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52>황무지-TS 엘리엇

1922년에 발표된 엘리엇의 시 ‘황무지’는 20세기 현대 문명에 갇혀 생명의 기운을 잃은 서구인의 자화상이다. 20세기의 기술혁명을 바탕으로 치러진 1차 세계대전은 양측 군인 사상자만 3500만 명에 이르는 형언하기 어려운 아픔이었다. 죽음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죽음에 이르는 길은 얼마나 더 참혹하고 처절했던가?

작가는 시를 통해 스스로 만든 재앙의 굴레를 자신의 머리 위에 쓴 사람들의 죽은 영혼을 해부하고 있다. 누구일까? 그리고 무엇일까? 북러시아의 들쥐처럼 집단자살의 충동에 시달리며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문명으로의 길을 걷고 있는 그들은? 인간에게 내린 신의 축복, 문명을 생명이 깃들 수 없는 황무지로 만든 이의 정체는 무엇인가? 20세기 최대의 시인 엘리엇은 섬뜩한 이미지와 푸가풍의 반복적이고 다음성적인 리듬으로 끊임없이 이 물음을 곱씹고 있다.


황무지란 원래 생명이 서식할 수 없는 불모의 땅이지만, 이 시에서 황무지는 생명이 깃들 수 없는 문명을 뜻한다. 그렇다면 20세기 문명은 왜 생명을 잉태할 수도, 생명을 길러 낼 수도 없게 되었나? ‘세티리콘’에서 따온 이 시의 서시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는 열쇠다. 늙어 쪼그라들어 작은 병 속에 갇혀 추녀 끝에 매달려 살게 된 무녀 시빌에게 한 아이가 묻는다. “시빌, 너 무얼 원하니?” 시빌이 대답한다. “나는 죽고 싶어!”


아폴로 신은 무녀 시빌을 총애해 어느 날 소원을 하나 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시빌은 먼지 한 줌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먼지알만큼 많은 삶을 내게 주십시오.” 그녀는 젊음은 단 한 번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먼지알만큼 많은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무한히 오래 살고 싶었을 뿐, 젊음을 재창조하며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지 못한 시빌의 모습과, 그저 많은 문명의 이기는 원하지만 그곳에서 행복과 희열을 얻는 방법을 찾지 못하는 현대 서구인들의 모습은 너무나 똑같지 않은가?

20세기를 넘어서면서 맞닥뜨린 문명의 막다른 골목에서 엘리엇은 서구인의 삶에 서린 ‘무한한 늙음’과 ‘죽음만이 유일한 소망’이 되어 버린 깊은 절망을 보았다. 그러나 그를 더욱 절망하게 한 것은 그 절망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정신적 황폐함이었다.


시빌의 절망에는 아직 희망은 있다. 그녀는 죽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 뒤에는 재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절망에는 희망이 없다. 그 황폐한 정신을 가지고 죽음을 피해 다닐 뿐, 재생의 길을 걷지 않기 때문이다.
황무지에 등장하는 겨울에 따스함을 쫓아 남쪽으로 가는 유한계급의 사람, 종교적 신념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 문명의 값진 유산을 허식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상류계층 속물, 생명력의 원천으로서 성(性)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는 방탕한 여인, 상업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장사치, 구원의 기사를 유혹해 위험에 빠뜨리는 거리의 여인 등 수많은 인물은 모두 황폐한 정신을 지녔으면서도 그것으로 절망하지 않는, 정신적으로 죽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제목은 생명이 깃들 수 없는 황폐한 문명에 붙여진 것임과 동시에 젊음의 재창조가 없는 영겁의 삶에도 두려움을 갖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황폐한 정신에 붙여진 것이다.


신정현 서울대 교수 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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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53>신기관-프랜시스 베이컨

프랜시스 베이컨은 과거의 잘못된 과학을 비판하고 이러한 비판 위에 새로운 근대 과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던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였다.

