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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독서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평점 :

저자가 쓴 책 <미스 함무라비>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고 유익하게 봤다. 글이 논리적이고 내용이 참신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게 해서 이 저자의 책은 다 읽어보고 싶었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지?'라는 궁금증은 이 책으로 풀렸다. 역시나 오랜 독서광이셨다. 그것도 아주 똑똑한. 그의 유려한 글과 깊은 생각은 단시간에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이 책은 어릴 적부터 책을 읽기 시작한 계기부터 과정들을 정직하게 담아내었다. 판사라는 저자의 직업에서 진지함과 무게감을 무시할 수 없지만, 이 책은 그에 비하면 가뿐하게 느껴진다. 야한 소설을 위해 한국소설을 잔뜩 찾아 읽고 <슬램덩크> 만화부터 무협소설까지 섭렵하는 모습에서 친근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저자는 자신이 독서를 하게 된 계기가 불순하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거기서 읽는 재미를 느끼고 생각이 꼬리를 물기도 하며 책에서 여러 경험과 글의 매력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 당시도 책을 읽는 분위기가 전반적이진 않았겠지만, 저자가 책이 많은 친구를 둬 그 집에서 읽고, 도서관을 찾아가고 관심분야를 좇아 다시 책을 찾게 되는 등 독서를 좋아하게 된 과정을 보면 참 이상적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책을 읽으면 권수를 의식하게 되고, 필독서는 반드시 읽어야 하며, 책에서는 반드시 어떤 깨달음을 끄집어내야 한다는 압박을 묘하게 받는다. 아이들에게는 어릴 적부터 책을 읽지 않으면 독해력이 딸리고, 공부에 지장이 있으며 수능의 지문을 빠르게 읽기 위해 독서습관을 갖추어야 한다고 밀어붙인다. 흥미와 생활의 활력이 되어야 할 책 읽기는 그렇게 자체가 목적이 아닌 학습을 위한 무언가 목표를 위한 도구가 되어간다. 책이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 책에 한 번이라도 다가가는 계기가 된다는데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독서교육을 강조하는 나라에서 정작 성인의 1년간 평균 독서량은 9.9권이라는 게 씁쓸하다. 많은 이들이 책에서 스스로 재미를 찾고, 궁금증을 유발하여 책에 가까워지는 자발적인 환경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 독서 습관, 행동, 선호하는 저자 등 책과 관련한 많은 이야기들을 다루었다. 공감이 가는 내용이 많아 '그렇지!'를 연발했다. 특히 김영하 작가를 설명한 부분은 적절한 키워드로 작가의 글과 특성을 잘 표현해 애 내가 김영하 작가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는지 저자의 글을 통해 깨달았다. 아주 명쾌했다.
독서에서 잘 다뤄지는 카프카의 책을 '도끼'로 표현하는 부분을 보고는 보통 '아! 그렇지! 책은 우리의 뇌를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지!라고 공감하며 책에서 도끼처럼 머리를 친 순간을 겪지 못한 자신을 자책한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알았다 뜻이 저자는 가볍게 한마디 한다. 책은 땅콩이 될 수도 있고, 수면제가 될 수도 있다고.
이 책이 인간적이고 솔직한 이 책은 좋기도 했지만, 이 전에 본 책에서 받은 인상을 기대한 나로는 초반에 살짝 당황했다. 혹시 나와 같은 분이 계시다면 후반부 3장 '계속 읽어보겠습니다'까지 계속 읽어보길 바란다. 사회적인 문제(교화, 법조인의 책임감)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저자의 솔직하고 진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거의 마지막에 여행과 관련 인간의 가난, 고통과 행복을 다룬 부분은 우리의 이기적이고 냉소적인, 위선적인 부분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섣불리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우리의 표현이 조금은 신중하고 책임을 느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책 읽기가 취미로 습관으로 다져지고 있다는 데서 나는 내가 행복한 사람구나 싶었다. 이런 책 읽기의 행복을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데서 그리고 그런 책을 읽어서 감사했다. 무언가를 가르치려 드는 책이 아니라 우리의 책 읽기를 격려하며 거기서 즐거움을 느끼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독자, 그와 우리의 모습에 그저 흐뭇함을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제목 참 잘 지었다! 그래 그 제목과 같이 책 읽기는 유쾌하고 즐겁다.
