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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인문학 - 그 골목이 품고 있는 삶의 온도
임형남.노은주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8년 10월
평점 :
톽톽톽톽 톽톽톽톽
넓은 길에서 뛸 때는 알 수 없는, 골목길에서 달려야만 나는 소리가 있다.
골목길 안을 뛸 때, 그 좁은 골목을 만드는 양쪽 벽 혹은 테두리, 면을 튕기며 울리는 소리가, 그 느낌이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숨바꼭질을 하며 혹은 하굣길로 찾아보는 골목길은 지름길이고, 모험을 꿈꾸며 묘한 쾌감을 자아내는 의미있는 길이기도 했다. 들어갈 때는 미로로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 통과하면 넓은 시야를 제공하는 것이 알던 길도 새롭게 느껴졌다. 새로운 길을 찾아냈을 때 기분이란 탐험가 혹은 개척자가 된
것 같다.
골목은 개인의 역사이자 도시의 기억이다.
도시는 사람의 몸과 똑같다. 큰길이 굵은 핏줄이라고 보면 큰길 뒤로 뻗어 있는 길들은
가는 핏줄이다. 큰길 뒤로 이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는 그 길이 골목이다. 도시에는 무수한 골목이 있다. 사람의 몸처럼 모세혈관 역할을 하는
골목이 잘 살아 있고 건강 해야 도시도 생기 있게 살아난다. 골목은 도시의 맨 얼굴이며 도시의 정체성이며 삶의 여유를 주는 공간이다. 골목에는
달팽이 속도처럼 느리기 그지없는 시간이 시루떡처럼 쌓여있고, 무수한 집과 흉터 같은 삶의 웅숭깊은 사연이 오롯이 담겨 있다.
우리는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오랜 풍상을 겪으며 생긴 얼굴의 주름살과도 같은 골목을
없애버렸다. 그래서 작고 사소한 개인의 역사와 도시의 기억도 함께 묻혔고 증발되어 버렸다. 도시를 아름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재료는 시간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덮고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그 아름다움은 시간이라는 포장이 덮이며 다양한 연상과 감흥을 불러온다. 사람이나 도시는 시간이
담기고 기억이 담겨 품위와 개성이 살아있어야 한다.
이 책을 소개하는 문구는 내가 살았고, 누볐고, 알아내었던 곳의 그 골목길을 떠오르게 한다. 아이들과 사는 현재 내 동네는 좀처럼 골목길을
찾기 어렵다. 아파트로, 빌라로 채워진 동네에서는 아이들이 누빌 수 있는, 새로운 호기심과 도전을 자극할만한 골목이 없다. 그나마 빌라의
틈사이가 있어 아이들이 들어가 서로 뛰노라면 왜 여기서 노냐고, 여기 입주민이냐고 꾸지람을 들을 게 걱정된다. 자신의 공간을 어느 누구와
공유하기 꺼려하고, 자기 것을 보존하고자 하는 안전을 향한 욕구를 보면, 내가 살았던 이전 시대와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와 공간을 공유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는지 비교하게 된다. 현 모습이 마냥 씁쓸하고 서운하다.
이 책은 저자 두사람이 건축 동문으로, 부부로 건축을 다루면서 옛집, 골목 등을 거닐고 산책해서 발견한 것들의 이야기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골목도 소개되는데, 그 지역의 모습과 뒷 이야기가 꽤나 흥미롭다. 모르면서 읽기에는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읽어야 하는데, 그게
수고로우면서도 중간중간 내가 아는 길이 나오면 반갑고 친숙해 신나게 읽게도 된다. 서울 중심부 쪽을 읽으면서 아련하게 거닐던 길들이 떠올라
설레이기도 했다. 옛 역사와 연관지은 지역과 건물의 존폐를 알게 되는데서도 여러 감정을 고루 불러일으킨다.
삽화는 이책에서 느낄 수 있는 온기를 한층 더한다. 상상하다가 피로감이 생겼을 때 그림을 보면서 어딘가 생각해보기도 하고, 그림에 마음을
턱하니 넘겨 보기도 한다. 손수 그려진 그림, 색감에서 골목에서 따뜻함과 친근함이 절로 느껴진다.
책을 읽으면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을 지적했다. 길을 다닐 때, 차를 피하거나 멈추어 선 경험이 당연한 듯
여겨지고,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이들에게서 차를 피하게 하면서도 그 공간이 인간의 것임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편리를 추구함이 한편으로는 인간을 밀어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싶기도 하고, 너무 무뎠던 것 같아 쓸쓸했다.
그래서 골목이 더욱 그립기도 하지만, 현재 내 주변에서 찾아보기는 정말 힘들다.
나도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했다. 청결하고, 바르게 정돈된 집에서 살고 싶어서이다. 그런 편리함이 좋아 골목이 주는 애틋함을 그리워하는
마음조차 사라졌다. 이 책은 그런 애틋함을 그리움을 떠오르게 해주었다. 그리고 골목이 주는 의미와 그 따스함을 다시 상기시켰다. 막힘과 고루고루
펼쳐있는 길이 공존하며, 이리저리 연결되고, 그런 것들 사이에서 헤매다가 빠져나오게 되는 그 기분...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지만, 내가
살던 곳을 찾아가도 이제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 아직은 살아남은 골목들을 보고, 그 안에서 삶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음이 즐거웠다. 최근 알쓸신잡 부산편에 나온
아미동비석마을과 감천문화마을이 떠오르며 글을 읽으며 나도 마음 속으로 뛰고, 막혀보고, 또 다시 만나고, 빠져나오는 느낌을 이어받았다.
이런 마을이 한 도시의 생살이며 역사이며, 누군가에게 사연이고 기억이 되는 그 의미를 다시한번 발견할 수 있게 되어 좋았다.
골목이 아름답다는 것을 켜켜히 살아간 우리의 삶의 흔적이 아름답다는 것을 이제야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