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24>슬픈열대-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서구의 반대편에 떨어진 신세계인 남미에는 문명이 건설한 도시와 사라져가는 운명에 놓인 원주민들이 함께 있다.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는 탐험의 회상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이 지역에 대한 관찰과 경험을 분석하면서 ‘문명’과 ‘미개’의 관계를 규명하고 그로부터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을 시도한다.

저자는 이 지구상에 가장 원시적인 따라서 가장 자연적인 상태의 삶을 살고 있는 네 개의 미개인 부족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심성과 사고방식, 사회조직과 생활양식, 종교와 의례, 예술과 상징 등을 섬세하게 재현하고 그들이 본질적으로는 문명인과 다를 바 없으며 오히려 서구의 합리성을 넘어선 더 넓은 ‘의미의 범주’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자연과 원시 그리고 순수한 인간의 세계를 급격히 황폐화시키는 무서운 힘을 가진 서구의 탐욕이 아름다운 도시 속에 썩은 냄새를 풍기며 숨어 있음을 발견한다.

여기서 그는 서구의 ‘문명’과 비서구의 ‘미개’를 별개의 것으로 논하던 종래의 습관을 벗어나서 이 둘이 하나의 체계 속에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발견하는 탁월한 시각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문명과 미개가 모두 서구인의 욕망이 발명한 상상의 실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그는 ‘신세계’의 순수한 자연이란 허상에 불과하며 ‘미개’를 발명하고 정복하며 마침내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문명의 폭력과 욕망이 자행한 역사가 은폐되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실은 서구인들이 자신을 발명하고 왜곡하며 타락시키는 현실이라는 통찰에서 오는 통렬한 아픔과 분노를 맛본다. 그의 슬픔은 순수한 인간이 급격히 멸종되어 간다는 사실과, 서구인 스스로가 상상으로 발명한 허구적인 자신의 이미지에 갇혀 있는 현실과, 뻔뻔스러운 문명과 내버려진 미개의 틈새에 서서 이를 증언해야 하는 인류학자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동시에 간파하는 중층적인 슬픔인 것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배워야 할 점은 문명과 야만을 하나의 체계 속에 놓고 끊임없이 양자를 오가며 심층적이고 넓은 안목으로 검토하고 분석하는 자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는 익숙한 자기의 세계로부터 낯선 ‘그들’의 세계 속에 들어가서 유일한 진리로서 굳게 믿고 있는 자기 문화의 껍질을 하나씩 벗어나가 마침내 저 심층 한가운데에 가려져 있는 ‘우리’를 발견하는 구도자이자 휴머니스트로서의 인류학자가 추구하는 과학적 탐구의 긴 여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문명과 미개라는 단순한 이분법적인 구도를 설정하고 사라지는 미개에 대한 싸구려 감상을 연출하는 통속적인 여행기가 아니라, 오랜 시간을 통해 서구가 축적한 정교한 지식의 면밀한 분석을 동반한 진지한 참회록이다. 결국 ‘그들’과 ‘나’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성찰로부터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 지구 공동체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가진 성숙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자의 이러한 인식의 틀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선배와 동료들이 남긴 다른 세계에 대한 다양한 형식의 지적 모험의 기록들을 새롭게 읽을 수 있으며, 성숙한 눈으로 지식의 거대한 신세계로의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이 현대인의 저작이 고전이 되는 까닭은 그것이 지식생산의 역사적 과정을 규명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의 세상보기와 자기 발견의 시도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김광억 서울대 교수·인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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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25>부분과 전체-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올해는 ‘물리의 해’로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 등 주요 물리 업적을 발표한 지 100주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고 있다. 20세기 초반 물리학에서는 또 다른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는데 아주 작은 원자의 세계를 설명하는 양자역학의 태동은 그 과정 자체가 극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 무대의 중심에 섰던 하이젠베르크가 새로운 과학의 발전에 참여한 자신의 경험을 대화와 토론의 형식으로 풀어 쓴 자전적 글이 ‘부분과 전체’이다.

이 책은 하이젠베르크가 열아홉 살 때 친구들과 도보여행에서 나누었던 대화에서 시작하여 그의 과학사상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많은 인물들과의 교류를 20편에 걸친 대화로 구성하고 있다. 창조적인 과학개념의 형성 과정에 따르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고민과 사색들을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보어와 아인슈타인 등 동시대를 살았던 과학자들의 진지하면서도 때로는 치열한 토론들은 현대물리학 형성의 역사적 배경과 아울러 진정한 과학탐구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자칫 어렵게만 느껴질 수 있는 과학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가까이 있는가를 이 책은 보여 준다. 하이젠베르크가 그리고 있는 것은 복잡한 이론이나 공식과 씨름하는 물리학자가 아닌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뇌하는 인간 그 자체이다. 숲 속으로의 도보여행이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의 일화들은 각박하고 여유 없는 도시적 환경에서 의미 없는 만남만을 이어가는 우리들에게는 한없이 부럽기만 한 광경이기도 하다.

