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44>‘프로테스탄티즘의…’ - 막스 베버

이른바 통섭(統攝)의 학문을 한 학자로 막스 베버를 꼽을 수 있다. 그는 거의 모든 학문 분야를 섭렵하면서 사회, 문화, 정치, 경제 현상 사이에서 인과관계의 고리를 발견하려 하였다.

실제로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자본주의가 종교윤리, 기업조직, 임노동, 기술, 시장, 법 등 여러 요인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하고 있음을 서구의 경험을 통해 밝혀주고 있다. 왜 근대의 합리적인 자본주의가 유독 유럽에서만 출현하였는가? 그는 근대 유럽에서의 자본주의 기원을 비교문명의 시각에서 분석함으로써 해답을 찾으려 하였다.

이윤추구 동기에 의해 작동하는 모험가적 자본주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존재했다. 서부 유럽이 매우 독특했던 점은 모험가적 자본주의와 구분되는 ‘합리적’ 자본주의의 출현에 있다.

베버는 서구의 합리적 자본주의의 특징적 현상으로 ‘형식적이고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조직화’와 ‘정기적 시장에 맞추어진 합리적 산업조직의 존재’를 들고 있다. 그는 이러한 합리적 자본주의가 가능하기 위해 무엇보다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서구에서 생활양식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자본주의 정신이다. 자본주의 정신은 ‘돈벌이를 자신의 물질적 생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는 소명의식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으로 인해 비로소 노동과 이윤추구 행위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금욕적 생활과 저축 관념을 매개로 근대적 자본축적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로 16, 17세기의 종교개혁과 금욕적인 프로테스탄트 윤리, 특히 칼뱅주의를 베버는 지적한다. 칼뱅주의는 인간의 운명은 태초로부터 정해진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직업노동과 부의 추구를 신의 섭리로 받아들일 때 구원이 가능하다는 예정설을 중시하였다.

세계의 탈주술화(脫呪術化)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결국 동양과 서양 사이의 차이도 직업과 노동에 대한 의식, 삶에 대한 태도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종교적 측면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은 베버의 논의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적인 자본주의 분석과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두 사상가의 입장을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때 근대 자본주의의 역학과 모순에 대한 이해는 보다 충실해질 수 있다. 그들은 각각 자본주의의 정신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을 강조하면서도 이념적 기초와 물질적 조건을 서로 경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과 관련하여 베버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베버의 생각과는 달리 동아시아 나라에서 유교윤리가 후발 자본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일본,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이 대표적 보기다.

미국 하버드대의 두웨이밍(杜維明) 교수가 대표적인 논자이다. 이러한 주장은 종교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사이의 선택적 친화력에 관한 베버의 문제의식을 동양사회에 접목시키는 시도로서 베버사회과학의 새로운 연구주제라고 할 수 있다.


