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되어 줄게 문학동네 청소년 72
조남주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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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작가님의 책이어서 골랐다.

청소년 문학인 줄 알면서도, 요즘 너무 많이 다뤄지는 소설 구조의 타임슬립 이야긴 줄 알면서도 말이다.

나는 아들만 둘 있는 엄마인데, 우리 애들은 아직 사춘기에 'ㅅ' 자에도 이르지 않은 듯하다. 이 책의 내용과 내 상황이 너무 달라 공감을 기대하긴 어려웠단 말이다. 사춘기를 겪은 딸과 갱년기를 겪는 엄마의 이야기를 최근에 읽었고, 딸과 엄마의 관계를 딸을 바라보는 부모의 입장에서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그저 '조남주'작가님의 책이어서 골랐다.


이 책은 2023년 딸(윤슬)의 삶을 살아보는 1980년생 엄마(최수일)와 1993년을 살았던 엄마(최수일)의 삶을 살아보는 2010년 생 딸(윤슬)의 삶을 그려냈다. 윤슬은 (엄마에게) 언니(이자 윤슬에게 이모) 에겐 맛있는 반찬의 도시락을 싸주고 나(수일)한텐 맛없는 나물 반찬을 싸주는 걸 알아채고 집을 나간 수일의 그 시절로 돌아간다. 그리고 엄마 '수일'은 술 마신 아빠를 데리러 갔다가 사고를 당해 깨어나지 못하는 엄마를 둔 '윤슬'의 몸으로 들어갔다. 교환일기를 바꿔 쓰듯 그들은 7일 동안 서로의 삶으로 교환 1주를 보낸다. 윤슬은 엄마의 어린 시절을 보내며 받은 억울함, 부조리함 들을 발견하고 자신의 유쾌함과 솔직함으로 문제를 풀어나간다. 엄마 수일은 엄마 캐릭터를 보존해서 말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을 경악하게도 하지만, 자신만의 성실성과 노력을 탑재한 수일답게 윤슬의 삶에 피해가 안 가도록 1주일을 최선을 다해 윤슬의 삶을 살아낸다. 그렇게 서로의 삶을 살아보면서 엄마는 딸을, 딸은 엄마를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 어느 책보다 시대를 따끈따끈하게 반영해서 공감이 많이 갈 듯하다. 예를 들면, 윤슬이가 좋아하는 음식이 마라탕, 친구들과 함께 가는 노래방과 네 컷 사진을 찍으며 신나하는 모습이 딱 요즘 아이들과 비슷하다. 아마 나 같은 사람은 엄마 수일이 살아왔던 삶이 더 공감이 되겠다. 내가 서태지와 이상은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학교 앞엔 분수대가 있었고, 수일이 입은 황토색 교복이 내 고등학교 때 교복색과 똑같은 데다 학교 앞 떡볶이집에서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는 모습은 오랜 학창 시절을 추억여행을 하는 듯했다. 슬프지만 체벌 받는 장면까지도 말이다. 딱 하나만 덧붙이자면, 엄마가 해주는 된장찌개를 먹는 장면이 있다. 엄마의 밥은 내게 족쇄를 채운 듯 너무나 맛있는데 이렇게까지 그립고 안 질려서 너무 지긋지긋하다고 반어적으로 말한다. 엄마의 밥을 먹은 딸만이 뱉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런 엄마를 향한 사랑을 나타내는 애잔함에선 뭉클하기까지 하다.(그렇다면 문장이 빠질 수 없죠!)


눈물이 쏙 들어갔다. 하여튼 엄마는 나를 너무 모른다. 일단 밥을 먹자. 호박을 듬뿍 넣은 엄마표 된장찌개를 밥에 슥슥 비빈다. 지겹다. 익숙한 메뉴, 익숙한 재료, 익숙한 맛, 엄마의 요리들이 내 입맛에 너무 딱이고, 먹어도 먹어도 안 질리고, 아프거나 피곤하면 더 그립다는 사실이 너무 지긋지긋하다. 딸이지만 엄마이기도 한 내게 족쇄처럼 느껴진다. 정말 왜 이렇게까지 맛있는걸까. p.81


