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29>카인의 후예-황순원

모두 9장으로 짜여 있는 장편소설 ‘카인의 후예’는 원래 ‘문예’라는 잡지에 1953년 9월호부터 1954년 3월호까지 5회 연재되다 중단되었던 것이다. 황순원은 ‘문예’ 연재본을 두 배 가까이 늘려 작품을 완성시켜 1954년 말 중앙문화사에서 단행본으로 펴냈다.

‘카인의 후예’는 1946년 3월 북한에서 실시된 토지개혁을 배경적, 원인적 사건으로 설정하고 있다.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인 토지개혁이 작게는 비석골 양지터의 한 젊은 지주의 집안에, 크게는 마을 전체에 가져다 준 엄청난 변화상을 그려내고 있다. 젊은 지주와 늙은 마름 사이의 생사를 건 갈등과 대립이 변화의 중심에 있다. 1953년에 1946년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카인의 후예’는 기본적으로 당대소설이 되겠다. 하지만 그 중간에 6·25전쟁이 가로놓여 있다는 점에서 작가가 역사소설적인 발상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도 있다.

연재본과 최근 나온 전집본(황순원전집·문학과지성사판)을 비교해 보면 작게는 문장부호에서 크게는 단락에 이르기까지 수정 작업을 해 구체성, 정확성, 개연성, 과감성 등을 좀 더 분명하게 한 것으로 드러난다. 연재본을 계속 고치고 빼고 덧붙임으로써 인물의 감정과 심리가 좀 더 명료한 색깔을 입을 수 있었고, 플롯이 좀 더 튼튼한 인과성 위에 얹힐 수 있게 되었으며, 또 표현상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전집본은 연재본보다 안타고니스트(적대적 인물)인 도섭 영감의 부정적인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부각시키고 있으며 박훈을 향한 오작녀의 사랑과 보호본능을 더욱 적극적으로 그려냈다.

20여 년 동안 마름으로 살며 지주에게 충성을 다한 것이 당에 의해 과오로 포착되면서 도섭 영감은 살기 위해 지주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당을 위해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약속하게 된다. 도섭 영감을 무자비한 행동대원으로 내몰아 버린 힘은 지주에 대한 불만보다는 공산당에 대한 불안감과 공포에서 찾아야 한다. 토지개혁이라는 극한상황에 직면하면서 젊은 지주 박훈과 늙은 마름 도섭 영감이 돌이킬 수 없는 적대관계로 치닫는 과정과 박훈이 여성성을 모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는 오작녀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과정이 중첩되면서 이 작품은 단순한 시대소설이나 역사소설로부터 빠져 나오게 된다. 전자의 과정이 어둠, 죽음, 지상 등의 이미지를 매개하고 있다면 후자의 과정은 밝음, 생명, 천상 등을 매개하고 있다.

작품 내내 견인주의(堅忍主義·욕정이나 욕망 따위를 의지의 힘으로 굳게 참고 견디어 억제하려는 도덕적 종교적 태도), 소극성, 나약함 등으로 묘사되던 박훈이 소설의 결말 부분에 가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도섭을 칼로 찌르는 용기를 내보인 것은 반전의 묘를 살려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섭 영감에게 당의 숙청과 젊은 지주 박훈의 복수극은 거의 동시에 펼쳐진다. “내가 대신해서 도섭 영감의 일을 처리한다. 어서 이곳을 떠나라. 이 이상 더 피를 보고 싶지 않다”는 박훈이 혁이에게 보낸 쪽지의 내용으로 끝나고 있는 이 소설은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카인의 후예의 정본은 연재본을 적극적으로 개작한 끝에 완성도를 높인 전집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조남현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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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30>감시와 처벌-미셸 푸코

감옥의 탄생’이라는 부제가 붙은 푸코의 ‘감시와 처벌’(1975)은 좁은 의미에서는 형벌의 이론과 제도에 대한 저자의 역사적 성찰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이 책은 근대적 감옥의 출현과 함께 도입된 규율, 훈련, 교정, 관찰 등의 방법이 감옥 밖의 사회에서 어떻게 권력의 기술로 작용해 왔는지를 치밀하게 규명한 책이다.