임현진 서울대교수 기초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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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45>괴델, 에셔, 바흐-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인간이 예로부터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지적 호기심 중 하나는 우리 인간 자신에 관한 것이다. 자아란 무엇일까? 인간의 마음은 물질일까 아니면 물질이 아닌 어떤 것일까? 인간과 동일한 수준의 지능을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근자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질문은 형이상학이란 이름 하에서 사변적으로 고찰되어 왔으나 과학기술의 발달과 컴퓨터의 출현은 이런 문제를 더욱 구체적으로 궁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명저 ‘괴델, 에셔, 바흐’는 바로 이러한 마음의 문제와 인공지능의 가능성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인지과학자인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문제에 대한 답을 괴델의 수리논리학적 정리와 에셔와 바흐의 예술 작품에서 찾아낸다. 괴델의 정리, 에셔의 그림, 바흐의 음악의 공통점은 이들 모두가 다층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이 층들은 일종의 ‘이상한 고리’처럼 서로 엉켜 있다는 것이다. 즉, 최상 층위는 최하 층위에 의하여 규정되고 다시금 최상 층위가 최하 층위로 소급되어 영향을 미치면서, 층위 사이에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 엉킨 고리는 본래적으로 그 자체 속에 역설적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이상한 고리이다. 저자는 역설적 측면을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다층구조의 엉킴 자체가 바로 자아의 진정한 모습이며, 이 다층구조 속에 엉켜 있는 이상한 고리가 물질인 뉴런들의 밀림으로부터 어떻게 의식을 지닌 마음이 출현하는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제시한다. 또 이러한 엉킨 고리를 구성하고 있는 다층구조의 모습을 토대로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옹호한다. 에셔와 바흐의 작품은 이 ‘이상한 고리’에 대한 매우 특출한 예시이다. ‘손을 그리는 손’을 비롯하여 시작과 끝이 사라진 상태로 끝없이 반복되는 에셔의 그림들이 그렇고, 반복하면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바흐의 ‘무한히 상승하는 캐넌’이 그렇다. 바흐의 캐넌 ‘음악의 헌정’은 무한히 상승하는 순환 고리를 가지고 있어, 마치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종지부는 다시금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도입부로 연결된다. 저자는 이 이상한 고리의 역설적인 모습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서 더욱 또렷하게 인지하고, 이 책의 상당 분량을 할애하여 괴델의 정리를 천착해 들어간다. 괴델의 정리에는 ‘자기 지시’의 개념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자기 지시가 바로 다층구조의 엉킴의 출발점이자 역설의 원천인 것이다. 층위 사이의 엉킴으로 인해 역설을 일으키는 자기 지시의 간단한 예는 다음과 같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 이 문장이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닌 역설적 문장인 이유는 “이 문장이 참이라면, 거짓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문장이 실제로는 참이므로 거짓이 되고, 이 문장이 거짓이라면, 거짓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문장이 실제로도 거짓이므로 참이 되기 때문이다.” 저자 호프스태터는 1945년 미국 뉴욕 출생으로, 196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아버지 로버트 호프스태터의 학문적 자질을 이어받아 일찍이 과학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미국 스탠퍼드대를 거쳐 오리건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디애나대 인지과학 및 컴퓨터과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 책은 1979년 출간 직후 화제가 돼 이듬해 논픽션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김영정 서울대 교수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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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46>카라마조프가의 형제-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과 사상을 집약하고 있는 그의 마지막 소설이자 19세기 러시아 장편소설의 위대한 시대를 장엄하게 끝맺는 걸작이다. 이 소설은 신에 의해 세상에 허용된 악에도 불구하고 신을 변호하고 창조의 목적론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구상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영원한 주제(믿음 자유 악 구원 인류의 운명에 관한 문제들)를 범죄소설의 틀을 빌려 탐구하며 그 속에서 친부 살해를 카라마조프 집안의 사건을 넘어선, 아버지―신의 살해라는 이념적 차원과 연관시킨다. 그는 각각 정념과 이성과 신앙을 대변하는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형제의 삶과 의식을 좇아가면서, 무신론적 합리주의나 공리주의가 아닌 영혼의 자유와 진정한 인간애, 속죄, 수난,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하는 신앙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 신앙을 소설에서 실천하는 인물은 알료샤와 그의 영적 아버지인 조시마 장로다. 그러나 작가의 창작 계획상 미완으로 머문 이 소설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진리를 자신의 내면에 지닌 ‘신의 인간’ 알료샤가 아닌 ‘마돈나의 이상’을 동경하면서도 끊임없이 ‘소돔의 이상’에 이끌리며 자신의 고통을 통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죄’의 의식과 인간성의 부활로 나아가는 드미트리다.


그 못지않게 흥미로운 인물은 합리주의자 니힐리스트를 자처하며 “이 세계의 입장권을 신에게 돌려주겠다”는 ‘반역자’ 이반이다. 그의 창조물인 대심문관에 따르면 내적 자유를 감당하기에 너무 약한 존재인 인간에게 자유는 곧 저주다. 그런즉 자유를 인간에게 부여했던 그리스도는 기적, 신비, 권위에 의거하여 자유 대신 빵과 지상낙원을 보장하는 공식적 기독교에 의해 수정되어야 한다.