내가 조남주 작가님을 선택한 이유는 조남주 작가님 현실감각이 돋보이고, 마음을 콱 사로잡는 글맛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만큼의 내 속에 억눌려져 있었던, 어디 선간 쏟아내지 못한 내 이야기를 탈탈 털어서 말해주는 이야기까지는 아닐지라도 이 책은 나름으로 아이의 마음을, 엄마의 마음을 담아서 풀어주는 매력이 있다. 1993년 엄마(수일)의 삶으로 간 윤슬에게 이모이자 엄마의 언니(수영)가 말하는 외할머니의 진심을 한 마디로 전하는데, 그 한 마디의 말이 읽는 이의 마음을 콱 비틀어 쥔다. 2023년의 윤슬의 삶을 사는 수일은 그간 집에서 빈둥대는 듯 보이는 윤슬의 모습을 보며 잔소리했던 자신을 생각한다. 하지만 이젠 자신이 경험해 보니 알겠고, 그 고단했었을 윤슬의 삶이 이해가 된다. 딸 가진 부모는 아니어도 자식 가진 마음은 똑같을지라 나는 이 장면에서 잔소리했던 나를 떠올렸다. 힘들다 투정 부리는 듯 보인 아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아이들도 아이들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아이들의 삶을 가볍게 여겼다. 아이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이 미안함도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지만.^^:)


아무리 흔하디흔한 타임슬립 소설이라도, 어느 드라마나 소설에도 나옴직한 엄마와 딸 관계를 다룬 이야기라도 그래도 내겐 조남주 작가님이었다. 그래도 이 책을 읽기 가장 좋은 대상은 엄마와 딸이 되겠다. 딸이 없는 사람으로 감히 이렇게 말해도 될지 조심스럽긴 하다만, 엄마와 딸이 서로 부딪힐만한 포인트를 잘 잡아냈고, 엄마와 딸이 세심함과 따뜻함으로 서로를 이해할 만한 장면을 잘 보여줬다. 어찌 됐든 나 같은 아들 맘이라도 혹여나 그냥 아무 해당사항이 없더라도 조남주 작가님만의 모녀 이야기, 타임슬립으로 서로의 삶을 이해 가는 이야기에 잠시 빠져들어보시길 추천한다. 이 책 어딘가에서 내 모습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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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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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임슬립이나 SF 소설의 뭔가 아다리가 맞지 않는 장면을 만나면 이해할 수 없어서 갑갑함을 느낀다. 그래서 SF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그다지 들지 않았다. 이번 소설도 그런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가족 간의 화해,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 가족으로 나 자신으로 성장하는 스토리인 면에서는 감동적이기도 했다.


2. 쉽게 읽히고, 전개 또한 흥미로웠다. 두꺼운 소설책이 두렵지 않게 술술 읽힌다.


3. 한국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았다. 전개가 억지스럽게도 느껴지는 부분은 어쩔 수가 없다. 연재와 지수만 봐도 딱 한국 영화스러운 인물들의 케미가 나온다. 남녀였다면 딱 로맨스로 전개될 각이다. 누군가를 설득하는 전개도 그렇다. 아니나 다를까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이 책! 이미 연극과 뮤지컬로 공연이 있었다고 한다. 책 못지않게 연극이나 뮤지컬의 호응 또한 좋았던 모양이다.


4. 경마장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 안에서 기수와 기마의 조건들을 알 수 있어 흥미로웠다.


5. 인간이 로봇으로 대체화되는 상황이 언젠가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날지 모른다. 아니 이미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주문은 키오스크가 받고, 접시와 음식을 갖다주는 서빙은 로봇이 하고 있다. 바리스타 커피 로봇도 있는걸? 무인 편의점,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무인 애견숍도 있지 않나?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부작용도 있다는 점도 이 책에서 주목하는 부분이다. 사람(어린이)들의 장난으로 로봇의 고장 부담, 로봇이 고장 났을 때 비용적 부담, 화재 사고 시 확률만으로 판단해서 희망 가능성을 배제하는 점 등 말이다.


6. 인간, 동물, 로봇 모든 존재 간의 연대가 감동적으로 그려졌다. 이 책의 휴머노이드인 콜리는 1000개의 단어라는 한계가 있지만, 실제로 인간과 교류하고 교감하고 그들에게 안정감을 주며 인물 간의 매개체 역할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로봇이 그와 같이 연대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을까?