베이컨은 1620년부터 자신의 새로운 학문체계를 집대성한 ‘대혁신’을 총 6부로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1605년 발표한 ‘학문의 진보’를 개작해서 ‘대혁신’의 1부로 편입시켰고, 제2부로 ‘신기관’을 저술했다. ‘신기관’은 베이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기관’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두고 쓴 야심작이었다.

베이컨이 근대 과학의 정신을 대표할 만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유는 그가 실험이라는 새로운 과학 방법론을 강조했으며, 결국 이러한 방법론이 정착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과학 방법론의 정수를 담고 있는 저작이 바로 ‘신기관’이다.

‘신기관’의 제1권은 삼단논법이 자연의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으로 부적절함을 강조하면서, 진정한 ‘자연에 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 ‘참된 귀납법’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베이컨은 인간 지식의 오류의 원천을 인간의 본성에서 유래한 종족의 우상, 편견에서 유래한 동굴의 우상, 언어와 의사소통에서 유래한 시장의 우상, 학파의 오류에서 유래한 극장의 우상이라는 4가지 우상으로 분류한 뒤에 이를 비판했다.

결국 베이컨에게 과학의 방법론의 핵심은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정적(靜的) 원리를 사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무엇에 의해 일어나고 있나라는 동적(動的)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별 사실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해야 하며, 이러한 광범위한 탐구는 실험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는데, 실험에 대한 강조는 베이컨이 생각했던 새로운 논리학의 정수였다.

베이컨 이전에는 실험이 자연을 교란시키기 때문에 진정한 과학의 방법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본심이나 지적 능력, 품고 있는 감정 등은 평상시보다는 교란되었을 때 훨씬 더 잘 드러난다”고 비유하면서, “마찬가지로 자연의 비밀도 제 스스로 진행되도록 방임했을 때보다는 인간이 기술로 조작을 가했을 때 그 정체가 훨씬 더 잘 드러난다”고 자연에 대한 조작을 정당화했다.

베이컨의 ‘신기관’은 근대 과학의 방법론은 물론 과학의 진보와 효용에 대한 믿음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책이다.  이 책은 17세기 과학혁명을 주도했던 과학자들에게 널리 읽혔고, 결국 영국의 ‘왕립협회’나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와 같은 새로운 과학단체들을 설립하고, 실험과학을 추동했던 동인이 되었다.

과학자들은 실험을 통해서 자연에 조작을 가하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법칙을 알 수 있다고 믿게 되었고, 이러한 실험을 위해서 공동연구를 해야 하며 더 나아가서 국가와 사회가 이러한 과학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참된 과학적 방법에 대한 확신, 과학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 진보에 대한 희망은 서구의 ‘근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며, 이는 베이컨의 ‘신기관’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생명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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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54>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하우저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선사시대부터 영화의 시대까지 서구 문학과 예술의 역사를 사회사적 관점에서 서술한 기념비적 저작으로, 문학 미술 음악 건축 영화 등 거의 모든 예술 장르를 망라하고 있다. 저자는 문학예술 작품이 한 시대의 생생한 산물이라는 것을 폭넓은 역사적 안목과 해박한 지식 그리고 탁월한 심미안으로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전공 분야와 관계없이 문학예술을 공부하려는 학생은 물론 소박한 감상자를 위해서도 이 책은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논할 때 제기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풍부한 해명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하나의 예술작품 또는 한 시대의 주도적 양식은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탄생하는가. 어떤 사회적 요인에 의해 양식의 변화와 교체가 이루어지는가. 서로 다른 예술 장르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예술작품과 수용자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가.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이 모든 변수가 어떻게 작품의 미적 특성으로 구현되는가.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저자는 다양한 시대와 장르를 가로지르며 독자의 사고를 자극한다.

