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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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 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 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p.11


첫 문단을 읽으면서 스산하고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렇게 가을을 '바람이 잎을 뜯어내고, 나무를 벌거 벗긴다'고 표현하는 게 가능하구나! 그 표현이 신선하면서도 나무에게 가진 것을 홀딱 빼앗아 버리는 바람의 잔인함이 거칠고 싸늘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랬지만, 역자의 후기(p.127-128)에도 이 문단을 거론했다. 이 표현에 대해 번역하는데 많은 고민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역자의 후기를 참고하자면,

이 소설에 나오는 막달레나 세탁소는 이렇다.

(옮겨 적으면서 생각보다 처참한 장면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참담하다...ㅠㅠ)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고 아일랜드 정부에서 지원한 같은 이름과 명분의 여러 시설 가운데 하나다. '타락한 여성'들을 수용한다는 명분으로 설립했으나, 성매매 여성, 혼외 임신을 한 여성, 고아, 학대 피해자, 정신이상자, 성적으로 방종하다는 평판이 있는 여성, 심지어 외모가 아름다워서 남자들을 타락시킬 위험이 있는 젊은 여성까지 마구잡이로 이곳에 수용했고 교회의 묵인하에 착취했다.

p.130


이 소설의 주인공인 펄롱은 아버지를 모르는 미혼모가 낳은 이로, 어느 정도 자신의 기반을 다져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인물이다. 전사한 남편의 유족 연금으로 검소하게 사는 미시즈 윌슨 덕에 어머니가 그 집안일을 도와 펄롱도 그 집에서 많은 어려움 없이 살았다. 현재는 아내와 딸 다섯과 살고 있다. 그러던 그가 석탄을 배달하는 중에 수녀원에 들르게 되는데, 거기서 한 소녀가 갇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수녀들은 모르는 척하거나 참견하지 말아주길 바라는 눈치이고, 원장 수녀 또한 자신에겐 자애롭게 보이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모습들을 보인다. 펄롱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미사를 보는 중에도, 수녀원에서 마주친 여자아이가 자신에게 한 말과 자신이 발견한 여자아이의 젖이 새서 블라우스가 젖은 모습이 떠오른다. 주변 이웃들도 그 수녀원은 건드리지 말라고 '모두가 한통속이야'라는 한마디로 조언한다. 펄롱은 자신 안에 싸우는 두 가지의 마음에서 어떤 선택을 할까?


이 소설은 시대와 상황은 사실을 기반으로 한 허구이긴 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일본... 내가 읽는 소설은 이렇게 한계가 있었다.

클레어 키건이라는 작가가 주목을 받으며 아일랜드만의 상황을 이렇게나마 살펴보게 되다니 그 세상 또한 새롭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스며들어있는 인간의 탐욕과 묻힌 진실, 억울하게 삶을 빼앗겨버린 이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펄롱이 내면의 고뇌 속에 결국은 세라를 안고 나오는 장면은 걱정스러우면서도 울컥하다.(결국 스포인가요? ㅎㅎ) 그는 세라에게서 자신의 어머니를 보았고,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헤아린 듯하다. 이제는 안정된 가정을 꾸린 것만으로 충분히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는데, 자기 살기도 바쁜 불황기에 자신도 딸이 다섯이나 되면서, 자신도 추위와 피곤을 무릅쓰고 매일 주어진 삶을 나아가면서도 그는 선택했다. 자신이 받은 사랑이 있었기에, 자신 안에 꿈틀거리는 양심이 부르짖는 소리를 사명처럼 받아들었기에...


그가 받아들인 운명도 그러하거니와,

그 여자아이(세라)가 펄롱의 집에서 어우러져 살게 될 모습이

나한테는 펄롱처럼 희망적이지만은 않는 건 왜일까?

책 제목은 너무나도 사소하고 작은 것인데,

여기서 던져내어진 펄롱의 처지와 당시의 상황은 내게는 사소하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길!!

나 또한 현실에 좌절해서 쉽게 희망을 저버리지 말길...


먹먹하면서도 담담한 글체가 술술 읽히는 게 의아하다.

역시 클레어 키건 책을 읽으면서 당혹스러운 부분이다.

곧 다음 소설도 나온다고 하니 어떤 소설일지 또 기대를...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멀리 가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시내에서, 시 외곽에서 운 없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사람들 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고 전기 요금을 내지 못해 창고보다도 추운 집에서 지내며 외투를 입고 자는 사람도 있었다. 여자들은 매달 첫째 금요일에 아동수당을 받으려고 장바구니를 들고 우체국에서 줄을 섰다. ... 어느 이른 아침 펄롱은 사제관 뒤쪽에서 어린 남자아이가 고양이 밥그릇에 담긴 우유를 마시는 걸 봤다. p.22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p.24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 세라."

펄롱은 어렵지 않게 아이를 데리고 진입로를 따라 나와 언덕을 내려가 부잣집들을 지나 다리를 향해 갔다. 강을 건널 때 검게 흘러가는 흑맥주처럼 짙은 물에 다시 시선이 갔다. 배로강이 자기가 갈 길을 안다는 것, 너무나 쉽게 자기 고집대로 흘러 드넓은 바다로 자유롭게 간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해싿. 외투가 없어서 추위가 더 선뜩했다. 펄롱은 자기보호 본능과 용기가 서로 싸우는 걸 느꼈고 다시 한번 아이를 사제관으로 데려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펄로은 이미 여러 차례 머릿속으로 그곳에 가서 신부님을 만나는 상상을 해봤고 그들도 이미 다 안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시즈 케호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다 한통속이야. p.117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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