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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옳다 -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명 이상 모인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주로 남의 말을 듣는 편인데다 내향형인 나 같은 사람은 그 자리가 괴롭다. 그리고 나 자신이 사라진 투명 인간 같아 외로워진다. 남의 이야기를 듣다가 성의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맞장구쳐 주며 듣다 보면 내 에너지는 이미 소진되어버린다. 또 내가 들어주는 사람들은 내게 거의 질문하지 않는다. 만나서 기나긴 침묵을 견디다 못해 나는 또다시 먼저 질문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만다. 그리고 내 고갈된 에너지를 발견한 나는 후회한다. '왜들 자기밖에 모르지?'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그러다 읽은 이 책에서 상대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의 답을 찾았다.
단말기 확대, SNS의 사용으로 우린 서로에 대해 피상적인 단면만을 확인한다. 그리고 비교의식과 열등감에 좌절은 우리의 내면을 갉아먹는다.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너무나도 분주한 하루하루를 지내며 우리는 관계를 확대할 수는 있었으나 깊어지는 건 어려워졌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 증명'을 위해 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내가 말할 차례가 오길 기다리며 남의 말이 끝나길 기다린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기도 한다. 극단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비난을 쏟아붓거나, 어마어마한 인명피해를 감행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이와 달리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돌파구를 찾기 어렵거나 존재를 잃어버린 상황에서는 어떨까? 희망을 찾기를 실패한 이들은 우울함과 무기력에 빠진다. 한 개인으로 살다가 '엄마'로 위치가 달라진 출산 직후 엄마의 산후우울증이 그렇다. 한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산 가장의 인생에 남은 것이라곤 고독과 가난뿐인 어르신들의 우울함이 그렇다. 그런 감정을 아이를 낳고 나도 경험했다. 아이가 크고 나니 자연스레 회복은 됐다. '시간이 약!' 그 말은 맞았다. 하지만 상황이 변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시간이 약이 되기도 전에 극단적인 결론에 치달을 수도 있다. 그때는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내 일도 아니고, 내게는 아직 오지 않은 그 깊은 우울과 무기력에 대해, 겪는 이들에게 냉담해진다. 혹은 가까운 사이에선 뻔하디 뻔한 '괜찮아질 거야!'라는 위선의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스스로가 이겨내야지 어쩌겠나?' 싶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우리에게 저자는 우울과 무기력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병이 아니라 삶의 그 자체다!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수용해야 할 삶의 중요한 감정이다. 그와 함께 '우울증'이란 테두리에 가두고 명명하는 사회에 일침을 놓는다. 일방적이고 일반적으로 '우울증'으로 몰아붙이는 약 처방으로 자신의 의무는 다했다는 무책임한 태도를 지니는 현대 정신 의학계에 쓴소리를 내뱉는다. 너무 안일한 시각으로 '우울증'자체를 개인의 나약함으로 단정 지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나 자신 또한 우울함을 갖고 있던 것을 무작정 떨쳐버리려고만 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우울증을 의미 있는 대화와 생각으로 이끌어 줌으로 개인과 자신에 대해 근본적으로 알 수 있는 메시지로 본 저자의 시각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위와 같이 개인의 감정과 존중을 깊게 바라보면서 또 다른 방향으로 시선이 간다. 바로 '자녀'에게다. 훈계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체벌하던 모습을 나는 정당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그런 행동이 훈육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내 존재 확인 욕구가 반영된게 아닐까 돌아보았다. 아이 양육의 최선은 바른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생각에 아이의 행동만 지적하기에 급급했다. "엄마 미워!", "엄마는 내 이야기도 안 듣고!"라며 부르짖던 둘째의 얼굴이 떠오르며 아이의 감정은 바라봐 주지 않고, 그에 대한 지지조차 보내주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양육서를 보면서 참고해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했던 안도감은 이 책을 읽으면서 무너졌다. 내게는 몸에 밴 습관처럼 기존의 방식을 바꾸기 힘들지만, 이 책에서 다룬 것들이 아이를 대할 때마다 떠올라 내 행동을 다잡곤 한다.
'당신의 감정은 옳아요.라고 토닥이는 한 마디가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필요한가? 온전한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신이 혹은 내 자녀가 그럴만했다는 공감이 우리에게 얼마나 힘이 될까? 어르신들이 왜 태극기를 흔들기 위해 광장으로 나갔는지? 일베 사이트에서 누군가는 비상식적인 글을 올렸는지? 그는 그 많은 탑승객들을 죽음으로 몰았는지? 그들의 감정이 이 책을 읽으니 이해가 된다. 개인에게 어떠한 논리나 지식이 도움이 되지 않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누구나 감정은 옳고, 공감 받아야 마땅하다. 개개인이, 한 존재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된 책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저자의 말처럼) 그들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하겠지만 말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을 이야기함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개인에게 공감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깊이 알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가 서로를 지지하고 공감하며 끊임없이 받아줄 여유가 어느 정도일까? 가족이나 마음을 놓을 친구가 없는 이들에게 이 사실은 꼭 이와 같지 않을까? 내가 배가 고파서 빵을 먹으면 된다는 걸 아는데, 돈이 없는 것과 같은 상황말이다. 그래서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어찌하지 못한 채 이 책을 덮었다. 내용이 너무 좋고 도움이 되었음에도 뭔가 마냥 좋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자기성(自己性)이 소거된 채 부모의 기대나 사회적 역할, 가치 등에 전적으로 기대어 살아가던 사람은 절대적 의존 대상이던 그 부모나 배우자와 이별하거나 절대적인 내 역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일이 없어지거나 그 가치가 빛을 잃을 때 광활 발작을 경험할 수 있다. 예견된 수순이다.