이 책은 수천 년에 걸친 서구 문학예술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책의 바탕에 깔려 있는 방법론을 간단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저자의 기본 입장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짚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구석기 시대부터 중세까지로, 이 시기 예술의 기본 성격을 저자는 “실용적 목적과 미적 관심의 직접적 일치”로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예술이 추구하는 미적 가치는 자연의 지배나 종교적 제의 같은 예술 외적 목적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령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는 동물 사냥 장면을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수렵에 의존하던 원시 경제생활을 촉진하는 효과적 수단으로 기능했다. 중세 기독교 예술 역시 예술을 실용적 목적에 종속시킨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그 반면 르네상스 이래의 근대 예술은 차츰 그러한 실용적 목적에서 벗어나 나름의 자율성을 추구한다. 근대 예술의 자율성은 종교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동시에 인간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과 인간 보편적 가치의 추구가 이제는 예술의 몫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근대 예술의 자율성은 예술이 그 본연의 휴머니즘적 지향성을 회복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대 시민사회의 ‘합리화’(막스 베버) 과정과 더불어 사회가 다양한 영역으로 분화되고 자본과 권력의 전일적 지배가 강화되면서 다시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의 부정적 힘에 저항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해 근대 예술의 탄생 조건이었던 시민사회의 내적 모순에 대한 응전이 곧 현대 예술의 본령이 되는데, 저자는 인간 소외의 문제를 최초로 민감하게 포착한 낭만주의가 그런 의미에서 현대 예술의 기점이라 보고 있다.

독자는 저자의 생각을 미리 파악하려고 덤비기보다는, 관심이 끌리는 시대나 사조 또는 작품에 관한 서술을 읽어가는 동시에 실제로 해당 작품을 감상하면서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고 저자의 생각을 음미하는 방식으로 이 책을 읽는 것이 유익하다.


임홍배 서울대 교수 독어독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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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55>고도를 기다리며-사뮈엘 베케트

한없이 지루한데 결코 자리를 뜰 수 없는 연극,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저 깊은 인간의 심연을 곧바로 느끼게 하는 연극, 근원적인 비애와 경련적인 웃음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연극….

1953년 거의 폐관 직전 상태에 있던 파리의 한 극장에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초연되었을 때 관객들의 첫 반응은 그렇게 막연하고 야릇했다.

그럼에도 조만간 이 낯선 체험에 대한 조용한 열광이 세계로 번져 나갈 것이고, 차후 베케트는 ‘반(反)연극’ ‘신(新)연극’ ‘부조리 연극’ 등으로 명명될 20세기 연극의 새로운 조류를 대표하는 극작가로 손꼽히게 된다. 그 명칭이 암시하듯 그때 사람들은 전통의 거부와 혁신, 그리고 ‘부조리’의 인식에서 이 연극을 이해하는 단서를 구했다.

‘부조리’의 개념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서구의 총체적 위기상황 속에서 ‘실존적 인간’을 응시하려는 철학적 성찰과 함께 싹텄다. 무엇보다도 이성(理性)과의 부조화를 뜻하는 그것은, 근대사회의 기반이 되어 왔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깊은 회의 위에서, 인간의 이성이 만물의 척도가 아니며 이 세계도 합리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의미체가 아님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런 철학적 주제를 제기한 장 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 이후, 철학자이기보다는 철저한 예술가였던 부조리 ‘작가’들을 사로잡은 문제는 어떻게 부조리를 진정 부조리답게 보여 주느냐는 것이었다. 부조리를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논하고 보여 준다면 그건 이미 부조리가 아니지 않을까? 이런 물음에서 촉발된 베케트의 도전은 ‘혼돈에 적합한 형태’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부조리 그 자체로 빚어진 이 형식은 당연히 전통적 형식을 파괴한다. 즉, 이성의 명령으로 짜인 모든 ‘고전적’ 규범과 기법들을 거부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인과론적 서사구조의 해체일 것이다. 기승전결식으로 정형화된 ‘이야기’의 선적 구조야말로 인간과 세계를 ‘의도된’ 의미에 맞춰 ‘조리 있게’ 구성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그런 서사적 연결을 유도하는 모든 요소가 극단적으로 파편화된다. 이 작품 속에는 시간의 흐름도 없고 공간의 이동도 없다. 의미를 생성하는 어떤 지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단지 ‘지금-여기’라는 텅 빈 상황으로 제시되는 그 시공은 요컨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가지 않는 ‘끔찍한’ 세계이다.

