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통한 인식으로 보는 주체와 보이는 레퍼런트는 같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에도 낯설어 했던 거 같다.
거울상 이성질체가 제일 먼저 떠올랐고 시선으로 인식할 수 있는 건 극히 제한적인 이미지일 뿐이다. 그건 내가 불완전한 시각을 갖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서구든 우리나라에서 사용했던 강가의 수면이나 청동거울 같은 것은 뿌옇게 대상이 비치는 물건에 불과했다. 벽에 비친 그림자만큼이나 부정확하다. 그래서 자기인식의 초기단계로 인식이 되긴 했겠지만 그보단 가상, 이데아, 이미지를 인식하는 도구가 돼 오지 않았을까. 오히려 ‘나’라는 존재의 인식은 거울의 외부에서 발달해왔다.
무슨말 하는진 알겠지만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아마 수업으로 들었으면 질문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철학수업, 문학수업, 여성학 수업에서 이런 나의 의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셨던 교수님들이 떠올라서 잠시 나는 또다시 스승을 만나는 인연의 운이 아주 좋았구나 생각한다. 특히 메데이아랑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가르쳐주신 분은 요즘도 가끔 생각한다. 정말 훌륭한 분이셨다. 내가 비난할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아주셨고 내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명쾌하게 설명해주셨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건강하게 듣지 못하는 강사/교수라면 나는 또 수강철회를 하겠지. ^^;

서구 철학 전통에서 거울은 자기 인식의 단계이자 도구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거울을 통한 인식은 착각에 불과하다. 자기 눈으로 자기를 본다?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이 같다면 자기 복제가 아닌가. 결국 자기 시력(視歷) 수준에서밖에 볼 수 없다. 보고 보이는 것으로부터 자유. 안다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과정에서의 관계성이다. 인간은 자기 외부의 타자를 통해서, 나와 다른 타인을 통해서,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부분적으로 자기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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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복제 부분 빼고 공감.

미당의 거울은 어설픈 흉내다. 나르시스의 거울, 바슐라르의 투명한 거울(90쪽)은 서구에도 없다. 거울의 위계는 곧 존재의 위계다. 녹슨 구리 거울, 감옥의 플라스틱 거울, 공중 화장실의 얼룩진 거울, 요철(凹凸) 렌즈……. 여성, 제3세계 민중, 주변인에게는 투명한 거울이 주어지지 않는다. 윤동주는 정확했다. "구리 거울은 욕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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