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촛불과 호롱불을 들고 방이며 곳간이며, 뜰에 있는 웅덩이를 샅샅이 뒤졌다. 이윽고 우리가 그렇게 찾아다녔던 거북을 구월이가 가마솥에서 찾아냈다. (...) 수암은 1미터 높이의 언덕이 될 때까지 오후 내내 삽질을 했다. 나는 거북을 무덤으로 옮기기 위해 굵은 나뭇가지 두 개와 새끼줄로 들것을 만들었다. 거북은 움직이지 않고 하루 종일 거기에 누워 있었다. 우리는 죽은 영혼의 안식을 위해 산신령과 놀이 친구에게 술을 대신하여 물을 한 잔 바쳤다. 그리고 해가 떨어지자 죽은 거북을 땅에 묻었다.(67~68쪽)




나는 의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여태껏 방석에만 앉았기 때문이었다.(92쪽)




다음 날 아침, 나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입구에 서 있었다.  (...)  그들은 모두 ‘의학’이라는 글자가 박힌 황금색 배지를 단 감청색 교복을 입고 있었다. 신입생들은 아직 각자 자기 나라의 복색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한국 학생들은 흰색 옷을, 일본 학생들은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학교 사무실로 가서 학생증과 시간표, 그리고 교복과 모자에 달 배지를 받았다.(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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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매산리(매자리길) 58-1 (재단)한남공원묘원(묘지번호: 4지구 4-178)

 

좌석버스 1005 :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100m 직진 올리브영 조금 더 지나서 있는 건널목을 건너되, 다 건너지 말고 왼편을 보면 도로와 도로 중간에 있는 버스정류장(맞은편에 흥국빌딩 간판이 건물 맨 위에 보임) - 1005번 타고 가다가 대성아파트 안내방송 나오면 짐 챙기고 매산 2통에서 하차(여기가 매산 삼거리임) - 10m 앞에 택시 승강장 있음(묘지까지 5분 거리)

 

좌석버스 1117 : 강변역(동서울터미널)이나 잠실역에서 출발 매산 2통(=매산 삼거리)

에서 하차 후 택시

 

지하철 강남역 : 신분당선 타고 판교역 가서 경강선 경기 광주역 하차 후 택시(1만원 거리)

 

비석에 새겨진 묘지번호 없음. 사무실 바로 뒤로 조금만 올라가면 됨(급경사 주의, 운동화 필수, 운동신경 확보). 사무실 직원이 묘지까지 방문객을 친절히 모셔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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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6월 엘세 부인과 나는 고속도로로 라인강을 거쳐서 슈발츠발트와 뮌헨을 향해 약 2주일간 여행을 떠났다. 그때 뮌헨에 들러서 이의경을 만났는데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68쪽)

엘세 부인_김재원을 후원한 벨기에 독지가 여성 노인(옮긴이 주)


여당 김재원(1909~1990)은 대한민국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1945~ 1970)이다. 

친을 세 살 때 여의고, 모친은 여덟 살 때 

재가했다장티푸스에 걸려 숙부의 간호를 받고 나았지만 전염된 숙부 둘은 연쇄적으로 죽는다. 그 해를 가장 불행한 해로 꼽는다(함흥고보 5학년, 1925 - 병간호 해주던 숙부는 김재원이 거의 다 낫자, 향기를 맡으라고 논두렁의 창포를 뜯어 방에 놓아주었다). 


대한민국 최초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를 한 친척 김재훈이

독일 부인을 데리고 유학에서 돌아오자, 자신도 독일로 갈 꿈을 품게 된다. 유학 자금으로 쓰려고 유산인 함경남도 함주 고향 토지를 담보로 3 5백 원의 거금을 만들어두었으나, 3천 원을 지인에게 맡겼다가 떼여 후일 독일 생활에 매우 궁핍함을 겪는다.

