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88>오이디푸스 왕外-소포클레스등

그리스 비극은 세계 어디서든 ‘만년 히트작’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야말로 엽기적이다. 아버지를 때려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는 아들, 아들을 맨손으로 갈가리 찢어 죽이는 어머니 등 그리스 비극은 사회적 인습과 제도가 송두리째 파괴된 세계를 보여 준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인은 왜 이런 끔찍한 얘기를 즐겼을까? 이 모진 얘기들이 아직도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왜 그리스 비극인가?

그리스 비극은 페르시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잇달아 치르면서 ‘그리스의 기적’을 이룬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민주정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 아테네 디오니소스제에서 상연된 그리스 비극은 시민들이 서로 자신과 자기 사회에 대해 논하는 장이었다. 그러나 아테네인이 무대에 올려 함께 구경한 세계는 그들의 조국이 아닌 ‘타자’의 세계였다. 그리스 비극은 거의 모두 영웅시대를 배경으로, 다른 도시국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오이디푸스의 얘기는 테베, 오레스테스의 얘기는 아르고스, 메데이아의 얘기는 코린트에서 펼쳐진다. 타자의 비극적 세계는 아테네인에게 자기 문명의 우월성을 말해주는 동시에 조국을 잃으면 그들에게도 어떤 재난이 닥칠지 모른다고 경고했을 것이다. 결국 그리스 비극은 아테네인이 자신의 행운을 자축하고 바깥 세계의 야만적 어둠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다지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이 자기 찬양과 자기 무장만을 설교했다면 만년 히트작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스 비극의 위대함은 시민교육이라는 역사적 테두리를 벗어나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는 데 있다. 그리스 비극은 국가 수호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순간에도 국가주의의 모순을 폭로하며, 국가와 가족의 요구가 상충할 때 전자를 따르는 게 얼마나 어렵고 도덕적으로 위험한지 보여준다. ‘부동의 신념’이나 영웅주의에 감춰진 독선과 국가주의의 허구성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다. 이피게네이아가 아버지 아가멤논의 명예욕에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보면서 아테네 시민은 전쟁과 폭력이 애국심이나 희생의 논리로 둔갑하는 과정을 목도하고 영웅주의의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인 얼굴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우리가 당장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려 할 때조차 ‘나는 누구이며 인간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니체가 지적하듯 그리스 비극은 관중으로 하여금 인간이란 노쇠와 죽음의 운명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비이성적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임을 새삼 깨닫고 통곡하게 하는 통찰의 순간을 담는다. 이 순간을 통해 관중은 인간 존재의 진실과 대면하고, 그 대면의 고통을 받아들임으로써 필멸의 존재인 자신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 비극이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던지는 엄중한 질문인 ‘너는 누구인가’야말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이디푸스와 이피게네이아의 격렬한 비극이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들을 ‘통곡’의 순간으로 이끄는 이유라 해도 좋을 듯하다.

추천된 천병희 번역본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그리스 원전에 의거한 번역이지만, 아직 전작 번역이 끝나지 않았으며 이미 나온 번역도 원문에 충실하면서 우리글로서도 잘 읽히는지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린다.


이종숙 서울대 교수 영어영문학과

(동아일보 05.03.31 - 05.07. 29 기획연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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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90>미디어의 이해

저자 마셜 맥루한은 1960년대에 주목을 받기 시작한 캐나다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이다. 그 이론을 바탕으로 역사와 문명의 변화를 설명해 낸 중요한 현대 사상가이기도 하다. 고정관념을 뒤집는 새로운 발상법으로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역사의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설명하는 새로운 이론을 구축해 냈는데 ‘미디어의 이해’는 그 같은 미디어 결정론의 대표작이다.

1960년대 커뮤니케이션 연구에서는 사람을 설득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당연히 메시지의 힘이라고 보았다. 미디어는 그저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용기(用器)일 뿐. 그런데 맥루한은 세상을 바꾸는 것은 메시지가 아닌 미디어의 힘이라고 ‘어이없는’ 주장을 한 것이다. 쇠붙이 같은 물질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미디어가 어떻게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일까?