푸코는 ‘부르주아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는 다르게 ‘근대세계와 인간 착취의 메커니즘’을 밝히기 위해 권력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전에 그의 작업은 광기에 대한 이성 중심 사회의 탄압(‘광기의 역사’), 에피스테메 혹은 인식구조의 시대적 변화(‘말과 사물’), 병원과 의학의 사회사(‘진료소의 탄생’) 등을 주제로 한 것이었는데 ‘감시와 처벌’에 이르러서는 권력의 정체와 구조를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푸코는 권력을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일방적인 관계로 보지 않았고, 권력자가 독점할 수 있는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도 않았다. 그는 권력을 한 사회 안에서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게 작동하는 인간 지배의 기술과 전략으로 인식했으며, 권력의 전략적 목표를 인간의 신체로 파악했다.


가령 왕권시대의 권력이 신체에 대한 잔인한 폭력이나 고문과 같은 공포의 행위로 권력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이었다면, 근대의 권력은 감옥의 제도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감추면서 신체를 부드럽게 통제하고 지배하는 기술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처벌 방식의 변화는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 말에 개혁자들이 죄수에게 가혹한 형벌을 부과하는 것보다 감금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죄수를 처벌하고 교화시키는 방법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푸코는 처벌의 이러한 개선이 ‘죄수에 대한 인간적 처우를 개선해야겠다’는 인식의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기술이 근대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인간에 대한 권력의 ‘부드러운’ 지배의 방법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산출하는 경제적 통제 방법이기도 하다. 대혁명 직후인 18세기 말에 감금이라는 형벌제도가 도입되면서 근대적 감옥이 탄생한 것은 그런 논리에서 해석된다. 근대적 감옥의 대표적 형태는 판옵티콘(일망 감시장치로 만들어진 원형감옥)인데, 이것은 중앙의 감시자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모든 죄수를 감시하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감옥 안에서 이러한 감시자와 죄수들 사이의 관계는 감옥 밖의 사회에서 권력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가령 학교에서 학생들의 동작과 활동이 온갖 시험의 장치 속에서 세밀히 규제되고 기록되는 과정을 통해 학생은 규율에 길들여지고 순응한다. 군대나 공장의 엄격한 규율과 통제의 장치 속에서 군인과 노동자들이 예속화되는 현상도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규율을 내면화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러므로 오늘날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표면적으로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우리의 신체가 규율과 훈련에 길들여져 있을 뿐 아니라 미세한 정보의 그물 속에서 일상의 모든 것이 낱낱이 기록되는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 우리는 인간의 자유와 저항의 가능성이 과연 어디까지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생근 서울대 교수·불어불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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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31>안나 카레니나-레프 톨스토이

러시아 문학사의 큰 봉우리이고 우리에게는 아주 친숙한 작가이자 사상가인 레프 톨스토이(1828∼1910)는 러시아문학사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사에 큰 자취를 남긴 거장이다. 생전에 이미 성자(聖者)로서 추앙받았던 그는 한국 근대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친 바 있다.
흔히 ‘전쟁과 평화’와 함께 소설가 톨스토이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안나 카레니나’(1877년)는 구성과 세부 묘사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거둔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런 만큼 널리 읽히는 작품이고 러시아와 구미(歐美)에서 이미 여러 차례 영화화됐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의 러시아를 다룬 ‘전쟁과 평화’가 전쟁과 평화, 가족사와 역사의 문제를 이전 세대의 모습을 통해서 통일적으로 보여주는 과거로의 회귀 소설이라면, ‘안나 카레니나’는 1870년대의 러시아, 즉 톨스토이가 자신의 시대로 돌아온 이른바 동시대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농노 해방(1861년) 이후 빚어진 새로운 사회상황, 즉 결혼과 가족의 문제를 포함한 당대의 여러 사회적 문제와 풍속을 무려 150여 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기본적인 구성은 안나와 브론스키, 그리고 레빈과 키치라는 두 쌍의 남녀 이야기로 돼 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주인공 안나는 상류사회의 매우 정숙한 귀부인으로 등장하지만, 청년장교 브론스키를 만나면서 불륜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당시 상류사회의 전반적인 관행과는 달리 자신의 불륜을 숨기지 못하며, 그녀 내면의 본능적 삶의 열정에 대한 요구와 그녀가 속해 있는 사회의 요구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올바른 것은 아니더라도 비난받을 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브론스키와의 사랑에 더욱 매달리면서 소위 ‘사회적 자아’를 포기한다. 그러나 그녀는 브론스키마저 자신을 떠나기를 원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길을 선택한다.