.. 호르몬 과잉 사춘기 소년은 불순한 동기로 어른 책들을 마구잡이로 읽어댔지만, 그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체득하는 것들이 있더란 말이다. 우리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처절한 가난의 고통,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 작가마다 다른 문체의 매력, 이야기 흡인력, 글의 맛과 멋.
p.51
나는 왠지 김연수 하면 동시에 김영하가 같이 떠오른다. 아까 '고양잇과의 글'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김연수가 수줍고 순둥순둥한 고양이 느낌이 강하다면 김영하는 성격 나쁘고 까칠한 고양이 같아서 매력 있다. 김영하의 글은 감성 광이라고는 '1도 없는' 쌀쌀맞음과 감탄스러울 정도의 이지적인 매력이 특징이다. 특히 뭔가의 핵심을 논리적이고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이 대단하다. 대치동에서 학원 강사를 했으면 일타 강사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알쓸신잡>을 봐도 내로라는 말발의 선수들 사이에서 가장 군더더기 없이 핵심을 유려하게 이야기하는 건 김영하더라.
p.56
..독서도 이런 독서도 있고, 저런 독서도 있는 거다. 카프카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쳐서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책을 읽는 거냐며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된다고 일갈했지만, 수사법은 수사법일 뿐, 책은 도끼일 수도 있고 심심풀이 땅콩일 수도 있고 잠을 재워주는 수면제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책마다 사람마다 다양한 용법이기 마련이다.
p.84
...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특별한 존재이길 원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무수히 자신이 얼마나 별 볼 일 없고 뻔한 존재인지 자각하게 되는 순간을 맞게 된다. 시험에 붙고 떨어지고 하는 문제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속물, 근성, 이기심, 뻔뻔함, 냉정함, 남들 안 보는 데서 저지르는 실수들 ...... 자기혐오에 빠지게 만드는 자신의 민낯은 언제나 내 뒤를 쫓아온다. 외면해도 소용없다.
p.113
유시민 작가가 자신을 '지식 소매상'이라고 규정하는데, 좋은 표현인 것 같다. 왜 소비자들이 직접 도매상, 심지어 공장까지 가서 자기한테 맞지도 않는 물건을 떼와야 하나? 내 아이 밥상에 맛있는 고기 한 점을 올리기 위해 직접 도축장에서 고기를 해체해야 되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원전 목록이 아니라 그중 필요한 것들을 알기 쉽게, 하지만 왜곡하지 않으면서 성실하게 설명해주는 지식 소매상들의 목록이다. 소매상일수록 사기꾼도 많기 때문에 잘 골라야 하고, 시장의 자정 능력도 필요하긴 하다. 그렇다고 소매상은 미덥지 않으니 소비자들이 직접 원산지를 찾아가야 한다는 건 무리한 이야기다.
p.169
..책은 수용하는 속도를 내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자극받는다. 내 경우, 좋은 책을 읽을 때면 머릿속에서 끝도 없이 꼬리를 물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읽다 멈추기를 반복하게 된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발견하면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귀퉁이를 접기도 한다. 지나고 보면 바로 이 멈추었던 순간들이 독서 경험의 핵심이다. 수동적으로 내 감각 속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고 마는 것들은 흔적을 남기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잠시 멈추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은 내 것이 된다.
p.174-175
"수많은 죄수들이 결국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 될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죄수가 여러분 옆에 살길 원하십니까?(...) 여러분에겐 그들이 좋은 혹은 나쁜 이웃이 되도록 도와줄 힘이 있습니다. 교육만이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과학입니다." <래리 뉴턴 에세이 中>
그렇다. 죄수들 중 대부분은 결국 사회로,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그들을 모두 사형시키거나 무기 복역시키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이 점을 쉽게 잊곤 한다. 그래서 범죄자들에게 어떤 고통을 가해야 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고, 이들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일 때가 많다. 범죄자들은 선천적으로 위험한 괴물이고, 장기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물론 그런 경우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모든 범죄자가 구제불능의 괴물일까.
p.20-202
... '미래에 우리는 무슨 일을 하지?'라는 질문만 하지 말고 '그런데 우리는 꼭 일을 해야 되나? 그런데 일이라는 게 뭐지?'라는 질문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왜 기계에게 일을 빼앗기는 상상만 할 뿐 기계에게 일을 시키고 우리는 노는 상상은 하지 못할까.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시대에 우리가 '일'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과거 시대 사람들 눈에는 그냥 쓸데없는 놀이나 미친 짓일뿐일 거다. 혀와 배꼽에 피어싱해주는 직업, 프로 스케이트 보더, 먹방 찍어 돈 버는 유투버들, 주기적으로 돌고 도는 유행의 패션 산업 ...... 인간이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쓸데없는 유희의 축적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내곤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여전히 동굴 생활에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른다. 쾌락은 우리를 단조로운 동굴에서 끌어내어 새로운 모험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쾌락의 카탈로그를 늘리고 늘리며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상상력도 재미도 없는 성공충들의 권력은 오래가지 않는다. 결국에 즐기는 자들이 이길 것이다.
p.228
... 가난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힘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구조적인 가난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답이 없는 질문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책은 구조의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개별적인 삶의 행복과 불행은 책이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다. 책도 무력한 순간이 있는 것이다. 삶은 언제나 책보다 크다. 나는 버려진 시신이 타고 있는 바라나시의 강변에 앉아 내 법정에서 만난 이들을 생각했고, 언젠가 호주에서 만났던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에서 온 가족의 불행을 생각했다. 여행지에서 또 다른 여행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세상은 원리적으로 불공평하지만, 고통만큼은 냉정할 만큼 평등하게 개개인의 삶을 찾아온다. 그걸 감히 위안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건 단지 아무도 타인의 삶을 함부로 동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일뿐이다.
p.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