맥루한은 기술이 인간 몸의 다양한 기관과 기능의 연장(延長)이라는 지적에서 출발한다. 그 성능을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높여 주고 강화시켜 주는 것이 도구이며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술의 변화는 모든 사회적, 문화적 변동을 이끈다. 기술 중에서도 커뮤니케이션 미디어 기술은 인류 사회 변화의 지배적 요인이다. 왜 그런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는 인간의 감각기관의 연장이어서 세상을 지각하고 인식하는 방법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책은 시각의 연장이요, 라디오는 청각의 연장, TV는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을 동시에 연장시켜 주는 미디어이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지각한다. 그러므로 한 사회 혹은 한 시대가 지배적 의사소통 수단으로 어떤 미디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대상에 대한 지각이나 인식은 달라질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생각하는 체계, 사회관계, 문화도 바뀌게 된다.

예컨대 TV라는 전자 매체는 거의 모든 감각기관의 연장이어서 시각 위주였던 문자시대의 과도한 분석적 사고, 개인주의, 합리주의의 병폐에서 벗어나 총체적인 사고능력을 가진 균형 잡힌 인간형으로 유도한다. 게다가 우리의 감각기관을 즉각적인 주변 환경만이 아니라 전 세계, 우주 공간의 구석구석까지 연장시켜 주어 지구 차원의 연대의식이 가능한 지구촌 사회를 형성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미디어는 메시지이다.

TV 이후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인터넷, DVD, DMB, MP3 등 새로운 미디어는 과연 우리 자신과 역사와 문명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가? ‘미디어의 이해’에 이어서 맥루한의 사후에 발표된 ‘미디어의 법칙’이라는 책을 읽으면 그 답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 책의 핵심은 다음의 4가지 문제 풀이이다. 새 미디어가 확장시켜 주는 것은 무엇인가?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회복시켜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의 사용이 고도화되어 한계에 달할 때 어떤 반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지게 될 것인가? 이 두 책의 도움으로 새로운 미디어를 대입시켜 문제 풀이를 해 본다면 아마도 21세기가 어떤 역사를 만들어 나갈 것인지 맥루한식으로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박명진 서울대 교수 언론정보학과
(동아일보 05.03.31 - 05.07. 29 기획연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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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91>청구야담-작자미상

‘청구야담(靑邱野談)’은 1840년경에 편찬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문으로 된 이야기 모음집인데 편찬자는 미상이다. ‘청구야담’에 수록된 이야기는 총 270여 개이며, 이야기마다 일곱 자 내지 여덟 자의 운치 있는 제목이 붙어 있다. ‘청구야담’에 수록된 이야기는 비교적 길이가 짧다. 이런 짧은 이야기를 학문적으로는 ‘단형서사(短形敍事)’라고 부른다.

한국고전문학사에서 단형서사의 전통은 대단히 오래다. 고려 중엽에 일연(一然,)이 저술한 ‘삼국유사’라든가 조선 초기에 성현(成俔)이 저술한 ‘용재총화’ 같은 책은 모두 단형서사 모음집에 해당한다. ‘청구야담’은 이런 단형서사의 유구한 전통을 잇는 이야기 모음집이다.

그러나 ‘청구야담’은 조선 전기까지의 단형서사와는 질적 성격을 달리한다. 조선 전기까지의 단형서사는 대체로 편폭이 극히 짧고 서술이 단순하지만 ‘청구야담’의 이야기는 대체로 그 편폭이 훨씬 길며 서술 또한 자세하다. ‘청구야담’은 근대 이전 시기 한국 단형서사문학의 전개과정에서 그 대미를 장식한 책으로서, 한국 고전단형서사의 ‘완성’임과 동시에 최고의 성취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야담’이라는 말은 17세기 이후에 사용된 용어다. 그것은 주로 시정세계(市井世界)를 진원지로 하여 양반사회를 넘나들며 유포된 이야기가 한문으로 기록된 것을 일컫는 말인데, 일화 전설 민담 단편소설 등 다양한 갈래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야담’이라는 명칭이 책이름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초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다.