반면에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레빈은 안나와는 정반대의 과정을 겪는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그는 지인들로부터 소위 ‘국외자’로 인정되는 처지에 있지만, 점차 소설이 진행되면서 가족과 사회의 관계망 속으로 들어간다.

안나와 마찬가지로 레빈 역시 자신의 개인적 이상과 완고한 사회적 현실 사이의 장벽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는 안나와 달리 중도적인 길을 선택하면서 파국을 피해간다. 그 길이란 삶의 의미를 자신의 내면에서 찾는 것이었고, 그로써 그는 안나와는 달리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두 주인공이 폐쇄되고 경직된 사회적 현실 속에서 개인의 개성과 삶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해 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이 작품은 그 완결적인 형식미에도 불구하고 ‘열려 있는’ 작품으로 남는다.
사실 그러한 ‘열려 있음’은 모든 고전의 자격조건인데, 이 작품 이후에 정작 톨스토이 자신이 그러한 ‘열려 있음’에 만족하지 못하고 문학을 포기하게 되는 사실은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박종소 서울대 교수·노어노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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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32>픽션들-호르헤 L 보르헤스

세르반테스 이후 스페인어권 최고의 문제작가로 일컬어지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단 한 편의 장편소설도 쓰지 않았다. 대신 ‘픽션’으로 명명한 단편에서 작가로서 희구하는 모든 것을 치밀하게 요약해 냈다.
‘픽션들’(1944)은 보르헤스 문학의 본령으로 간주되는 두 번째 단편집으로 그의 주된 관심사인 자아와 시간의 문제를 천착한 열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문고판으로 200쪽밖에 안 되는 적은 분량이지만 그의 철학적 문학적 사유가 온축된 이 작품집은 예기치 못한 폭발력으로 들뢰즈, 푸코, 데리다 등의 후기구조주의 사상가들과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비롯한 20세기 후반의 서구 지성계를 흔들었다.
이 책이 불러일으킨 지적 충격은 이성주의의 한계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소설을 무한한 사유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새로운 소설 문법의 창안에서 비롯됐다.


보르헤스는 새로운 세계 인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도발적 사유를 통해 탈근대 담론의 지적 경향을 선취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21세기 인문학 패러다임의 출발점에 위치시킨다.
철학과 문학의 경계적 글쓰기를 보여 주는 그의 픽션은 흔히 경험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관념적인 허구의 세계를 다룬 ‘지적인 가설’로 여겨진다. 실제로 ‘픽션들’에 실린 많은 단편은 가상의 텍스트에 대한 주석으로서의 글쓰기라는 메타픽션적 성격을 지닌다.


