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는 이 우화를 듣고 한없이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이 얘기는 비유경譬喩經이라는 불경에 나오는 얘기다. 그 나그네는 우리 인간을 뜻한다. 한 마리의 미친 코끼리는 무상의 바람, 흐르는 시간이다. 우물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다. 우물 속의 큰 뱀은 죽음의 그늘이다. 그리고 네 마리의 독사는 사람의 육체를 이루고 있다는 네 가지 원소, 곧 지, 수, 화, 풍을 말한다.
한편 넝쿨은 사람의 생명을 상징한다.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이다. 다섯 방울의 벌꿀은 오욕이 된다. 사람이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상한 것인지를 이 우화처럼 잘 말해주고 있는 것도 드물다. 톨스토이는 물론 비유경을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톨스토이는 이 우화를 듣고 한없이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이 얘기는 비유경譬喩經이라는 불경에 나오는 얘기다. 그 나그네는 우리 인간을 뜻한다. 한 마리의 미친 코끼리는 무상의 바람, 흐르는 시간이다. 우물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다. 우물 속의 큰 뱀은 죽음의 그늘이다. 그리고 네 마리의 독사는 사람의 육체를 이루고 있다는 네 가지 원소, 곧 지, 수, 화, 풍을 말한다.
한편 넝쿨은 사람의 생명을 상징한다.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이다. 다섯 방울의 벌꿀은 오욕이 된다. 사람이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상한 것인지를 이 우화처럼 잘 말해주고 있는 것도 드물다. 톨스토이는 물론 비유경을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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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을 증거해줄 시집들이 숱하게 있지만 그중에서도 김정란 시인의 『다시 시작하는 나비』라는 시집은 닳고 닳도록 보았다. "나는 금이 간 영혼을 사랑해." 같은 문장 앞에서 내 영혼이 어서 금이 가버리길 기도하던 밤들이 있었다.
 
열아홉 살이던 2001년. 창작과비평사 온라인 게시판에 박남철 시인의 소위 ‘욕시’가 올라왔다. 김정란 시인을 두고 "암똥개", "열린 ××와 그 적들", "벌린 ×" 등 온갖 욕설이 난무하는 시.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정말 영혼에 금이라도 간 것처럼 말 비린내가 진동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궁금했다. 무슨 엄청난 일이 있었던 걸까. 도대체 얼마나 괴물 같은 짓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모욕과 굴욕의 시를 쓰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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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이러했다. 한 술자리에서 막 등단한 여성 시인이 박남철 시인으로부터 성희롱과 구타를 당한 것. 그 뒤로 박남철 시인에 대한 폭로가 계속되었다. 성폭행당할 뻔했다는 잡지사 편집자, 학생 등의 고백이 이어졌다. 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박남철 대책위’가 구성되었고 그 안에 김정란 시인이 있었다. 아, 그래서. 아, 그런데 이렇게까지. 아, 이게 뭐지. 뭔가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그 뒤 펼쳐진 상황. 박남철 시인을 비판한 논객 진중권은 모욕죄로 200만 원 벌금을 선고받았고, 한 문예지는 문제의 그 ‘욕시’를 버젓이 게재했다. 한 평론가는 박남철 시인을 한국 최고의 시인이라며 두둔했고, 대다수 문인과 문학 출판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페니스 파시즘』이라는 책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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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아줌마’,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이 아닌 사람, 식민지 사람은 이중 메시지 상황에서 늘 자기를 설명하라는 요구에 시달린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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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통한 인식으로 보는 주체와 보이는 레퍼런트는 같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에도 낯설어 했던 거 같다.
거울상 이성질체가 제일 먼저 떠올랐고 시선으로 인식할 수 있는 건 극히 제한적인 이미지일 뿐이다. 그건 내가 불완전한 시각을 갖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서구든 우리나라에서 사용했던 강가의 수면이나 청동거울 같은 것은 뿌옇게 대상이 비치는 물건에 불과했다. 벽에 비친 그림자만큼이나 부정확하다. 그래서 자기인식의 초기단계로 인식이 되긴 했겠지만 그보단 가상, 이데아, 이미지를 인식하는 도구가 돼 오지 않았을까. 오히려 ‘나’라는 존재의 인식은 거울의 외부에서 발달해왔다.
무슨말 하는진 알겠지만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아마 수업으로 들었으면 질문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철학수업, 문학수업, 여성학 수업에서 이런 나의 의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셨던 교수님들이 떠올라서 잠시 나는 또다시 스승을 만나는 인연의 운이 아주 좋았구나 생각한다. 특히 메데이아랑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가르쳐주신 분은 요즘도 가끔 생각한다. 정말 훌륭한 분이셨다. 내가 비난할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아주셨고 내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명쾌하게 설명해주셨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건강하게 듣지 못하는 강사/교수라면 나는 또 수강철회를 하겠지. ^^;

서구 철학 전통에서 거울은 자기 인식의 단계이자 도구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거울을 통한 인식은 착각에 불과하다. 자기 눈으로 자기를 본다?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이 같다면 자기 복제가 아닌가. 결국 자기 시력(視歷) 수준에서밖에 볼 수 없다. 보고 보이는 것으로부터 자유. 안다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과정에서의 관계성이다. 인간은 자기 외부의 타자를 통해서, 나와 다른 타인을 통해서,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부분적으로 자기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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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복제 부분 빼고 공감.

미당의 거울은 어설픈 흉내다. 나르시스의 거울, 바슐라르의 투명한 거울(90쪽)은 서구에도 없다. 거울의 위계는 곧 존재의 위계다. 녹슨 구리 거울, 감옥의 플라스틱 거울, 공중 화장실의 얼룩진 거울, 요철(凹凸) 렌즈……. 여성, 제3세계 민중, 주변인에게는 투명한 거울이 주어지지 않는다. 윤동주는 정확했다. "구리 거울은 욕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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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 분량이 잘 감이 안 온다. ;;; 몇그램 몇 미터짜리 실 몇볼 이게 익숙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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