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94>토지-박경리

시인 김구용(金丘庸)은 서울에 이괴(二怪)가 있으니, 북에는 박경리요 남에는 손창섭이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 괴란 범상치 않음이리라. 필자가 여기에 대구를 맞추어 본다면, 한국에 이대가(二大家)가 있으니, 남에는 박경리요 북에는 최인훈이다.

박경리는 통영, 최인훈은 회령이 고향인 두 사람은 반도의 남북 쪽 끝 태생이다. 두 사람의 문학은 모두 전쟁으로부터 발원해(박경리의 ‘시장과 전장’, 최인훈의 ‘광장’),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초극하는 문학(박경리의 ‘토지’, 최인훈의 ‘화두’)을 창조하려 했다.

박경리 선생은 지금 원주 근교에서 밭을 일구며 살고 있는데, 어느 산문에서 그 뜻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생은 ‘자투리 시간이 아니라 두루마리 같은 시간을 쓰고 싶었다’고 쓰고 있었다. 이 두루마리 같은 시간이라는 말은 박경리 문학의 본질에 관한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가로로 길게 이어 둘둘 말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이 두루마리는 시간의 연속성을 의미한다. 그는 단절 없이 이어진 이 시간과 초인간적인 의지로 ‘토지’를 썼다. 이것은 박경리 선생이 ‘토지’라는 이야기 속 시간으로 한국근대사라는 역사 속 시간에 맞서서 이를 초극하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도 아래서 써나간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장장 25년에 걸쳐 쓰인 장편 대하소설로 구한말로부터 해방기에 이르는 민족 수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인물의 이야기를 3만 장이 넘는 기다란 원고지 피륙 위에 수놓아 나간 대작이다. 이 속에는 신분이 다른 결혼을 한 서희와 길상이를 비롯해 숱한 인물 군상이 등장한다. 수많은 등장인물이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죽고 또 새로운 인물이 그 삶을 ‘반복’해 이어간다. 최근에 나온 ‘토지’와 관련한 한 논문은 “‘토지’의 놀라운 힘 가운데 하나가 끊임없는 등장인물을 증식해 내는 창조력”(김은경)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그들 자신이 타고난 운명과 맞싸우는 것이다. 실로 박경리 처럼 운명이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문제를 그토록 집요하게 다루어온 작가도 드물다. 그의 장편소설 가운데 일반에 널리 알려진 ‘시장과 전장’이나 ‘김약국의 딸들’ ‘파시’의 여성 주인공들은 모두 운명이라는 거대한 초인간적 힘 앞에서 서 있는 문제적 인간들이다.

‘토지’는 이러한 운명의 힘과 그것에 맞서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지극히 다채롭고 풍부하게 묘사해 나간다. 경상도 하동 평사리에 군림해 온 최참판댁의 혈육으로, 쓰러진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서희, 이 집안의 머슴 출신으로 서희와 결혼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등 변모를 거듭해 가는 길상, 소작인의 딸 용이와 무당의 딸 월선이, 서희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후 방황을 거듭해 가는 상현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의 형상은 조밀하게 직조된 커다란 피륙을 이룬다.

‘토지’는 식민지 시대를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그 심층적 의미는 특정한 시대와 공간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토지’는 인간에 의해 인간의 삶이 어디까지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는가 하는 한계를 시험하는 두루마리요 피륙이고 거대한 벽화인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 국어국문학과
 

(동아일보 05.03.31 - 05.07. 29 기획연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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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95>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과학고전’은 16∼17세기 ‘과학혁명’ 시기에 쏟아져 나온 과학의 원리와 기초를 제시한 다양한 과학자의 이야기다. 그 속에는 과학 ‘혁명’의 역사가 담겨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과학혁명의 서곡을 연 저술이다. 그는 이 책에서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씩 자전하며, 태양 주위를 1년에 한 번씩 공전하고, 지구 축이 회전한다는 3가지 운동을 지구에 부여했다. 케플러의 ‘신천문학’은 행성이 태양을 초점으로 하는 타원운동을 하며, 태양과 행성을 잇는 반경은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을 그리며 움직인다는 케플러의 1, 2법칙을 담고 있다.