5번에서와 같이 로봇은 인간의 많은 부분을 편리함으로 대체하긴 하나, 작은 것에서도 가능성을 보고 희망을 보는 인간의 시선을 대체하긴 어려울 듯하다. 분명 로봇, 휴머노이드! 편리하지만 그것들 모두가 옳진 않다. 그러기에 인간과 동물 그리고 비생명체인 로봇은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연대는 글쎄.. 아직 내 상상력은 거기까지 가지 못한다.


여기서 주목하는 인간의 특별한 능력(?)이 있다. 생명이 없는 것에도 생명과 의미를 부여하며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애착 인형에 의미를 부여하는 아이(이건 독서모임에서 한 분이 말씀해 주심)도 그런 모습 중 하나다. 책에서는 보경이 자신의 자동차를 팔며 울었다는데 나는 그 부분이 엄청나게 공감이 됐다.ㅎㅎ



7. 스토리 전개에 있어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콜리를 통해 보이는 인간에 대한 이해, 가족 간의 갈등과 해결, 생명존중에 대한 글들은 인상적이고 생명에 대한 생각을 되돌아보게 한다.


8.SF 소설이라서 그렇게 느껴진 걸까? 굉장히 글이 굉장히 이과스럽다. 간간이 어떤 것에 대한 정의와 설명이 교과서나 비문학 지식 글을 보는 듯하다. 그런 면이 다른 소설 속 글과 달라 색다르게 느껴진다. 이과스러우면서도 어떤 것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글이어서 흥미로웠다.


9. 행복이란 무엇일까? 나는 누군가와 호흡을 맞추고 있나? 휴머노이드로 어떤 존재를 내 삶에 받아들이고 싶나?(애완동물? 집안일 기계? 등등), 생명이 없는 것을 생명이 있는 것처럼 의미를 부여해 애착을 가진 적이 있나? 이런 질문들과 답을 공유하고 싶다.


10. 인지와 학습능력을 넣어두었다고 하더라도 휴머노이드가 콜리 같을 수 있을까? 자신의 본분을 잊고 하늘을 본다거나,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한다거나, 어떤 것에 대해 알고 싶고 궁금해한다거나 그런 휴머노이드가 가능할까? 소설은 소설일 뿐 왜 이렇게 따지고 드냐?라고 하신다면 할 말이 없다. ㅎㅎ


11. 휴머노이드는 욕망을 가질까? 인간이 되고 싶어 할까? 물론 이 소설 속 콜리는 알고 싶고 되고 싶은 바람은 가진 휴머노이드였다. 그러나 인간이 되고 싶진 않다고 했다. 양철은 심장을, 허수아비는 두뇌를 갖고 싶어 하는 이야기였던 <오즈의 마법사>가 생각났다. 인간의 눈으로 소설 속 등장 대상을 봐서 그런가? 등장하는 이들은 인간의 어떤 것을 궁금해하고 인간의 어떤 것을 동경한다.


12. 당신을 이루는 천 개의 색깔은 ??

아 여긴 콜리가 초록이고 그가 좋아한 색은 파랑이지만, <오즈..>에서는 에메랄드의 초록이 떠오른다. 내가 가진 단어는 어떤 색으로 지정할 수 있을까? 콜리가 바라본 하늘과 같은 그 어떤 것을 나는 보며 감탄하고 행복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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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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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 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 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p.11


첫 문단을 읽으면서 스산하고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렇게 가을을 '바람이 잎을 뜯어내고, 나무를 벌거 벗긴다'고 표현하는 게 가능하구나! 그 표현이 신선하면서도 나무에게 가진 것을 홀딱 빼앗아 버리는 바람의 잔인함이 거칠고 싸늘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랬지만, 역자의 후기(p.127-128)에도 이 문단을 거론했다. 이 표현에 대해 번역하는데 많은 고민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역자의 후기를 참고하자면,

이 소설에 나오는 막달레나 세탁소는 이렇다.