독일로 간 때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갔다. 몸은 고되나 미래에 대한 희망에 차서 함께 탄 승객들과 즐거웠고, 2주일 정도 걸려 독일 베를린에 도착(1929. 6)하였다. 큰 도시 보다는 좀 더 작은 도시를 원해 나흘 후 뮌헨으로 옮긴다이의경의 독일어 과외를 받고 그와 상의하여 뮌헨대 교육학과로 전공을 정해 박사까지 마친 다음(1934), 벨기에로 건너가 동양미술연구(켄트국립대 칼 헨첸 교수 조수)를 6년간 한다. 벨기에는 중립국이지만 1939년 나치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한 제2차세계대전으로 불안감을 느끼고 고국으로 돌아왔다(1940). 

시간 강사로 지내다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어, 한국전쟁시 기지를 발휘하여 문화재를 잘 지켜내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1945). 


뮌헨에서 이의경과 함께 산 적도 있고, 이의경 관련 자료에 김재원이 증언자로 자주 등장하기에

<박물관과 한평생>을 읽고 독일유학 전후를 요약해보았다. 책에 한자 표기가 많은데 한글로만 쓰고, 그 옆에 괄호를 쳐 한자를 넣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글자가 잘아서 돋보기를 갖다 비추며 읽었는데, 저자의 글 솜씨가 유려하여 꽤 재밌게 읽었다. 역시나 어릴 때부터 문학을 하고 싶은 소년이었음이 확인되고, 톨스토이를 비롯 다독하였다는데, 솔직하고 꼼꼼한 회고를 대하니 무모함으로 시작하였다고는 하나, 독일까지 무작정 떠난 젊은 청년의 여정에서 이후 얼마나 치열하게 책과 씨름하였을지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싸인을 못 받고 질문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죽은 자의 빼어난 문장과 만날 때 애석한 점이지만, 차라리 산 자 보다 열광하게 되는 건 사실이다. 


다시 태어나도 박물관장이 되고 싶다는 저자 김재원의 직업으로서의 '박물관' 선택과, 안봉근의 드레스덴 '박물관' 한국전문가 근무 이력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이의경이 상해를 떠나 독일로 갈 때 데리고 간 사람은, 같은 해주 출신 안봉근이었다. 이의경이 뮌스터슈바르차하 수도원에 머물수 있었던 것은 주선자로 빌헬름(=빌렘) 신부가 그들과 중간에 합류하여 수도원에 함께 갔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동생들인 정근, 공근을 면회하여 유언을 남길 때(1910. 3.) 그 자리에 빌렘(=빌헬름)신부도 있었고, 그는 안 의사 사형직전 성사(고해, 병자)도 주었다. 이 일은 친일 성향 뮈텔 주교의 '뤼순여행불허' 자체를 어긴 것이어서, 후에 계속 불화를 겪다가 한국을 떠나 고향으로 가게 된다. 안봉근은 그런 빌렘을 따라 1914년 독일 치하 알자스에 가서 2년간 머문 적이 있고, 그 이전 해주에서는 10년간 빌렘의 복사(미사 때 신부를 돕는 평신도)를 했다고 한다. 


강혜란 기자의 기사(중앙일보 2024. 3. 28_독일 윤재원, 김영자 교수, 송란희 한국교회사연구소 학술이사의 연구)에 의하면, 안봉근은 독일 작센주 드레스덴 박물관 한국전문가로 근무, 베를린 두부공장 운영, 영화단역배우 활동, 단편소설 '중국인 미인'(1931) 발표, 1945년 해방이 되자 귀국을 원했지만 이탈리아에서 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안봉근 연구가 속히 책으로 나올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나온다. 드레스덴 박물관에 있다는, 안봉근의 짚신 삼는 사진, 곰방대

물고 있는 사진, 그가 관여한 '한국농기구제작' 관련한 자료를 보면 그런 그의 박물관 활동이, 후발주자로 독일에 온 김재원에게도 영향을 끼쳤지 않을까. 


김재원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만난, 인상 깊은 고고학자를(그의 말을) 잊지않고 이렇게 

회고한다(34쪽). 