‘대심문관의 전설’은 로마가톨릭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비판으로서, 신적 원칙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에 대한 분석으로서 강력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스스로를 ‘불신과 회의의 자식’이라 불렀던 본래 성향과는 모순되게 작가가 자신에게 부과한 과도한 종교적 역할은 소설에 의도치 않은 파열을 가져온다. 과도하게 열렬한 믿음은 오히려 긍정을 부정과 동행케 한다.


그는 반역자 이반과 대심문관의 반대편에서 영혼 불멸과 진정한 신앙을 열렬히 전도하지만, 이반의 말 속에는 그의 목소리가 함께 울린다. 대심문관에 대한 그리스도의 입맞춤 역시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그들의 지상적 행복을 위해 자신의 영원한 행복을 희생하는 자에 대한 이해와 용서를 누설한다.


이반도 파열을 보인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의심하며, 믿음을 갈구하나 오만함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작가에게 나타나는 파열, 타락의 심연과 천상의 심연을 마음속에 함께 지닌 인물들, 찬반 사이에서의 흔들림 때문에 이 작품은 변신론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실패한 명제소설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실패는 소설의 ‘예술적’ 성공을 의미한다. 미의 본성에 대해 드미트리가 한 말 ‘소돔의 이상과 마돈나의 이상을 동시에 찬미하고 추구하는 것’은 이 소설 전체에도 적용된다. 영혼의 불멸과 구원의 문제에 천착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소돔에서 마돈나에 이르는 모든 길에 뻗쳐 있는 이율배반으로 가득찬 삶, 살아 있는 삶에 바치는 송가다.


김희숙 서울대 교수 노어노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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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47>맹자-맹자

우리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애초에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더 자라서는 누군가의 형제 또는 자매로, 누군가의 벗으로, 누군가의 학생으로, 누군가의 연인으로, 누군가의 아내 또는 남편으로, 누군가의 동료로, 누군가의 윗사람 또는 아랫사람으로. 이런 점에서 우리 자신의 몸은 수많은 관계들이 지나가고 중첩되는 교차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관계에 진입하게 된다는 것은, 삶이란 수동성을 숙명처럼 안고 있다는 말로 들릴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개개인이란 그런 관계를 통해 구성되는 전체를 위해서만 존재한다거나, 개개인은 자신이 진입하게 된 관계에서 관행처럼 지켜지고 있는 규칙을 그냥 따르기만 해야 한다거나, 그렇게 규칙을 따랐을 때에만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거부하고 싶은 공허함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삶이란 허깨비 같은 삶이라고 외친다고 해서 바로 해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관계 맺기를 부정한다는 것 역시 허무주의에 쉽게 노출될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이 맹자의 철학적 출발점이었다.

맹자가 보기에 극심한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던 중국에는 두 가지 극단이 존재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타인을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는 부르짖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긍정해야 한다는 부르짖음이었다. 맹자는 이런 양 극단을 거부하고 자신은 양자의 중도를 걷겠다고 말했다.

그는 타인과의 관계 맺음, 그리고 그 관계를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일은 여러 관계가 구성하는 전체에 헌신하는 것이나 여러 관계에 관행적으로 내려오는 규칙을 맹종하는 수동적인 일이 아니며,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함을 통해 능동적으로 접근해 나가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현대적인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진실한 사람만이 타인에 대해 진실할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표출되었다. 첫 번째로는 성선설이다. 맹자는 성선설을 통해 인간이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는 능력을 본래부터 갖고 있음을 그리고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길은 철저히 자신의 힘으로 가능한 것임을 주장하고, 각 개인이 스스로에 대해 책임감을 느낄 것을 촉구했다. 두 번째로는 왕도 정치론이다. 이는 맹자의 성선설과 표리를 이루는 것으로 보다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지식인과 지배층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맹자는 능동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지배층과 지식인이 솔선수범해야 하며 그들이 자신의 책무를 방기하거나 냉소할 때 타락한 세상을 가져오게 된다고 보았다.