‘청구야담’은 ‘어우야담’ 이후 19세기 초반까지 창작된 여러 작가의 야담을 추려서 모아 놓은 일종의 ‘선집’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구야담’의 편찬자는 그 문학적 안목이 비상히 높아 비교적 문예성이 높은 야담만 선별해 이야기 하나하나에 일관된 방식으로 제목을 붙여 놓고 있다. 이 점에서 ‘청구야담’은 한국 야담문학의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고 평가된다.

‘청구야담’에 수록된 야담은 주로 조선 후기에 구연되던 이야기가 기록으로 정착된 관계로 이 시대의 분위기와 정조(情調)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청구야담’에 특징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사회상은 새로운 사회관계의 형성, 지배층 내부의 부패와 모순, 몰락양반의 비참한 현실, 신흥부자의 대두, 지배층에 대한 하층의 항거, 자유분방하고 생기발랄한 시정 풍속,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른 새로운 윤리관 및 가치관의 형성 등이다.

또 ‘청구야담’의 이야기는 대체로 도시적 분위기를 강하게 띠고 있다. 이는 대체로 도시 시정인들을 중심으로 구연되던 이야기가 정착된 데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청구야담’에는 여러 계층의 인물이 등장하며, 사실적인 이야기와 신비하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골고루 섞여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의 인간과 사회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100권의 역사책을 읽느니 ‘청구야담’ 1권을 읽는 것이 아마도 낫다고 생각한다.

‘청구야담’의 번역본으로는 이우성 임형택 두 분이 공역한 ‘이조한문단편집’이 신뢰할 만하다.


박희병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
(동아일보 05.03.31 - 05.07. 29 기획연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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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92>설국-가와바타 아스나리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는 전형적인 ‘일본 회귀’형 작가에 속한다. 일본 회귀란 처음에는 서양문학의 영향 아래 작품 활동을 하다가 나중에 일본 전통에 기초하는 작풍으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모더니즘 문학의 기수’ 가와바타는 ‘설국’을 계기로 전통 미학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이 소설은 무려 13년간의 개고를 통해 완결판이 나왔다. 마치 분재를 다듬는 정성으로 조탁한 일본어 표현은 당대 최고의 예술적 성취라는 평가를 받았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며 여행지에서 매력적인 두 명의 여성과 조우하는 시마무라는 무릇 남성의 꿈과 환상을 대신 구현하는 존재다. 산행 길에 우연히 찾아든 온천 마을에서 게이샤(藝者) 고마코를 만난 시마무라는 그녀의 청결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세 차례 방문하게 된다. 고마코도 시마무라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키워간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고마코의 사랑이 현실적인 크기로 다가왔을 때 시마무라는 온천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결국 시마무라가 추구한 것은 현실적인 사랑이 아닌 도회의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게 해 주는 감미로운 환상이었다.

이 소설은 중편 이상의 분량을 지녔지만 이렇다 할 만한 줄거리도 없다. 주제는 모호하고 인물의 성격도 뚜렷하지 않다. 주고받는 예사로운 대화를 통해 등장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수묵화의 여백을 감상하는 것 이상의 내공을 요한다. 이 정도면 “몇 번을 읽어봐도 잘 모르겠다”는 ‘용감한’ 고백이 일본인 독자 사이에서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는 가와바타의 노벨 문학상 수상연설 제목을 비아냥거리듯, 26년 후 같은 자리에서 ‘모호한 일본의 나’라는 제목의 수상연설을 한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도 분명 그러한 독자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연설 제목에 나오는 ‘아름답다’와 ‘모호하다’는 두 개의 형용사야말로 이 소설의 특징을 적확하게 짚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결여된 점이 적지 않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오랫동안 읽히는 이유는 작가의 섬세한 미의식과 감각적인 문체 때문일 것이다. 전편에 걸쳐 펼쳐지는 자연의 정경 묘사는 거의 시의 영역에 미쳐 있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밤하늘의 은하수에 대한 묘사는 그 정점을 보여준다. 등장인물 역시 자연의 한 부분이다. 작품 속에 그려지는 고마코와 요코는 자연과의 합일 속에서 신비로운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이 점에서 ‘설국’은 동양적 정신세계의 요체를 현대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게이샤, 온천, 후지산 등의 대상은 한두 세기 전부터 서양에서 일본에 대한 환영(幻影)을 만들어 내는 데 쓰인 대표적인 재료이다. 설국이 눈으로 인해 외부로부터 고립된 세계라면, 소설 ‘설국’은 고유의 풍토와 전통 그리고 번역을 완강히 거부하는 일본어 문체로 세계문학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설국’이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것은 비서구 세계를 ‘신비’의 영역에 가둬두고자 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설국’은 이른바 ‘일본적 미학’에 대한 신화를 추인(追認)하고, 나아가 그것을 범세계적으로 증폭시키는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다.


