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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 권기태 장편소설
권기태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2월
평점 :
한 남자가 서 있다. 샐러리맨의 교복인 양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엔 딱 봐도 우주인의 것으로 보이는 헬멧을 착용했다. 착지는 안정감 있게 서 있는데, 붕 떠있지 않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땅을 딛고 있는 듯하다. 편하게 두 손을 주머니 춤에 넣고 있다.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헬멧에 비친 것으로 그가 응시하고 있는 것이 밤하늘의 별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우러러보는 모습은 간절해 보인다. 그의 배경은 헬멧에 비친 밤하늘과 같은 네이비색으로 그를 둘러싸고 있다.
누구나 자신만의 우주를 꿈꾼다. 동기는 제각각이고 크기도, 모양도 모두 다르다. 각기 다른 환경, 처한 상황에서 자신만의 소중한 우주를 간직하고 기대한다.
이 책은 이진우란 인물이 우주인 선발 그리고 최후의 1인까지 가는 과정을 그렸다. 마치 TV에서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을 볼 때처럼 긴장감이 넘친다. 이진우의 1인칭 시점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그와 함께 우주인 후보에 선발된 김태우, 김유진, 정우성의 인터뷰들을 중간중간 추가했다. 여러 사람들의 시각을 보완했으니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내면이 적날하게 드러난다.
많은 부분 문장이 짧아 단순해 보이면서도 절제되어 보였다. 하지만 순간순간 상황에 처한 감정을 표현하는 문장이 좋았다. 비유가 와닿아서 심정이 이해가 잘 되었다.
뭔가 끝맺음이 없이 물에 풀린 잉크 같았다.
p.108
.... 청춘은 떠났지만 연륜은 도착하지 않았다. ...
p.104
특히 이진우가 회사에서 받은 어처구니없는 평가, 실적의 불합리함, 상사와의 갈등 그리고 거기서 느끼는 배신감, 무기력함, 좌절감은 최근 남편이 고민하는 문제와 흡사해서 놀랐다. 김유진의 수영장 탈의실 이야기는 요즘같이 페미니즘에 민감한 때에 한번 다루어져서 좋았다. 최근에 100분 토론에서 여성할당제로 끌어주길 자신도 바라지 않는다는 소신녀의 말도 생각났다.
"수영장 탈의실에 여성 칸이 없는 것은 여자들을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 우주로 가면 공간이 너무 좁아 남녀라고 특별히 의식하지 말고 살아야 하니까. 그걸 준비하는 거예요" 나중에 안나에게 물어보니 제 생각이 맞았어요. p.253
3명 남자가 있으니 1명은 여자가 있어야 구색이 맞춰져야 한다는 댓글들(p.315)에서 보이는 성차별적인 발언들과 더불어 성차별에 대한 대책으로 혜택을 준다는 이야기가 나는 불편했다. 이런 성차별로 인한 갈등과 편견 어린 의식이 점차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겠지만, 한 번쯤 거론된 이야기가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점차 좁혀지는 우주인 선발에 최후의 1인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단 1명의 위대함, 출중함, 감히 근접할 수 없는 모습이 아니라 선발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 욕망,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들을 다루어 생각해볼 만하다. 우주인 선발과정에서 그 환경은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도 같다. 책 속의 4인이 선택하고 행동하는 기준이 다름을 보며 삶에 있어 매 순간 선택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모습이 보인다. 제목에서 <중력>은 우리가 돌아와야 할 삶의 운명이며 조건(정우성의 페이스북 글처럼)과도 같다. 개인은 이상을 향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 책에서처럼 우주, 그리고 성공, 부, 명예, 거창하지 않아도 소소하게 꿈꾸는 어떤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궁극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에게 그보다 더 길게 펼쳐질 현실이 있고, 운명이 있다. 보통 근시안적으로 한 가지에 연연하는 모습을 가지기 쉬운데 이 책을 읽고 한번 멈추어 짚어볼 만하다.