(옮겨 적으면서 생각보다 처참한 장면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참담하다...ㅠㅠ)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고 아일랜드 정부에서 지원한 같은 이름과 명분의 여러 시설 가운데 하나다. '타락한 여성'들을 수용한다는 명분으로 설립했으나, 성매매 여성, 혼외 임신을 한 여성, 고아, 학대 피해자, 정신이상자, 성적으로 방종하다는 평판이 있는 여성, 심지어 외모가 아름다워서 남자들을 타락시킬 위험이 있는 젊은 여성까지 마구잡이로 이곳에 수용했고 교회의 묵인하에 착취했다.

p.130


이 소설의 주인공인 펄롱은 아버지를 모르는 미혼모가 낳은 이로, 어느 정도 자신의 기반을 다져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인물이다. 전사한 남편의 유족 연금으로 검소하게 사는 미시즈 윌슨 덕에 어머니가 그 집안일을 도와 펄롱도 그 집에서 많은 어려움 없이 살았다. 현재는 아내와 딸 다섯과 살고 있다. 그러던 그가 석탄을 배달하는 중에 수녀원에 들르게 되는데, 거기서 한 소녀가 갇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수녀들은 모르는 척하거나 참견하지 말아주길 바라는 눈치이고, 원장 수녀 또한 자신에겐 자애롭게 보이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모습들을 보인다. 펄롱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미사를 보는 중에도, 수녀원에서 마주친 여자아이가 자신에게 한 말과 자신이 발견한 여자아이의 젖이 새서 블라우스가 젖은 모습이 떠오른다. 주변 이웃들도 그 수녀원은 건드리지 말라고 '모두가 한통속이야'라는 한마디로 조언한다. 펄롱은 자신 안에 싸우는 두 가지의 마음에서 어떤 선택을 할까?


이 소설은 시대와 상황은 사실을 기반으로 한 허구이긴 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일본... 내가 읽는 소설은 이렇게 한계가 있었다.

클레어 키건이라는 작가가 주목을 받으며 아일랜드만의 상황을 이렇게나마 살펴보게 되다니 그 세상 또한 새롭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스며들어있는 인간의 탐욕과 묻힌 진실, 억울하게 삶을 빼앗겨버린 이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펄롱이 내면의 고뇌 속에 결국은 세라를 안고 나오는 장면은 걱정스러우면서도 울컥하다.(결국 스포인가요? ㅎㅎ) 그는 세라에게서 자신의 어머니를 보았고,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헤아린 듯하다. 이제는 안정된 가정을 꾸린 것만으로 충분히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는데, 자기 살기도 바쁜 불황기에 자신도 딸이 다섯이나 되면서, 자신도 추위와 피곤을 무릅쓰고 매일 주어진 삶을 나아가면서도 그는 선택했다. 자신이 받은 사랑이 있었기에, 자신 안에 꿈틀거리는 양심이 부르짖는 소리를 사명처럼 받아들었기에...


그가 받아들인 운명도 그러하거니와,

그 여자아이(세라)가 펄롱의 집에서 어우러져 살게 될 모습이

나한테는 펄롱처럼 희망적이지만은 않는 건 왜일까?

책 제목은 너무나도 사소하고 작은 것인데,

여기서 던져내어진 펄롱의 처지와 당시의 상황은 내게는 사소하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길!!

나 또한 현실에 좌절해서 쉽게 희망을 저버리지 말길...


먹먹하면서도 담담한 글체가 술술 읽히는 게 의아하다.

역시 클레어 키건 책을 읽으면서 당혹스러운 부분이다.

곧 다음 소설도 나온다고 하니 어떤 소설일지 또 기대를...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멀리 가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시내에서, 시 외곽에서 운 없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사람들 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고 전기 요금을 내지 못해 창고보다도 추운 집에서 지내며 외투를 입고 자는 사람도 있었다. 여자들은 매달 첫째 금요일에 아동수당을 받으려고 장바구니를 들고 우체국에서 줄을 섰다. ... 어느 이른 아침 펄롱은 사제관 뒤쪽에서 어린 남자아이가 고양이 밥그릇에 담긴 우유를 마시는 걸 봤다. p.22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p.24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 세라."

펄롱은 어렵지 않게 아이를 데리고 진입로를 따라 나와 언덕을 내려가 부잣집들을 지나 다리를 향해 갔다. 강을 건널 때 검게 흘러가는 흑맥주처럼 짙은 물에 다시 시선이 갔다. 배로강이 자기가 갈 길을 안다는 것, 너무나 쉽게 자기 고집대로 흘러 드넓은 바다로 자유롭게 간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해싿. 외투가 없어서 추위가 더 선뜩했다. 펄롱은 자기보호 본능과 용기가 서로 싸우는 걸 느꼈고 다시 한번 아이를 사제관으로 데려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펄로은 이미 여러 차례 머릿속으로 그곳에 가서 신부님을 만나는 상상을 해봤고 그들도 이미 다 안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시즈 케호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다 한통속이야. p.117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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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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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사소한 것들을

단편소설로 엮어냈다.