맹자는 이런 문제의식을 정치, 인간의 본성 등에 대한 문답과 논쟁을 통해 전개해 나갔고 그 내용들은 ‘맹자’에 대화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대에 전해지는 ‘맹자’는 한(漢)나라 시대 조기(趙기)가 당대 전해지던 맹자의 저술을 정리한 ‘맹자장구(孟子章句)’를 토대로 한 것이다. 현재 대학생 수준에서 읽을 만한 ‘맹자’ 번역으로는 성백효 선생의 ‘맹자집주’가 있다. 이 책은 원문에 매우 충실하며, 전통시대 가장 많이 읽힌 주희(朱熹)의 주석이 완역되어 있다.


정원재 서울대교수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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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48>고향-이기영

일제강점기 한국의 지식층 청년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등지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 사상을 수용해 이를 적극적으로 문학 활동에 접맥하기 시작했다. 이 사상은 초기에는 식민지 지배체제에 대한 민족적 저항 의식의 표출로 문학에 수용되었으나 차츰 마르크스주의와 결부되면서 계급적 투쟁 의식을 강조하는 조직적인 활동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실천의 구심점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카프)이 자리한다. 계급문학운동은 이 단체를 중심으로 문학운동의 집단적 실천과 그 공동체적인 연대 의식을 강조했다. 이러한 문학운동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농민문학론이며 그 대표적 작가가 민촌 이기영(民村 李箕永)이다.

1896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이기영은 1924년 ‘개벽’지 현상모집에 단편 ‘오빠의 비밀편지’로 당선된 후 1925년 카프에 가담했다. 단편소설 ‘민촌’(1926) ‘농부 정도룡’(1926) ‘서화’(1933), 장편소설 ‘고향’(1933) ‘신개지’(1938) ‘인간수업’(1941)을 발표하였다. 그는 광복 직후 월북하여 장편소설 ‘두만강’을 발표하였으며 북한에서 요직을 거치다가 1984년 사망했다.


이기영은 장편소설 ‘고향’에서 농민의 경제적 몰락 과정과 삶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했다. 작품의 배경인 원터 마을은 일제강점기 농촌의 현실을 전형적으로 드러낸다. 읍내에 철도가 놓이고 공장이 들어서자 농촌 공동체의 구심점이 흔들리고 농민은 대부분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물가의 급격한 상승에도 불구하고 미곡의 가격은 제자리를 맴돌아 농촌 경제는 파탄을 맞는다.


이러한 농촌의 현실 속에 새로 성장하는 농민의 계급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김희준이라는 매개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의 각성을 의도한다. 주인공은 추상적 관념적 인물이 아니라 방황과 갈등을 겪는 살아있는 인물이다. 그는 농촌 생활의 고통을 겪으면서 무능력에 좌절하기도 하고, 아내와의 애정 없는 생활에 방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마을 사람의 삶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가 야학을 열고 두레를 조직하고 농민을 계몽한다. 이에 따라 자신의 삶의 고통의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원터 마을 사람들이 김희준의 지도에 의해 힘을 합치게 되고, 소작료 인하 투쟁에도 적극 동참하게 된다.


이처럼 ‘고향’은 근대화의 와중에서 전통적 사회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하여, 그 속에서 삶의 고통을 참아내며 살아가는 농민의 생활과 의식의 성장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작가는 지주를 등에 업고 농민을 착취하는 마름 안승학과 그에 의해 고통 받으면서도 저항하는 마을 사람의 대립을 기본 축으로 하여 다양한 삽화를 제시하면서 농촌의 현실을 세밀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 결과 ‘고향’은 일제강점기 농민들의 삶과 그 풍속의 재현을 가능하게 해 주었으며 농촌의 현실을 전형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고향’은 계급문학운동의 대표적 성과이면서 동시에 일제강점기 리얼리즘 문학의 최고봉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양승국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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