거기서 등장인물은 마치 아무 역할도 주어지지 않은 채 무대 위로 내던져져 뭔가를 연기해야 하는 배우와도 같다. 이 할 일 없는 세계 속에서는 할 일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다. 그들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바로 할 일, 즉 ‘역할’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고도는 올 것인가? 과연 그럴 희망은 있는가?
그러나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 순환구조를 통해 끝없이 유예되는 기다림 속에서 끝없이 피폐해지고 있는 인간의 모습만을 그리고 있다. 전례를 찾기 힘든 이 도저한 절망의 상상은 우리를 어떤 역설적인 악몽 속으로 이끌어 가는 듯하다. ‘희망’과 ‘의미’의 기치를 걸고 인간을 오히려 병들게 만드는 거짓 진리들에 강력히 저항하는 악몽!

이인성 서울대교수·불어불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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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56> 장자(莊子)-장주(莊周)

장자(본명 장주·莊周)가 살았던 시대에는 개인 상호 간의 무한한 생존경쟁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처참한 전쟁이 만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공동체에 앞서는 개개인의 사람다운 삶의 추구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철학적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 장자에 의하면 인간은 사회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 유지를 위하여 생겨난 사회제도, 이념, 권력, 재물 등등은 결국 생명 밖의 존재, 즉 외물(外物)에 불과하다. 장자는 바로 이런 ‘외물’의 추구 때문에 도리어 살아있는 개개의 인간(생명)이 희생당하는 비극적 모순을 지적한다.


또한 장자가 보기에 현실세계에서는 자기만의 특수한 ‘하나의 입장과 이해관계’에 집착하여 오로지 자기 인식만을 ‘절대적 기준’으로 보고―자기와 다른 타자의―입장과 기준들을 부정하고 무차별적으로 규제하고 억압하는 독단적 이념이 넘쳐나고 있다. 이와 같이 다른 생명체에게도 자기 방식대로 행동하기를 강요하는 독단론자들의 이념적 폭력을 장자는 기발한 우화와 비유를 통하여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장자에 의하면 인간의 기준은 결코 만물에게도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척도가 될 수 없다. 인간 이기주의, 인간 독점주의를 병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장자의 사유는 유기체적 세계관을 전제로 하는 일종의 생명철학이다. 하나의 생명체 안에서 심장이나 간 등등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 기관들은, 장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위(有爲)’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 ‘유위’하는 존재만으로는 생명성이 보장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죽은 시체와는 달리 그 생명체를 구성하는 각 기관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정한 ‘아니마’처럼 ‘보이지 않는 총체적인 생명원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총체적 생명원리가 바로 장자가 강조하는 ‘무위(無爲)하는 도(道)’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만물에게 각각의 ‘유위’라는 고유한 활동이 가능하려면, 바로 그 ‘유위’의 지평을 넘어서는 총체적인 생명원리인 ‘도’의 ‘무위’ 속에 포섭되어야 한다. 그 ‘도의 무위’ 속에서 각각의 ‘유위’는 자기의 개별성 또는 차별성을 최대한으로 보장받으며 서로 평등하게 보완하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장자철학의 의의는 우선 오직 ‘하나의 척도’에 의거하여 무차별적으로 인간 본연의 생명성을 왜곡하고 압박하고 있는 모든 사회적 규제나 간섭을 이념적 폭력으로 고발하고 그것을 지양하고자 하는 혁명적인 부정에 있으며, 이와 동시에 자기 삶의 본연적 차별성을 찾아내려는 해방의 목소리에 있다.
사회 속에 살면서 사회적 제약을 넘어서려는 장자의 이상은 영원한 유토피아인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 삶의 ‘진정성’의 추구를 포기한 채, 가상세계가 이끄는 기계놀이에 매몰되어서 도구종속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장자의 환상적인 유토피아 이야기가 주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장자’의 한글번역서로는 안동림이 역주한 ‘장자’(현암사)가 있고,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번역서로 오강남이 풀이한 ‘장자’(현암사)와 이강수와 이권이 옮긴 ‘장자Ⅰ’(길)이 있다.


송영배 서울대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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