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을 증거해줄 시집들이 숱하게 있지만 그중에서도 김정란 시인의 『다시 시작하는 나비』라는 시집은 닳고 닳도록 보았다. "나는 금이 간 영혼을 사랑해." 같은 문장 앞에서 내 영혼이 어서 금이 가버리길 기도하던 밤들이 있었다.
열아홉 살이던 2001년. 창작과비평사 온라인 게시판에 박남철 시인의 소위 ‘욕시’가 올라왔다. 김정란 시인을 두고 "암똥개", "열린 ××와 그 적들", "벌린 ×" 등 온갖 욕설이 난무하는 시.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정말 영혼에 금이라도 간 것처럼 말 비린내가 진동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궁금했다. 무슨 엄청난 일이 있었던 걸까. 도대체 얼마나 괴물 같은 짓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모욕과 굴욕의 시를 쓰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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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이러했다. 한 술자리에서 막 등단한 여성 시인이 박남철 시인으로부터 성희롱과 구타를 당한 것. 그 뒤로 박남철 시인에 대한 폭로가 계속되었다. 성폭행당할 뻔했다는 잡지사 편집자, 학생 등의 고백이 이어졌다. 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박남철 대책위’가 구성되었고 그 안에 김정란 시인이 있었다. 아, 그래서. 아, 그런데 이렇게까지. 아, 이게 뭐지. 뭔가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그 뒤 펼쳐진 상황. 박남철 시인을 비판한 논객 진중권은 모욕죄로 200만 원 벌금을 선고받았고, 한 문예지는 문제의 그 ‘욕시’를 버젓이 게재했다. 한 평론가는 박남철 시인을 한국 최고의 시인이라며 두둔했고, 대다수 문인과 문학 출판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페니스 파시즘』이라는 책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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