처음엔 소설들끼리 연결되었나 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개별적인 내용이다.


이 소설들에서 인상적인 점은

(그런 것만 생각나서인지 몰라도) 

남자들이 영 주도적이지 못하고 의존적이라는 거다.

또한 아기를 낳고 안 낳고의 문제가 많은 부부들 사이에서

중대한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는 점도 기억에 남는다.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중에

우리의 삶에서 거쳐가는 사소한 것들을 

그것도 사라지는 것들을

일상적이면서도 섬세하게 잘 짚어줬다.

읽으면서 더불어

'아... 그러네..'

'이런 게 내 삶에서 없어지고 있었지.'

'이런 사람이 내 삶에서 벗어났었지' 생각을 한다.


육아와 일상에 지치는 하루하루, 

생뚱맞은 이웃과 맺어지는 우리 부부, 

교수직 일이 잘 안되는 친구에게 느껴지는 열등감, 

촉망받던 첼리스트 아내가 그의 재능을 병으로 잃어가는 모습,,,, 


우리 주변에 일어날 만한 일들이지만 

그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과 아쉬움, 후회와 아픔들을 

앤드루 포터만의 글로 표현한다.

분명 무덤덤한데 왜 이렇게 아리고, 슬프고, 공감되는 거지? 

그런 일들을 다루고 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이어 15년간의 공백을 깨치고 나온 2번째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곱씹어 읽어볼 책이다. 

음... 사담이지만 작가님 사진 보고 심쿵 했음.

(궁금하면 찾아보세요~~>_<)


"아빠는 뭐 하고 있었어?" 이언은 말했고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자기가 물에 빠진 순간, 혹은 그전 오 분이나 십 분 동안. 자신이 튜브나 다른 구명 장비 하나 없이 에어매트 위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육아 블로그를 드나들며 헛소리나 지껄이는 나. 육아 지침과 육아 조언 칼럼을 집착적으로 읽는 나. 그 순간 나는 미니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일 말고 무엇을 하고 있었나? 나는 식음료 테이블 앞에 있었지만 내 정신은 어디에 있었나? 대체 무엇에 집착하고 있었기에 바로 그 특정한 순간에 부모로서 단 하나의 주요한 책임, 내 아이를 살린다는 책임을 잊어버렸나? 그때를 돌아보려 했지만.- 바로 그 순간에 내 정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떠올리려 해봤지만- 솔직히 기억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물 위의 햇빛, 순간적인 번뜩임, 밝은 섬광뿐,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p.158