이 책은 13년간 이 책을 위해 고군분투한 작가의 역작이다. 오랜 세월만큼이나 견뎌온 것들이 이 책에 담겨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현실의 삶이 있음에도 꿋꿋이 우주인이 되고 싶어 달려온 주인공들의 삶을 차근차근 바라보다 보면 작가의 13년이 꼭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다.그만큼 쉽지 않은 소재와 스케일이다. 그리고 거대한 인생의 줄기를 중력이란 이름으로 봅아낸 것이기에 13년이란 숫자가 더 깊고 넓게 느껴진다. 그런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이 책만의 가치를 지닌다. 여기에 우리의 삶이 담겨있고, 켜켜이 쌓인 현실의 단층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구부러져 우리의 삶을 더욱 굳건히 완성시켜나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삶은 가끔 사람을 기만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가망 없는 일을 권유하진 않았겠지. 그 정도로 잔인하지는 않겠지.
p.54
과거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의문이 생겨난다. 그런 의문이 방금 가능성을 만들어냈다. 해석의 가능성이 실행의 가능성을 만들어냈다. 과거도 이렇게 살아있구나.
희미한 희망이 피어올랐다. 끈질기게 살아가는 모닝듀처럼.
p.78
내 머릿속의 무겁고 심각한 현실은 잘 뜨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떠보려고 온 힘을 다할 생각이다.
p.145
중력을 이십오 초 정지시키듯이 불행을 이십오 초 멈출 수만 있다면...... 차가운 비바람과 사나운 파도, 지진이나 해일도 이십오 초 멈출 수 있다면...... 시기와 질투, 탐욕과 의심, 증오와 공포의 시간도 그렇게 멈추고 진정시킬 수만 있다면...... 그래서 연민과 믿음을 지닐 수 있다면...... 용기를 가지고 가녀린 것들을 북돋고 암울한 것들에 맞설 수 있다면......
p.146-147
나는 중력을 탓하며 쓰러지지만 중력은 나에게 관심조차 없으리라. 하지만 지금 중력은 누구에게나 힘을 미친다. 누구나 똑같이 바닥에 닿게 하고, 서든 눕든 제 무게를 되살려 준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있고, 태양도 지녔지만 티끌도 가졌다. 그래서 중력은 모든 것이 제가끔 움직이고 저마다 살아가게 하는 힘이고 조건이고 운명이다.
p.152
- 저 별은 나의 별, 그렇게 말하고 싶은 별이 있나요?
"제가 아마 업적을 많이 남긴다면 소혹성 정도에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지요. (웃음) 좋아하는 별은 태양입니다. 이제 눈을 뜨고 일을 할 시간이 찾아왔어. 하고 알려주니까요. 동이 트는 광경은 저를 늘 설레게 해요. 별 중에 그렇게 장엄하게 떠오르는 별이 또 어디 있을까요. 주연이니까요. 그런 유일무이한 별이 있어서 우리가 생겨나고 또 살아가고 있잖습니까? 또 그 별은 물러갈 때를 알고 있어요. 다른 별들이 빛나도록 자리를 비켜주는 저녁 무렵의 퇴장은 하루하루가 다르고 아름답잖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내일의 출연을 또 기다리는 게 아닐까요?
p.159-160
이 한가하고 평화로운 풍경의 껍질 한 귀퉁이 속에서 살고 죽는 싸움이 이렇게 사납게 벌어지고 있다니. 공기에는 볕이 이렇게 풍부하고 고요한데도 끔찍한 살육이 꼬리를 물다니. 몸부림과 발버둥이 저리 처절하다니.
내가 알지 못했을 뿐 내 인생의 발걸음 하나마다 가까운 곳에서는 이런 개미들의 싸움이 있었다. 연구소에서건 여기서건.
p.236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목소리를 내면 결국에는 큰 방향이 정해지는 거야. 길이 만들어지는 거지."
p.258
용기는 계속할 힘이 아니다. 힘이 없어도 계속하는 것이다. 우레 같은 외침만 용기가 아니다. 쉬었다가 다시 해보자. 나지막이 속삭이는 것도 용기다.