윤상인 한양대 교수 일본언어문화학부
 

(동아일보 05.03.31 - 05.07. 29 기획연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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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93>보조법어-지눌

세상이 어지럽고 잘못되어갈 때, 나서서 지혜로운 가르침을 주고 직접 실천하여 본보기를 보이는 이들이 있다. 고려 중기의 불교승려인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도 그런 이로 꼽힌다. 지눌은 한국 불교역사, 특히 한국 불교사상사에서 신라 때의 원효(元曉)와 함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추앙된다. 그의 글을 모아놓은 것이 ‘보조법어’다.

당시 고려사회는 민란이 거듭되고 무신정권이 등장하여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불교계에는 분열과 타락상이 심각했다. 지눌은 세속의 명리를 좇는 데에만 급급한 당시 불교계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수행을 하는 승려조차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된다는 불교 본령의 목표는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하고 기껏해야 내생에 좋게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데 대해서 비판을 가했다.

그러면서 정과 혜를 나란히 닦아 성불을 목표로 하는 수행에만 전념하자는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벌였다. 정이란 바깥의 자극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을 가라앉혀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혜는 맑은 정신으로 세상의 실상을 환히 비추어보는 지혜를 가리킨다. 지눌은 그 둘을 함께 닦는 수행을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이라 일컬었다. 이것이 지눌이 제시한 수증론(修證論·닦음과 깨달음에 관한 이론) 세 가지 가운데 첫 번째다.

지눌은 또한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이라는 수증론을 제시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님인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스스로 범부로 살고 있다는 게 선불교의 관점이다. 마치 열쇠를 손에 들고도 한참 찾아다니다가 어떤 계기에 문득 제 손에 든 열쇠를 알아차리듯이, 자기의 본래 정체를 알아차리는 깨달음은 단박에 일어난다. 이를 일컬어 돈오(頓悟)라 한다.

하지만 깨달음만으로 부처님으로 살게 되지는 않는다. 워낙 오랫동안 범부로 살아가는 습관에 속속들이 젖어있기 때문이다. 얼음이 본래는 물이라 해도, 얼음 그대로 물 노릇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이 물 노릇을 하게 하려면 열을 가하여 녹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치열한 수행과정으로 자신의 삶을 채워야 한다. 이를 일컬어 점수(漸修)라고 한다. 이는 수행과 깨달음에 관한 선종(禪宗)의 사상을 교종(敎宗)인 화엄사상을 가지고 설명한 것으로, 선교일치를 표방하여 당시 불교계의 분열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마지막으로, 지눌은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을 천명했다.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이 지름길이라는 뜻이다.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으로 자신의 의식을 꽉 채워 망념이 스며들 틈이 없게 하면, 그 의심덩어리가 커지다 못해 터져버리는 깨침의 체험에 이른다. 지눌을 통해 한국불교에 간화선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다.

“땅으로 인하여 넘어진 자는 땅으로 인하여 일어선다. 땅에 의지하지 않고 일어설 수는 없다.” 보조법어의 ‘권수정혜결사문’의 첫 구절이다. 우리가 잘못 살아가는 것은 마음을 잘못 써서 그런 것인데, 올바르게 되는 것 또한 바로 그 마음에 달렸다는 뜻이다. 궁극적인 해결은 저 밖 어디 다른 데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며, 모든 문제를 우리가 만들었고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해결책이 보인다는 교훈이다. 만사를 소유의 문제로만 보는 습관이 든 이 시대에 새삼 귀중하게 새겨볼 만한 가르침이다.


윤원철 서울대 교수 종교학과

(동아일보 05.03.31 - 05.07. 29 기획연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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