p.40
젊든 늙든 우리가 왜 이렇게 아픈지 이젠 알 것 같다. 자기 존재에 주목을 받은 이후부터가 제대로 된 내 삶의 시작이다. 거기서부터 건강한 일상이 시작된다. 노인도 그렇고 청년이나 아이들도 그렇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p.47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너는 옳다’는 존재에 대한 수용을 건너뛴 객관적인 조언이나 도움은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는 일처럼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p.59
... 그런 감정들을 떠올리고 얘기할 수 있다면 그것이 존재 자체에 대한 얘기다. 내 상처의 내용보다 내 상처에 대한 내 태도와 느낌이 내 존재의 이야기다. 내 상처가 ‘나’가 아니라 내 상처에 대한 나의 느낌과 태도가 더 ‘나’라는 말이다.
p.105
언제나 나를 놓쳐선 안 된다. 언제나 내가 먼저다. 그게 공감의 중요한 성공 비결이다. 공감하는 일은 응급실 당직 의사처럼 상대에게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다. 의무가 되면 결국 내가 먼저 나가떨어진다.
너를 공감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이 나에게 집중하고 나를 공감하는 일이다. 대개는 여기서 걸려 넘어져 공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람 구하는 일에 결정적으로 실패한다. 상대에게 더 집중하려고 자기감정은 누르고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감정 노동에 시달리다가 결국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p.120
감정과 정서가 개입된 주제에서 논쟁으로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고 설득시켜 내 관점이나 의견을 수용하게 만들긴 어렵다. 그건 고속도로 운전법의 논리다. 여긴 포장도로다. 논쟁과 설득으로 사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여기서 토론이나 논쟁은 오히려 상대방이 자기 마음을 더 강하게 닫게 만들 뿐이다.
p.134
공감은 누군가의 불어난 재산, 올라간 직급, 새로 딴 학위나 상장처럼 그의 외형적 변화에 대한 인정이나 언급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그 사람 자체, 그의 애쓴 시간이나 마음 씀에 대한 반응이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인정받고 보상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 사람은 그런 외형에 덜 휘둘리며 살 수 있게 된다. 공감은 쓰러지는 사람을 일으켜 세울 만큼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힘은 그가 고요하게 가만히 있어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자기 자신만으로도 초조하지 않을 수 있는 차돌 같은 안정감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공감의 힘은 그렇게 입체적이다.
p.143
어떤 이의 생각, 판단, 행동이 아무리 잘못됐어도 그의 마음에 대해 누군가 묻고 궁금해한다면 복잡하게 꼬인 상황이 놀랄 만큼 쉽게 풀린다. 자기 마음이 공감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기가 감당해야 할 몫이나 대가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기꺼이 진다. 자기 마음이 온전히 수용되었다는 느낌 때문이다. 억울함이 풀려서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항상 옳다'는 명제는 언제나 옳다.
p.161-162
사람의 감정은 항상 옳다. 사람을 죽이거나 부수고 싶어도 그 마음은 옳다. 그 마음이 옳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기만 하면 부술 마음도, 죽이고 싶은 마음도 없어진다. 비로소 분노의 지옥에서 빠져나온다.
p.167
공감은 상대를 공감 '해주는'일이 아니다. 내 상처가 공감 받는 것에 예민하지 못하면 공감하는 일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기 어렵다. 나와 너, 양방을 공감하지 못하면 어느 일방의 공감도 불가능한 것이 공감의 오묘한 팩트다. 그래서 공감은 너도 살리고 나도 구한다. 그래서 공감은 치유의 온전한 결정체다. 이 온전함의 토대는 오로지 자기 보호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되고 유지되면 자기 보호는 자기 경계에 대한 민감성에서 시작된다.
p.187
우리 모두는 자기 보호를 잘해야만 다른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상처 입은 존재들이다. 예외가 없다. 공감자의 자격을 결정하는 기준을 내게 묻는다면 단연코 자기 보호에 대한 민감함이라고 말할 것이다.