시베리아에는 정신병이 한가지 있다고 하였다.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가던 中谷治字二郞라는 젊은 고고학자가 정신병에 관한 이야기를 하여 주었다. 그것은 성년이 되면, 몽유병자와도 같이 먼 수평선 저쪽에 무엇이 있나 하는 기대로 길을 떠나 결국은 일생동안 다시 제고향으로 오지 않는 수도 있는 병이라는 것이었다. 생각하면 나도 그와 비슷한 병에 걸려 미지의 천지를 찾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그후 다시는 흥상에 돌아가 살 수 없게 된 것이니까.

기차에서 이런 문학적인 대화를 한 것이다. 손에 쥔 폰이나 의자에 설치된 기기를 터치하는 대신. 여기서 나카타니(中谷) 씨가 고고학자이고, 감수성 예민한 김재원이 스물이었다는 것은 중요한데, 또 어떤 다른 말을 해 주었는지는 궁금하지만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인습과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고, 멀고 먼 나라로 가는 중이며, 미지의 것에 경도되는 시점에 들었을 어떤 이야기들이.   

 

(( 아래는 1985. 10. 6. KBS에 방영된 김재원과 김원용(고고미술사학자, 화가) 대담에서 몇 마디 

추렸다(289~290쪽). 우리 자산인 종교와 무속 관련하여 전혀 돈이 안 되던 시절인 40여 년 전이라는 걸 감안하고 이 대담을 보면, 현재의 우리 사회가 잃은 것은 순박함이다.)) 

_김재원: 요새 그 샤머니즘이 아주 중하게 들어와 있는데, 무당들의 춤, 이거야말로 한국의 전통

적인 예술이다...  ...역시 우리나라엔 세련된 춤 같은 게 있는데, 방계라 할는지 그런 이류(異流)의 것을 가지고 한국의 춤이라 하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느냐...

_김원용 : 한국 민족으로서 가장 특색이 남아 있다함은, 그 근본은 역시 샤머니즘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불교도 믿고, 예수교도 믿고 하지만, 저 자신도 자꾸 재수 나쁜 일이 생기면, 이거 굿이나 한 번 하고 싶은 생각이 나거든요.  ...지금 민속학 계통 사람은 너무 의미 부여를 하지만, 사실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굿에 대해서 갖는 그런 정의라 할까 그런 것은, 아마 한국 민족의 바탕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건 그런대로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나의 어릴 때 이름은 사랑에서 낳았다고 해서 ‘사랑돌‘ 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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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역에서 - 지하철 타고 현충원역에서 2번 출구로 나와서 - 현충원 보훈모시미 정류장에서 - 30분 기다려서 셔틀버스(라 쓰고 봉고차라 읽는다)를 타고 - 독립 유공자 제7 묘역에 내려서 - 입구 쪽에 보면 쉽게 찾을 수(제270호) 있다.


참고사항 - 1. 현충원 내에 있는 매점에서 조화를 팔지만 나중에 쓰레기 처리가 힘드니 되도록 지양하고, 꼭 원한다면 생화 한 송이 정도만 포장없이 하는 게 좋을 듯.

 

2. 현충원 내에 1시 30분 까지 무료로 국수 제공 하는 데가 있어서 필요시 셔틀 기사님에게 위치를 물어보면 알려준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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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로 우리에게 알려진 이미륵(1899~1950)은 이의경의 아명이다. 1919년 4월 17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국내에도 그에 

연계하여 독립운동자금모금 등을 위해 항일운동 조직인 '애국부인회'와 '대한청년외교단' 등이 조직된다. 경성제대 의대생 이의경은 만세 시위 유인물(1919. 8. 29 만세시위)을 직접 인쇄하여 나눠준다(대한청년외교단 편집국장, '국치경고문' 300부). 


그 해 11월 간부 8명이 일제에 긴급체포 당하자, 급히 고향인 황해도 해주로 피신한 이의경은 모친의 금전적 도움으로 압록강을 건너고, 중국 상하이로 간다.

임시정부 '대한적십자대' 대원으로 활동하며 간호사를 교육했다(1919. 11. 29 부터). 

