관리사무소에서 성직자 묘역 방향으로  -  이제부터는 길을 올라가면서 갈라지는 길이 세 번 나오게 되는데, 오가는 차를 조심하며 올라간다. 갈라지는 길을 세며 올라가면, 그 세 번째에 이르러 방향 전환 하여 오른쪽 비탈진 언덕으로 올라가면 꼭대기 쯤에 묘지가 있다


-  번호만 매길 뿐 처음엔 큰 길을 따라 그냥 올라간다. 일단 첫 번째 양 갈래길을 만나면 맘속으로 1번이라고 번호만 매긴다 - 그렇게 조금만 걸어 올라 가면 두 번째 양 갈래길이 나오는데, 2번이라고 번호를 매기고, 세 번째 갈래가 나올 때까지 큰 길로만 그대로 올라간다


- 조금 가다보면 양 갈래 갈라지는 세 번째가 나오는데, 이때는 방향을 바꿔 오른편 골짜기 길로 올라간다. 오를 길 입구에 플라스틱 고무통과 차량진입금지(길없음) 표지판이 있다. 조금 위쪽에 짧은 철제 다리가 놓인 게 보인다. 올라가다 보면 첨탑도 보이는데 에펠탑이거니 생각하고 그 언덕배기를 오른다. 오르는 길은 가파른데, 가파른지라 가파르니 가파르고 가팔라서 참으로 가파르다.


 - 조심조심 헥헥대며 졸졸 흐르는 물 소리를 들으며 직진으로 올라가면, 시멘트가 끝나는 데가 나온다 여기서 멈춘다  ㅡ  좌측에 작은 성모상 있는, 비석번호 MF123, 

우측에 우뚝 선 중형 전나무가 있다. '깊은 도랑'이 양쪽에 있는 갈라진 길이 보인다. 그 땅의 형세를 보면 '뾰족한 삼각형'이 느껴질 것이다. 오른쪽 길을 택해 오른다(왼쪽에 도랑, 오른쪽은 시멘트 벽면, 그 사이의 좁다란 길 아닌 것 같은 길, 그러나 길이다. 만나러 가는 길).


무주끈 올라가며(왼쪽편만 보며) 전헤린 한글을 기대하고 찾으면 큼직한 게 보인다. '뾰족한 삼각형 땅'에서 제일 끝단(9번째 단)에 있으니 걱정말고 직진한다(깊은 도랑 옆 계단식 무덤들의 층을 세며... 1층 2층... 혹은 1단 2단... 원하는 대로 택해서 세며...9층 혹은 9단까지). 


실패하면 내려가서 다시 사무소에서 우측으로 난 길로 올라오기 시작해서 2회 정도 실패하고 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비석에 한글로 혜가 아닌 헤, 전헤린이라 적혀 있다.

2. 반드시 용인천주교공원묘지로 가야 한다(택시 탈 때 - 김수환 추기경 묘 있는 곳에 가자고 하면 됨). 

3. 용인공원묘지, 천주교묘지 등 용인에는 묘지공원이 많다는데, '용인천주교공원묘지'는 엄연히 다른 장소.


4. 용인천주교공원묘지 입구에 '라라' 라는 푸드까페(차, 돈까스, 백반)가 있다. 이 곳을 발견하고 들어가기 전에 빌자. 심장을 움켜쥐고 쓰러진 하늘의 지바고여, 영원한 안식을.

5. 자그마한 전헤린 묘 앞에, 선명하고 에쁜 보라색 쑥부쟁이 몇 포기가 있다. 갖고 간 물로 비석을 씻어내고 꽃에 물을 주니 부족해서 다음엔 2통을 들고 가야겠다 싶다. 무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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