어떤 기간 동안, 어떤 특정 맥락과 상황 속에서는 내가 참고 견딜 수 있지만 나는 항상 그래야 하는 존재,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는 자기에 대한 감각이 살아 이어야 공감자가 될 수 있다. 나와 너를 동시에 공감하는 일은 양립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와 너 모두에 대한 공감'의 줄임말이 '공감'이다.
p.191-192
관계에서의 상처는 경계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얘는 딱 자기 아빠야, 얘는 딱 어릴 적 나야, 얘는 나랑 정반대야"와 같은 말들은 내 아이를 부모와의 연결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내가 아닌 너'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다. 자식을 바라보는 게으른 시선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이런 게으른 시각은 큰 둑의 작은 구멍이다. 결국 둑 전체를 무너뜨린다.
p.198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 관계가 기쁨과 즐거움이거나 배움과 성숙, 성찰의 기회일 때다. 그것이 관계의 본질이다. 끊임없는 자기학대와 자기혐오로 채워진 관계에서 배움과 성숙은 불가능하다. 자기 학대와 자기혐오가 커질 수밖에 없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 끊어야 한다.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면 끊어야만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관계들이 의외로 많다. 관계를 끊으면 그때서야 상대방도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최소한의 계기가 만들어진다. 그런 계기로 삼지 못해서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되어도 그건 그의 몫이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p.204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는 건 좋은 일인가. 좋을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얼마든지 있다. 때론 위험하기도 하다. 긍정적 감정은 자기 합리화와 기만이 만들어내는 결과일 때도 있고 자기 성찰의 부재를 뜻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성찰이 깊고 스스로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면 불안하고 흔들리게 된다. 상황을 더 깊고 입체적으로 보는 과정에서 만나는 불안은 불가피한 것이다. 깊은 성찰은 여러 갈래의 길과 전망을 보여준다. 복잡한 갈래 길들을 바라보며 인정하고 통합하는 과정은 불안을 전제로 진행되는 것이다.
p.217
감정은 판단과 평가,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내 존재의 상태에 대한 자연스러운 신호다. 좋은 감정이든 부정적 감정이든 내 감정은 항상 옳다.
p.219
사람은 옳은 말로 인해 도움을 받지 않는다. 자기모순을 안고 씨름하며 그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이해와 공감을 받는 경험을 한 사람이 갖게 되는 여유와 너그러움, 공감력 그 자체가 스스로를 돕고 결국 자기를 구한다.
p.239
'우리'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구두 위에서 간지러운 발가락을 긁는 행위다. 내 마음, 내 느낌 등 고유하고 개별적인 존재로서 내 육성에 접근해 가는 것이 제대로 된 관계의 시작점이고 그게 바로 공감이다. 다양하게 깎인 수많은 입체적인 면면들 때문에 빛이 드는 방향에 따라 빛깔과 분위기가 달라지는 예각의 크리스탈 조각 같은 존재가 사람이다. 그런 존재를 집단적 정체성이라는 둔각으로 뭉개는 일은 자신에 대한 폭력인 동시에 자기 은폐나 억압, 사람이란 존재에 대한 무지다.
p.249
... 공감은 똑같이 느끼는 상태가 아니라 상대가 가지는 감정이나 느낌이 그럴 수 있겠다고 기꺼이 수용되고 이해되는 상태다. 그 상태가 되면 상대방 감정결에 바짝 다가가서 그 느낌을 더 잘 알고 끄덕이게 된다. 상대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상관없다.
p.268
타인을 공감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을 공감하는 일이다. 자신이 공감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공감하는 일은 감정 노동이든 공감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를 공감하는 일은 시늉할 수 없다. 남들은 몰라도 자기를 속일 방법은 없다.
p.274
'나는 아이가 여섯 살일 때도, 열일곱 살일 때도 애가 힘든 얘기를 하면 옳고 그름을 먼저 가리고 그다음에 다른 사람 입장을 말해주고 난 후 아이에게 "왜 그런 일이 있었니?"라고 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타이밍이 다 지난 다음에 아이 마음을 물었던 거다. 아이는 참다 참다 어렵게 엄마한테 말을 꺼낸 건데도 그랬다.
내가 엄마라서 나에게 SOS를 보낸 건데, 다정한 엄마면 족한 건데 나는 결과만 가지고 '그러면 안 되고 바르게 커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부터 챙겼다. 뒤늦은 깨달음이지만 나는 훈육이 교육이라고 알고 살았다. 다른 사람들한테 욕 안 먹고, 잘 키우려는 마음이 늘 먼저였다. 타이밍이 있는 건데, 그 타이밍을 놓치면 죽을 수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가 살아준 게 되게 고맙다. 다음 일은 다음에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p.303
나만 여러 생각과 걱정을 한다고 여긴다면 아이를 한 개별적 존재로 바라보지 않아서다. 나도 생각하고 아이도 생각한다. 아이도 나와 같은 한 개별적 존재다. 남편에게 하는 하얀 거짓말은 그닥 염려를 하지 않으면서 아이에겐 강박적으로 거짓말을 절제하는 건 아이를 가르침의 대상으로만 여겨서다. 아이는 내가 가르치지 않으면 모른다고 믿고 있어서다.
p.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