이듬해 4월, 상하이를 출발하여 여러나라를 거치는 '르 뽈 르까'라는 유럽행 프랑스 

여객선을 탄다. 유인물 인쇄배포 관련하여 대구지방법원 궐석재판으로 출판법 위반 

2년형을 언도 받는데, 이것은 독일에 도착하고 한 달 뒤의 일이다(1920. 6. 29). 

일제가 기록한 해외 체류자 명단이 남아있는데, "재구(歐, 구라파) 요주의 한인" 중 '독일'(1925. 7) 부문에 이의경이 들어있다.  


상하이를 떠날 때 배를 함께 탔던 한인들은 대부분 프랑스 마르세유 항에서 내렸지만, 

빌헬름(=빌렘)신부와 합류하여 이미륵과 안중근 의사의 사촌 안봉근(1887~1945?)은 독일까지 가게 된다. 독일에 정착하여 '세계피압박민족회의'가 

벨기에 브뤼셀(1927)에서 열렸을 때 이의경은 일제침략 고발을 위한 4명의 

조선대표(이의경, 이극로, 황우일, 김법린)로 참석하기도 했다.


뮌헨대에서 동물학 박사가 되었으나 취업이 어려워 글을 썼는데 'MIROK LI'로 쓴 

독일어 작품 <압록강은 흐른다>를 발표하고는 독일유명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아직 

모든 작품을 알지 못하기에 ( 내가 천착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대한민국 사투리인 만큼) 일단은 위트있는 꽁트 <이상한 사투리>가 제일 맘에 든다. 

이미륵은 1920년 5월 26일 부터 뮌스터슈바르차하 수도원에 머물렀다. 이 작품은 수도원에 뒤이어 오게 된 프랑스 군 탈출병 모로코 출신 흑인과의 언어소통에 관한 

에피소드. 이 내용이 실화에 기반을 둔 것인가는 모르겠다. 다만 읽으면 왜 이미륵 책을

칭송해샀는지 느낌이 온다. 


위암으로 51세인 1950년 3월 20일, 독일친구들이 불러주는 애국가를 

들으며('우리나라만세' 부분은 함께 부르고) 그렇게 죽었다. 드디어 바이에른 주 뮌헨 

근교 그레펠핑의 묘지에서 고국으로 왔다. 1920년 독일에 첫 발을 디딘지 104년이 지난 2024년, 많은 이들의 기억과 정성과 노력으로 한 줌 가루로나마 귀국하게 되었고,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입국장 14번 게이트에서 <이의경 지사 유해 봉환식>이 열렸다(2024. 11. 16. 토. 오후1시). 


그간 까맣게 잊고 있었다가 다시 옛 기억을 떠올린 건 경향신문 곽희양 기자(2024. 11. 12)의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전혜린이 번역한 <압록강은 흐른다>, 정규화의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를 집을 뒤져 

찾아냈다. 그러고나서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인터넷 

사이트의 글을 사흘간에 걸쳐 읽었다. 그런 다음 표현이 어려운 어떤 심정으로, 이끌리듯

인천공항까지 가서 봉환식을 본 것이다. 다음 날 열린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7묘역 유해 안장식 또한 참석하였다(2024. 11. 17). 

아리랑을 불러드리고 싶은 마음인지라 아리랑 성냥과 태극기를 상에 얹고, 

우리 제사상 같은 남의 제사상에 절을 했다. 


정규화의 제자 박균 선생이 번역한 <압록강은 흐른다>를 사들고 가 사인을 받았다. 

이영래 유족대표는 정규화의 <어느 이방인의 향기>(이미륵 박사 찾아 40년) 

정규화, 박균 공저 <이미륵 평전>(Dr. MIROK LI)에 사인 해주었다.  

이의경 지사 안장식 후, 정규화 선생 묘소와 전혜린 선생 묘소에도 차례로 방문하여

절하고, 사진 찍고, 묘지 정돈을 했다. 이 세 분은 하늘에서 다같이 만났는지는 

모르지만,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니 부디 만났기를 바라본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위해 운명의 소용돌이에 아낌없이 몸을 던진

'수많은 그들'에게도 영원한 안식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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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30 2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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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1 14: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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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1 19: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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