그때 누군가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그 물건들을 전부 돌려줄 거라고, 잠시 내가 보관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또 어떤 때는 폴이 내게 한 짓에 대한 응징이라고 되뇌기도 했다. 내겐 그 행동을 스스로에게 정당화할 방법들이 있었고 에이미도 문제 삼은 적이 없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선한 사람이라고 믿었지만-지금도 그렇게 믿는다- 내 침대 아래에 있는 판지 상자를 진정으로 변명할, 혹은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가끔 밤에 어둠 속에 누워 삶의 이런저런 불안 때문에 뒤척일 때면 내 바로 밑에 있는 그 상자를 생각했다. 폴과 일레인의 삶을 이루던,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서 빼앗은 그 작은 조각들, 그 하찮은 상징물들, 그 기묘하게 개인적인 장신구와 증표들, 시기나 분노 때문에, 혹은 두 가지가 뒤섞인 감정으로 말미암아 무단으로 취해 내 것으로 만든 그 사소한 기념품과 정표를 생각했다. 그 상자를 떠올리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의문이 들었다. 혹시 내가 정신이 이상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얼마 후 눈을 감고 잊어버리곤 했다. 다른 생각에 빠졌다가 며칠이 지나서야 -때로는 일주일 가까이 지나서야- 다시 그 상자를 생각하기도 했다.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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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3 - 박경리 대하소설, 4부 1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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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복은 귀향을 했지만, 자신의 아들 영호가 재학 중에 일제 경찰에 끌려가는 일이 생깁니다. 마을에선 한때 살인자의 아들이었던 한복을 언짢게도 여겼던 모습이 있지만, 이제는 독립운동가라고 치켜세웁니다. 오서방과 우 서방은 원래도 좋지 않은 사이였는데, 사소한 일로 싸움을 나서 우 서방이 죽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오서방이 귀신이 쓰였던 거라며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감싸죠. 우 서방의 아내가 만만찮게 손을 쓰기에 판결이 어떻게 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김제생이 환국을 찾아와 환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죠. 환국은 쌍계사로 안내하지만, (서희의 지시를 받은) 연학은 도솔함으로 옮길 것을 환국에게 제안합니다. 서희는 이상현 본가에 6 볏섬을 수레에 실어 보내며 인사를 건넵니다. 그 와중에 환국도 윤국도 자신의 주장이 강해질 만큼 성장한지라 더 이상 그녀의 품에 있지 않아요. 남편인 길상도 그렇고 아들들도 자신들에게 떨어져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데 있어 홀로된 듯한 서희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윤국은 가출해 여기저기 배회하며 이일 저일 하며 다니다가 결국 돌아와 영산댁의 숙이와 만나는데요. 숙이와 어떠한 인연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옥과 명희가 선혜네 집에서 만나게 됩니다. 둘은 따로 역까지 가서 대화를 좀 더 이어가다 헤어지는데요. 그때 명희는 조용하의 동생 조찬하를 역에서 마주치죠. 같이 집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조용하는 분노합니다. 이후 명희는 조용하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몇 차례 집을 나간 끝에 자살까지 이르렀다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살아납니다. 그리고 여수에 있는 여옥에게 찾아가죠. 그리고 용하와 있던 일을 다 이야기합니다. 너는 너의 일을 하라고 여옥은 명희에게 조언하는데요. 살아갈 이유도, 갈 곳도 없어서 자살만을 생각한 명희가 새 삶을 찾아갈지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 이상현이 맡긴 봉순이의 딸을 제대로 맡아서 키우지 않을까도 싶네요.


평사리 사람들 같은 현실적인 대화는 너무 공감이 가고 감정이 몰입되는데요. 서울 및 지식층 사람들의 대화는 도무지 공감이 안 됩니다. 뜬구름 잡는 이상적인 이야기만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것 같아서 전 답답하게만 읽히더라고요. 일제와 맞서 싸우는 이들은 실제로 힘없고 나라만을 사랑해서 행동하는 이들입니다. 오히려 친일이든 중도파든 어느 정도 사는 사람은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모습에요. 정말 보기 좋지 않습니다. 저라도 행동하는 누군가와 같은 인물이 됐을 거란 자신은 없긴 하지만요. 몸으로 때우는 이들과 입으로 때우는 이들이 따로 있는 것 같아 영 씁쓸하기만 합니다. 


어찌됐든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내는 이들이 대단하게 여겨집니다. 책 속 상황도 일제치하라 힘든데 저는 자꾸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인물들에게 독립이 온다고 끝이 아닌데... 6.25전쟁이 그들 앞에 있는데...ㅠㅠ' 

그럼에도 그들은 부르짖습니다!

'나는 여기 살 기다!' 한복의 부르짖음이지만 전 이게 한복이의 개인적인 부르짖음이 아닌 한 민족의 설움와 더불어 짓밟혀도 살아내나는 생명력과 끈기를 나타내는 한 마디 같았어요.


조용하는 원래도 그런 인물인 줄 알았지만, 이번 편에선 제대로 사이코 패스 면모를 보입니다. 아쉬울 것 없이 모든 것을 갖고 살아온 이에게 왜 풍족하고 넉넉한 마음이 아닌 누군가를 못 괴롭혀서 난리인 모습이 도드라지는 걸까요? 그와 반대로 명희란 인물도 꽤나 복잡다단한 인물입니다. 사랑을 해도, 사랑을 받아도 그들과 는 인연이 있는 게 없는 명희입니다. 신식 문물과 교육을 받은 여인이지만 주체적이기 보다 수동적이고 고뇌가 많은 인물입니다. 굉장히 안쓰럽죠. 부디 명희가 자신이 살아가야 할 목적과 삶의 기쁨을 찾아내길 바랍니다.