갈릴레이는 1632년에 출판된 ‘두 세계에 관한 대화’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역학적으로 옹호했다. 이 책의 출판은 당시 가톨릭교회의 노여움을 샀고, 그 결과 갈릴레이는 1633년에 종교재판을 받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뒤에 종신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갈릴레이의 ‘새로운 두 과학’(1638)은 갈릴레이가 가택연금이 된 상태에서 자신의 역학적 논의를 집대성한 저술이다.

메르센은 페르마, 파스칼, 가상디, 데카르트와 같은 프랑스 과학자와 폭넓게 교류하던 프랑스 과학자이자 신학자였다. 당시 17세기 초엽에는 참된 지식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 극단적인 회의론이 팽배했으며, 메르센은 이에 맞서서 신학과 과학적 지식의 진실성을 옹호하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것이 바로 ‘과학의 진리’이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데카르트는 지식의 확실한 근거를 찾아 나섰던 사람이었다. 자연세계의 모든 현상이 물질(외연)과 운동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우주, 인간, 영혼을 설명하는 3부작 ‘세계’를 기획했고, 이를 1629년부터 저술하기 시작했다. 1633년 이후 데카르트는 철학적으로 확실한 인식의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했으며, 회의론의 방법을 도입해서 모든 것을 부정하는 철학적 방법론을 담은 ‘방법서설’을 1637년에 출판했다. 그의 ‘방법서설’은 독립된 저술로서가 아니라 ‘굴절광학’ ‘기하학’ ‘기상학’이라는 3권의 자연과학 소고와 함께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출판되었다.

과학혁명은 물리학과 천문학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는데, 영국의 생리학자이자 의사인 윌리엄 하비는 피가 인체를 순환한다는 새로운 이론을 주장했다. 그의 새로운 생리학 이론은 1628년에 출판된 ‘동물의 심장과 피의 운동에 대한 해부학적 논고’에 나와 있다.

과학혁명의 완성은 아이작 뉴턴에 의해 이루어졌다. 역학과 천체이론을 집대성한 ‘프린시피아’에서 뉴턴은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만유인력)을 도입해서 그 전에 알려졌던 수많은 지상, 천상의 현상을 설명했다. 1704년에 출간된 뉴턴의 ‘광학’은 어려운 수학을 적용했던 ‘프린시피아’와는 달리 실험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빛과 색깔의 성질을 탐구했는데, 이 책에서는 빛이 단색광의 혼합물이라는 그의 핵심적인 이론에 근거해서 회절, 복굴절과 같은 현상을 탐구하고 있다. 이러한 16∼17세기 ‘과학혁명’ 시기의 고전을 발췌해 하나의 책에 담은 ‘과학고전선집’은 올해 말이나 되어서야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올 예정이다. 한 권의 책이 아니라 각각의 고전을 구해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생명과학부
 

(동아일보 05.03.31 - 05.07. 29 기획연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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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96>율곡집(율곡문선)-이이

율곡 이이(李珥)는, 인간이란 욕구하는 존재라고 본다. 그런데 욕구하는 대상을 획득하려는 인간의 활동은 사회 성원 간의 경쟁과 충돌을 낳고 이는 결국 사회 전체의 혼란과 무질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 점에서 욕구의 충족을 위한 행위는, 개인의 차원에서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지만 사회의 차원에서 볼 때는 ‘악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이가 볼 때,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착하게 행동할 수 있는 여지란 거의 없다.

이에 대한 이이의 처방은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규범 체계인 예를 따르라는 것이다. 개인은 먼저 무조건 그리고 전면적으로 예를 수용해야 한다. 예에 비추어 자신의 욕구가 옳은 것으로 판정되면 욕구대로 행위하고, 그른 것으로 판정되면 욕구를 버리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사회가 개인을 감시하는 장치를 내면화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라고 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이의 철학은, 중국 선진 시대의 순자(荀子)와 송·명 대의 장횡거(張橫渠·본명 재·載), 나정암(羅整庵·본명 흠순·欽順) 등 기철학자의 견지를 잇는 것이기도 하다. 곧 이이는 성악설의 계보에 몸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이는 사회 성원 전체를 집단적으로 통제하는 처방도 생각한다. 흔히 ‘변통론’ 또는 ‘경장론’이라고 말하는 갖가지 사회 제도적 장치의 고안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이는 국가 운영에 참여하는 관료에게는 인격적 면모보다는 현실의 제도를 운영하고 개선하는 행정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견해는, 당시 서인이 취한 정치적인 입장에 대해 탄탄한 철학적 기초를 부여해 준 것이기도 하다. 양시양비론이라는 이이의 정치적 태도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모두 욕구하는 존재이므로, 달리 보면 인간은 어느 정도 이미 타락해 있다는 점에서 모두 동등하다.