‘픽션들’은 지배적 가치체계의 전복을 통해 세계의 질서를 재정의하고 글쓰기와 언어 자체에 대해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는 점에서 환상문학의 형이상학적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초월과 무의미의 순수한 유희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질서로 파악해 온 상투화된 현실 개념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자기반성을 통해 경험 세계 너머로 인식의 지평을 넓힘으로써 더욱 심오하게 현실에 관여한다.
그러나 복잡한 추상과 심오한 형이상학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에게 관념 자체는 심미적 상상적 가능성만큼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형이상학 역시 ‘환상문학의 한 분파’이며 그것이 내세우는 객관진리라는 것도 실상 상상력의 산물로서 ‘우주에 대한 그럴싸한 묘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픽션들’에서 보르헤스는 이념적 테제가 아니라 철학의 존재 의미 자체를 회의케 하는 급진적인 유희성을 통해 글을 쓰고 있다.
따라서 미로, 도서관, 복권, 도플갱어, 꿈, 거울 같은 상징들은 우주의 본질적 무질서와 그에 대한 작가의 회의주의를 드러내는 존재론적 유희의 도구들로 아르헨티나 작가를 동반한 강박관념을 엿보게 한다.


‘픽션들’은 독자들에게 경이로운 문학 체험을 선사한다. 그러나 다양한 영역을 경쾌하게 넘나드는 보르헤스 특유의 현학성과 단 몇 줄의 글귀에 우주를 탁월하게 담아 내는 엄밀한 내적 논리는 책읽기의 즐거움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픽션들’은 독자의 기대지평을 무너뜨리는 기발한 상상력의 유희와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웅숭깊은 철학적 사유 그리고 텍스트에 구현된 복잡한 미로 구조를 음미하며 한 구절 한 구절 천천히 읽어야 한다.


김현균 서울대 교수·서어서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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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33>리바이어던-토머스 홉스

‘시장의 계약’에 익숙한 우리에게 정치권력을 계약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생뚱맞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토머스 홉스(1588∼1679) 덕분이다.

사회계약론의 기원을 이루는 ‘리바이어던’은 1651년에 출간되었다. 물론 당시에도 계약론적 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리바이어던’의 특징은 통치자와 백성 사이에 이루어지는 계약의 개념을 포기하고 평등한 사람들 사이의 계약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리바이어던’에는 절대 권력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배어난다. 하지만 그 안에 풍부한 민주적 함의를 ‘가능태’로서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치권력을 계약의 범주로 파악하는 한, 또 신민들의 안녕이라는 목표에 부합하지 못할 경우 그 정당성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홉스의 사회계약론의 핵심은 평화론에 있다. 그는 인간이 공동의 주권자를 구축하지 못한 상태를 ‘자연 상태’라고 불렀다. 이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로서 ‘그 안에서의 삶은 고독하고 가련하며 야만스러우며 단명하다’.

이 자연 상태에 ‘리얼리즘’이 있는가. 홉스의 자연 상태에서 묻어나는 불안정성을 현대의 우리도 가끔씩 절감하고 있음을 실토하게 된다. 어두운 밤거리에 홀로 남았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다른 사람의 발소리를 두려워하는 실존적 체험이나 혹은 밤에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잔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가 되는’ 자연 상태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은 법으로 자신들을 통치할 권력체인 ‘리바이어던’을 만들어 전쟁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처럼 생명의 보존과 평화의 구축에 유달리 집착하는 홉스의 논리가 설득력이 있을까. 혹시 ‘평화’보다 ‘정의’가 중요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정의’를 목표로 하는 정치적 이상은 홉스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된다. 정의를 둘러싼 쟁점은 파국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홉스는 영국의 내전이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진단한다.
오늘날 홉스의 평화론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 사회는 삶의 의미를 매우 다르게 이해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는 다원주의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바람직한 사회는 어떤 것인가’하는 문제에 자신 있게 답변할 사람은 없다. 또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그들의 기본적 입장이 잘못되었다고 설득할 수 있는 지적 자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처럼 삶의 방식이 달라 어느 쪽이 더 우월한지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없을 경우, 어느 하나를 헐뜯기보다 평화가 유지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만일 이 의견에 동의한다면 ‘정의의 실현’보다 ‘평화의 유지’가 정치적 이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전쟁과 내전의 여파 속에서 펜을 든 홉스는 ‘격렬한 분쟁 없이 평화가 달성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홉스가 21세기의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비전은 사람마다 달라도, 상호이해를 통해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관용을 실천함으로써 평화를 구축하라는 점일 것이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국민윤리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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