p.318
"이게 과연 우주인을 교체할 문제인가요? 저의 사본을 이미 가져가셨잖습니까? 제게는 배우려는 희망이, 맡은 일에 맞게 지성을 갖추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그게 없으면 저희는 일에 대한 자부심도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저희가 거짓으로 든 체하기를 원하십니까? 속이 텅 빈 채로 화려한 겉모습만 만들기 원하십니까?" 나는 가슴을 쳤다 "지금 위원님들은 권력을 가지고 우리 선발에 개입하고 계십니다. 조직의 이익에 맞춰서 저희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계십니다. 선발 결과가 어떻게 정해졌든 이제 와서 위원님들 관심만을 가장 큰 잣대로 삼겠다. 이전에 측정한 것들은 필요가 없다. 그런 말씀이잖습니까? 저는 더 이상 못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p.388
나는 승자가 아니라도 좋았다. 승자보다 더 승자다운 것. 승자의 됨됨이를 지니는 것, 그래서 미더움을 주고 소박한 정을 나누는 것이 더 소중했다.
p.394
'초여름 비가 오고 나면 버섯 남매가 길가에 불쑥 솟아난 것을 보세요. 나는 평생 이것이 신기했어요. 놀라운 것이 바로 여기에 있잖아요. 가녀리고 보잘것없는 것들. 하지만 사랑스러운 것들....... 이것들을 보듬어 안는 마음이 되면 어떨까요? 삶은 큰 것만 올려다보는 사람을 속이지만 작게 오므라들려는 사람의 등은 두드려주지요. .......'
p.419
그에게는 그런 힘이 나타나요. 끌어안거나 품어주는 힘이요. 중력 같은 힘 말이에요. 늘 그런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차츰차츰 강해졌어요. 우리는 그런 힘이 너무 없는 곳에서 살고 있잖아요. ... 밀치는 힘, 내쫓는 힘, 책임지지 않는 힘...... 그런 게 많잖아요. 하지만 그는 다른 힘을 보여줄 때가 있었어요. 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 밤은 그렇게 지나갔어요. 우리는 무중력에서 오래 살 수가 없어요. 지상으로 돌아와야 해요. 제 생각은 평범해지겠다는 것이에요. ... 우리는 평범했지만 앞날로 나아가는 이런 팀워크를 통해서 비범한 데까지 갈 수 있는 거예요. 우리는 한때 대단한 것처럼 주목받을 수는 있지만 비범한 듯이 오래 남을 수는 없어요. 때가 되면 평범으로 돌아와야 해요. ..... 그러려면 연민을 지녀야 해요. 간발의 차이로 저의 뒤에 서야 했던 사람들에게...... 그들은 더 헌신적이어서, 그리고 어쩌면 운이 없어서 뒤에 섰을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는 다들 발사장에서 불운의 질투를 피하려고 얼마나 노심초사하는지 이미 지켜봤잖아요. 제가 그런 마음일 때 설령 모나고 모자란 곳이 있어도 남들이 보살펴주려고 하지 않겠어요? 이것이 제가 이진우라는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에요.
p.424-425
정우성이 페이스 북에 이런 글을 쓴 것이 기억난다.
"태양의 그 모든 불꽃들을 뭉쳐서 둥근 공으로 빛나게 하는 힘이 바로 중력이다. 태양처럼 행성을 데리고 홀로 사는 별도 있지만 별 두 개나 세 개가 중력으로 묶여서 쌍둥이나 남매들처럼 사는 경우도 있다. 서로 늘 힘을 미치면서. 이 모두에게는 중력이 삶의 조건이고 운명이다. 별들이 생겨나고 자라나고 무너지는 생로병사를 중력이 다 맡아서 다투는 것이다.
사람도 너와 나, 우리는 무게 없이는 살 수가 없고 무게가 있는 곳에는 중력이 있다. 중력은 바람과 강, 밀물을 당길 때는 공평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갈 때는 오로지 개별적일 뿐이다. 버릴 과거는 없다. 아무도 모르니까. 피할 미래도 없다. 씨앗이 움트고 있으니까. 운명을 사랑해라. 그리고 가능성을 시험해봐라. 나아간 만큼 너의 인생이 된다. 다시 일어난 만큼 너는 강해진다. 그러니 반드시 생각해라.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너는 더 멀리 날아가야 한다고."
p.439-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