마찬가지로 이이는 동인과 서인이라는 두 정파는 어느 한쪽이 옳고 다른 한쪽이 그른 것이 아니라, 양쪽이 모두 옳은 점도 있고 그른 점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동인과 서인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다툼은 국가의 운영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므로, 이들을 조정하여 화합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척의 국정 간여를 배제하자는 동인의 주장에 직면하여, 이이의 이 같은 주장은 상대적으로 명분에서 밀리는 서인의 견지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자주 들먹여지곤 하는 양시양비론을 실제 정치 현장에서 가장 먼저 전형적인 방식으로 구사했다는 점에서 이이는 양시양비론의 원조라고 할 만하다.

이이의 글은 거의 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7권으로 간행한 ‘국역 율곡전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이의 글을 가려 뽑은 선집은 대부분 사상전집류에 포함되어 있어 서점에서 구하기가 어렵다. 그중 일반 독자가 사 볼 수 있는 것으로, 내용이 비교적 충실한 번역본은 ‘한국의 유학사상’(삼성출판사·1997)이다. 이 책은 이황과 이이의 저술만을 뽑아 옮긴 것인데, 이이의 저술로는 ‘격몽요결’ ‘동호문답’ ‘천도책’ 등과 함께, 이이가 묵암 성혼(成渾)이나 사암 박순(朴淳)과 논쟁하면서 주고받은 편지, 이이가 국왕 선조에게 올린 ‘인심도심도설’ 그리고 ‘성학집요’의 서문 등을 수록하고 있다.


정원재 서울대 인문대·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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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97>체호프 희곡전집-안톤 체호프

서구의 근대 사실주의 연극이 출현한 지 한 세기를 넘긴 지금, 그 시대의 극작가 가운데 안톤 체호프의 희곡만큼 세계적으로 꾸준히 공연되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 입센, 스트린드베리, 하웁트만, 버나드 쇼 같은 쟁쟁한 거장이 근대 연극의 북두좌를 이뤘다면, 오늘날 체호프는 이들로부터 성큼 떨어져 북극성의 자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체호프는 모두 7편의 장막극과 10편의 단막극을 썼는데, 이 중에서 1896년부터 사망하기 바로 전 해인 1903년 사이에 쓰인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동산’ 등 ‘4대 장막극’이 가장 널리 읽히고 공연되는 희곡이다.

젊은 예술가의 열정과 사랑, 가슴 아픈 좌절을 그리고 있는 ‘갈매기’는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희곡이다. 이 작품은 1896년의 초연에서 대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2년 뒤 스타니슬라프스키라는 걸출한 연출가에 의해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획기적인 성공을 거둠으로써 체호프의 독특한 극작술이 본격적으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무대 커튼 위에 날개를 펼치고 있는 갈매기의 그림은 지금도 러시아 연극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바냐 아저씨’와 ‘세 자매’는 가슴속에는 고귀한 이상을 품었지만 현실의 질곡과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서 빛이 바래 가는 섬세한 영혼을 보여 준다. 실제로는 자신의 고향을 한 발짝도 떠나지 못하면서 항상 ‘모스크바로 가자!’고 읊조리는 세 자매의 모습이 안쓰럽지만 그것은 닿을 수 없는 낙원을 희구하며 현실을 견디어 내야 하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체호프는 서글픈 운명의 등장인물을 보여 주면서도 자신의 작품이 ‘희극’이라고 주장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작가의 주장에 명실 공히 부합하는 희곡은 마지막 장막극인 ‘벚꽃동산’이다. ‘벚꽃동산’의 낙천적인 옛 지주들은 자신들의 영지가 경매로 팔려나가는데도 소풍과 파티로 소일하며 과거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찬미한다. 19세기 말, 러시아의 역사적인 격변을 떠들썩한 시골 빚잔치의 풍경 속으로 담아낸 작가는, 무대를 텅 비워 놓고 벚나무 동산을 떠나간 자신의 주인공을 따라 그 다음 해에 이 세상을 떴다.