갈수록 이렇게나 다양한 분야가 거론되고, 다양한 인물의 심리가 얽히고설킨 대하소설을 집필하신 박경리 작가님이 존경스럽습니다. 인물들은 만나보신 걸까? 간도는 가보신 걸까? 경제신문과 지식은 어디서 주로 얻으셨을까? 그 시대상의 모습들은 어디서 시작해 상상으로 펼쳐 내셨을까? 한 사람에게서 이런 엄청난 분량의 서사가 나왔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일본인 왈, 조선인은 게으르다, 조선에는 웬 거지가 이리 많으냐, 그 실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총독부에 가서 물어볼 일이다. ... 항상 족하지 못했지만 마을마다 대개 객사라는 것이 있었고 여염집에서도 한두 끼의 끼니, 잠자리를 거절하는 풍속이 아니었기에 나그네는 있었으나 거지는 흔치 아니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삼천리 강산, 남의 땅으로 쫓겨간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이 불운한 강산 거리거리에 거지들이 떼 지어 방황하고 있는 것인가. 일인들 왈 조선에는 웬 거지가 이리 많으냐, 총독부에 가서 물어볼 일이다. 땅을 약탈하여 배가 불러 터지게 된 동척에 가서 물어볼 일이다. 조선인은 게으르다. 어째 게으른가 그것 역시 총독부, 동척에 가서 물어볼 일이다. ... p.12


 ... 이곳에서 뜨고 싶은 생각을 안 해봤느냐고 홍이 한복에게 물어본 것은 어쩌면 동병상련, 그런 것인지 모른다. 칠성이 아낙이었던 임이네는 홍의 생모, 그 수치스런 비극의 한 모퉁이와 관련된다. 실상 칠성은 음모에는 가담했으나 살인사건과는 무관이다. 그러나 오명은 지워지지 않은 채 홍의 의식 한구석에 남아 있었고 또한 평사리 마을 사람들 의식 한구석에도 남아 있어서 희미하나마 때론 적의로, 때론 모멸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다. ... p.102


'나는 여기 살 기다.'

한복의 그 말이 새삼스레 놀라움을 안고 되살아난다. 홍이는 자신의 만주행을 도망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어떤 면에선 고향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복의 경우는 분명히 도망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 그는 도망가지 않았고 수없이 갈아대는 칼날 밑에 수더분한 본래 그 모습대로 숫돌이 되어 살아온 것이다. p.103


"안 좋아요. 사방팔방 온통 벽이니까요. 조금만 움직여도 이마빡이 부딪치고 좀 더 움직이면 골통이 박살날 겁니다. 도대체 사람은 열쇠를 몇 개나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p.159


"그건 나도 누구한테였을까? 귀동냥을 한 건데 말이야. 어떤 목사님한테 들었는지, 사람은 절망의 구렁창에 빠지면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는 거야. 그 하나는 먹는 것 입는 것 다 잊어버리는 상태 그리하여 짚불 잦아지듯 사라지는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주렁주렁 단다는 거야. 허기 든 사람같이 뭣이든 계속해서 먹고, 전에 안 하던 화장을 하고 반지나 장신구 같은 것은 있는 대로 끼고 달고 옷은 화려하게, 절망의 시간을 빨리 먹어치우자는 잠재의식의 소행이라는 거야. 아이크! 이거 차 놓치겠다." p.188


... 늙으믄 봄이 좋은기라. 사방에 실안개가 서리서 나무마다 물이 오르고 찔레나무를 보아. 땅에서 생멩수를 뽑아 올리니라고, 저 빨간 줄기를 보라고." p.307


  명희는 창조의 능력이란 말에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좁은 뜻에서의 예술을 두고 그 말을 뇌었던 것은 아니었다. 명희에게 그것은 엄청나게 큰, 우주와 개미까지 합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우주와 미물이 모두 창조에 동참하고 있다는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그 깨달음은 희망이기보다 더욱더 큰 절망, 절망이 어떤 것인가를 뚜렷하게 명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p.519


"너에게야 그런 일 아무려면 어때. 농촌지도자가 되겠니? 나같이 전도부인이 될 것도 아닐 거고, ,넌 너 갈 길을 가면 돼. 아무튼 난 지금은 주님께 감사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p.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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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06-21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지 13권 ... 대단하십니다! 완독의 길 잘 걸으시길 기원합니다 ㅎㅎ 6월 마저 잘 보내시길요~

렛잇고 2024-06-21 11:3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날이 엄청 덥네요 서곡님도 6월 덥지만 책과 함께 시원한 하루하루 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