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6월 엘세 부인과 나는 고속도로로 라인강을 거쳐서 슈발츠발트와 뮌헨을 향해 약 2주일간 여행을 떠났다. 그때 뮌헨에 들러서 이의경을 만났는데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68쪽).
여당 김재원(1909~1990)은 대한민국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1945~ 1970)이다.
부친을 세 살 때 여의고, 모친은 여덟 살 때
재가했다. 장티푸스에 걸려 숙부의 간호를 받고 나았지만 전염된 숙부 둘은 연쇄적으로 죽는다. 그 해를 가장 불행한 해로 꼽는다(함흥고보 5학년, 1925 - 병간호 해주던 숙부는 김재원이 거의 다 낫자, 향기를 맡으라고 논두렁의 창포를 뜯어 방에 놓아주었다).
대한민국 최초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를 한 친척 김재훈이
독일 부인을 데리고 유학에서 돌아오자 자신도 독일로 갈 꿈을 품게 된다. 유학 자금으로 쓰려고 유산인 함경남도 함주 고향 토지를 담보로 3천 5백 원의 거금을 만들어두었으나 3천 원을 지인에게 맡겼다가 떼여 후일 독일 생활에 매우 궁핍함을 겪는다.
독일로 간 때는 스무 살이었는데,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갔다. 몸은 고되나 미래에 대한 희망에 차서 함께 탄 승객들과 즐거웠고, 2주일 정도 걸려 독일 베를린에 도착(1929. 6)하였다. 큰 도시 보다는 좀 더 작은 도시를 원해 나흘 후 뮌헨으로 옮긴다. 이의경의 독일어 과외를 받고 그와 상의하여 뮌헨대 교육학과로 전공을 정해 박사까지 마친 다음(1934), 벨기에로 건너가 동양미술연구(켄트국립대 칼 헨첸 교수 조수)를 6년간 한다. 벨기에는 중립국이지만 1939년 나치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한 제2차세계대전으로 불안감을 느끼고 고국으로 돌아왔다(1940). 시간 강사로 지내다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어 맹렬히 활약한다(1945).
뮌헨에서 이의경과 함께 산 적도 있고, 이의경 관련 자료에 김재원이 증언자로 자주 등장하기에
<박물관과 한평생>을 읽고 독일유학 전후를 요약해보았다. 깨알같은 글자에 한자혼용이라 첫 대면에 마이너스 27점을 일단 주고 시작했다. 돋보기를 갖다 비추며 읽으니 의외로 글 솜씨가 유려하여 꽤 재밌게 읽었다. 역시나 어릴 때부터 문학을 하고 싶은 소년이었음이 확인되고, 톨스토이를 비롯 다독하였다는데, 솔직하고 꼼꼼한 회고를 대하니 무모함으로 시작하였다고는 하나, 독일까지 무작정 떠난 젊은 청년의 여정에서 이후 얼마나 치열하게 책과 씨름하였을지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싸인을 못 받고 질문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죽은 자의 빼어난 문장과 만날 때 애석한 점이지만, 차라리 산 자 보다 열광하게 되는 건 사실이다.
다시 태어나도 박물관장이 되고 싶다는 저자 김재원의 직업으로서의 '박물관' 선택과, 안봉근의 드레스덴 '박물관' 한국전문가 근무 이력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이의경이 상해를 떠나 독일로 갈 때 데리고 간 사람은 같은 해주 출신 안봉근이었다. 이의경이 뮌스터슈바르차하 수도원에 머물수 있었던 것은 주선자로 빌헬름(빌렘) 신부가 그들과 중간에 합류하여 수도원에 함께 갔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동생들인 정근, 공근을 면회하여 유언을 남길 때(1910. 3.) 그 자리에 빌렘(=빌헬름)신부도 있었고, 그는 안 의사 사형직전 성사도 주었다. 이 일은 친일 성향 뮈텔 주교의 뤼순여행불허 자체를 어긴 것이어서 후에 계속 불화를 겪다가 한국을 떠나 고향으로 가게 된다. 안봉근은 그런 빌렘을 따라 1914년 독일 치하 알자스에 2년간 머문 적이 있고, 그 이전
해주에서는 10년간 빌렘의 복사(미사 때 돕는 평신도)를 했다고 한다.
강혜란 기자의 기사(중앙일보 2024. 3. 28_독일 윤재원, 김영자 교수, 송란희 한국교회사연구소 학술이사의 연구)에 의하면, 안봉근은 독일 작센주 드레스덴 박물관 한국전문가로 근무, 베를린 두부공장 운영, 영화단역배우 활동, 단편소설 '중국인 미인'(1931) 발표, 1945년 해방이 되자 귀국을 원했지만 이탈리아에서 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안봉근 연구가 속히 책으로 나올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나온다. 드레스덴 박물관에 있다는, 안봉근의 짚신 삼는 시연 사진, 곰방대
물고 담배 피는 방법 재연 사진, 안봉근이 관여한 한국농기구 관련한 자료를 보니 그의 박물관 활동에 김재원이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김재원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만난, 인상 깊은 고고학자를(그의 말을) 잊지않고 이렇게
회고한다(34쪽).
시베리아에는 정신병이 한가지 있다고 하였다.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가던 中谷治字二郞라는 젊은 고고학자가 정신병에 관한 이야기를 하여 주었다. 그것은 성년이 되면, 몽유병자와도 같이 먼 수평선 저쪽에 무엇이 있나 하는 기대로 길을 떠나 결국은 일생동안 다시 제고향으로 오지 않는 수도 있는 병이라는 것이었다. 생각하면 나도 그와 비슷한 병에 걸려 미지의 천지를 찾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그후 다시는 흥상에 돌아가 살 수 없게 된 것이니까.
여기서 나카타니(中谷) 씨가 고고학자이고 감수성 예민한 김재원이 스물이었다는 것은 중요한데, 또 어떤 다른 말을 해 주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 아래는 1985. 10. 6. KBS에 방영된 김재원과 김원용(고고미술사학자, 화가) 대담에서 몇 마디
추렸다. 요사이 화제인 무속신앙에 대해 나오길래 한 번 옮겨 적어 본다(p 289~290). 아무래도
40여 년이 흐른 것을 감안하여야...))
_김재원: 요새 그 샤머니즘이 아주 중하게 들어와 있는데, 무당들의 춤, 이거야말로 한국의 전통
적인 예술이다... ...역시 우리나라엔 세련된 춤 같은 게 있는데, 방계라 할는지 그런 이류(異流)의 것을 가지고 한국의 춤이라 하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느냐...
_김원용 : 한국 민족으로서 가장 특색이 남아 있다함은, 그 근본은 역시 샤머니즘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불교도 믿고, 예수교도 믿고 하지만, 저 자신도 자꾸 재수 나쁜 일이 생기면, 이거 굿이나 한 번 하고 싶은 생각이 나거든요. ...지금 민속학 계통 사람은 너무 의미 부여를 하지만, 사실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굿에 대해서 갖는 그런 정의라 할까 그런 것은, 아마 한국 민족의 바탕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건 그런대로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나의 어릴 때 이름은 사랑에서 낳았다고 해서 ‘사랑돌‘ 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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