그의 희곡은 특별한 사건이 없이 일상의 저변에 흐르는 미묘한 심리의 흐름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행동이 없는 희곡’, 또는 ‘분위기의 희곡’으로도 불린다. 이 밖에도 등장인물 간의 의사소통의 단절, 빈번한 침묵, 다양하고 서정적인 음향 효과, 비극적 요소와 희극적 요소의 절묘한 결합 등등이 체호프 희곡의 중요한 특징으로 거론된다.

체호프는 단편소설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단편 작가로서의 체호프가 위대한 거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힐 수 있다면, 극작가로서의 체호프는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의 극작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체호프는 근대 이전의 극작술이 문학으로 성취할 수 있는 정점을 보여 주었으며, 현대 연극이 가야 할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이정표를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국내에 나와 있는 나름의 장단점을 갖고 있는 여러 종류의 번역서 가운데 ‘벚꽃동산’(오종우 번역)이 체호프 전공자의 번역이라는 점에서 눈에 띈다. ‘체호프 희곡전집’(이주영 번역)은 체호프의 모든 희곡을 담고 있다.


박현섭 서울대 교수 노어노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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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98>니코마코스 윤리학

인간이 영위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은 어떤 것일까? 행복을 누리는 삶이라고 한다면 일단은 수긍할 수 있겠다. 그러나 행복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해두지 않는 한 아직 알맹이 있는 답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선의 삶을 보장해주는 행복의 실질적인 내용에 대한 질문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가 제시한 답은 인간에게 주어진 역량을 최대한 계발하여 발휘할 수 있게끔 삶을 꾸민다면 그것이 곧 진정 행복한, 즉 최선의 삶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답 역시 인간에게 주어진 역량에 관한 설명이 따라주어야 만족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 바로 그에 관한 설명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핵심부분을 이루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관건이 되는 역량을 크게 지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 두 종류로 나누어 상론한다. 그는 삶의 방식으로서는 지적인 역량을 발휘하여 진리탐구에 몰두하는 관조적인 삶을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 때문에 그의 윤리관은 너무 주지(主知)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 비판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실천적 역량을 지적인 것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취급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실천적 역량이란 주어진 상황에 대하여 특정한 정서적 반응을 보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성향으로서 흔히 말하는 덕(德)과 같은 것이다. 가령 의로움, 너그러움, 우애, 용기, 절제 등이 그 예다. 이런 덕목이 결핍된 인간은 지적인 역량을 갖추더라도 심각하게 잘못된 인생을 살 가능성이 크다. 이 점을 잘알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실상 실천적인 덕에 관한 논의에 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아주 세심한 정성을 쏟는다.

각 덕목에 관한 그의 논의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논변의 정교함과 깊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철학적 분석의 뛰어난 모범으로 통용되고 있다. 각론뿐 아니라 덕 일반에 관한 총론적 논의에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 많다. 가령 정서적인 반응과 관련된 측면에서는 덕이 중용(中庸)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동양사상사에도 비슷한 이론이 있기에 비교연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대목이 특히 흥미로울 것이다.

또한 덕은 정서적 반응을 넘어 결국은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덕의 논의는 행위이론을 포함하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여는 기념비적인 것이다. 행위 일반의 구조와 그중에서도 윤리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행위의 특성에 관하여 그가 시도한 분석은 최초의 본격적인 행위이론이라 할 만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어떤 기발한 윤리교설을 창안해내서 열렬한 신봉자를 끌어 모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윤리문제에 관한 학문적인 논의의 기반이 되는 개념 틀을 차분하게 정리해서 마련해놓은 것이 그의 가장 큰 공로라고 할 수 있다. 그 개념 틀은 적어도 이 책이 쓰인 기원전 4세기부터 계속 서양 윤리학의 사상적 골격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서양 윤리사상사의 큰 흐름을 그 저류에까지 깊이 탐사하고자 하는 지적인 호기심을 가진 독자는 이 책을 재독, 삼독하면서 저자와 토론하기에 결코 싫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번역으로는 최명관 역(서광사)을 추천한다.


이태수 서울대 교수 철학과

(동아일보 05.03.31 - 05.07. 29 기획연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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