‘부분과 전체’라는 제목이 시사하듯이 세세한 부분까지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전체가 가지는 총체적인 연관성과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는 신념은 그의 학문과 삶의 전반에 대한 태도에 잘 나타나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가 단순한 과학이론에 그치지 않고 기계론적인 자연관을 대체할 새로운 인식의 출발을 가져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젊어서 청년운동에 참가하는 등 사회적 정치적 문제로부터도 자신을 멀리하지 않았으며 전쟁의 소용돌이와 그 부산물인 핵개발과 관련하여 ‘연구자의 책임’에 대해 우려하고 고뇌하게 된다. 미국으로 옮겨간 이탈리아 과학자인 페르미와의 토론에서 망명을 권유하는 페르미를 뿌리치고 독일로 돌아가는 모습에서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번민하는 과학자를 발견하게 된다.
양자역학의 수학적 법칙을 발견했을 때 “모든 원자현상의 표면 밑에 깊숙이 간직되어 있는 내적인 미의 근거를 바라보는 그러한 느낌이었다. 나는 이제 자연이 내 눈앞에 펼쳐 보여준 수학적 구조의 풍요함을 추적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이르자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고 외치던 그의 환호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요즘처럼 모든 분야에서 세분화와 전문화가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학자가 철학 역사 종교 언어 윤리 등을 논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불가능한 사치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핵개발과 폐기물, 환경문제, 그리고 생명윤리 논란 등 과학기술의 사회적 의미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게 비치는 이때 하이젠베르크의 메시지는 참된 지성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석민 서울대 교수·화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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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26>파우스트-괴테

‘파우스트’는 독일의 문호 괴테가 평생에 걸쳐 집필한 대작으로 전설의 인물 파우스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원래 전설상의 파우스트는 중세 말의 마법사다. 그는 자연과 세계의 비밀을 알고 싶어 악마와 계약을 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파멸하고 단죄를 받는다. 중세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세계의 운행이치를 인간 이성으로 규명하려는 시도는 신성에 대한 도전이다. 그렇게 보면 전설의 파우스트는 근대의 여명기에 기독교의 권위와 금기에 맞서 인간중심주의를 추구한 인간형의 표본인 셈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서구 근대세계를 탄생시키고 지탱해 온 그러한 인간중심주의와 맹목적 발전주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담고 있다. 사적 영역에서 전개되는 1부에서는 근대적 자아의 탄생, 인간의 본성과 욕망이 중심주제를 이룬다. 공적 영역에서 펼쳐지는 2부에서는 근대화 과정의 역동성과 내적 모순이 전면에 부각된다.

기독교 신앙의 마법에서 깨어난 현대의 문턱에서 파우스트는 스스로의 주인이 되기 위해 끝없이 갈망하며, 자신의 뜻대로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현대세계의 기획자로 등장한다. 그는 또한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여 삶을 남김없이 맛보려는 무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만 준다면 영혼도 바치겠다는 파우스트의 내기는 욕망의 충족에 모든 것을 거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신의 섭리를 대체하는 파우스트의 절대정신은 끝없는 자아 확장을 꿈꾸면서 시공간을 가로질러 쉴새없이 방황한다. 파우스트의 이러한 모험을 러시아의 문호 푸슈킨은 ‘현대세계의 일리아드’에 비유한 바 있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행동과 실천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결과를 낳는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요 푸르른 것은 삶의 황금나무’라는 충동에 이끌려 파우스트는 새로운 삶의 체험을 추구한다. 그러나 충족을 모르는 파우스트의 욕망은 결국 그레트헨 일가족을 죽음의 파멸로 몰아넣는다. 파우스트의 자아 확장 욕구는 극단적인 자아 분열과 황폐화로 귀결되고 ‘푸르른 삶’의 원천인 여성성과 모성의 파괴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욕구와 신념에 충실할수록 파괴적 혼란을 초래하는 비극적 양상은 2부에서 역사의 세계로 확장되어 더욱 극적으로 전개된다. 정치가로 변신한 파우스트는 이상적 공동체의 터전을 개척한다는 명분으로 대규모 간척사업에 전력을 기울이지만, 그 과정에서 무자비한 인명 살상과 착취를 일삼는다.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도구적 합리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과업을 완수하는 순간 파우스트는 눈이 멀지만, 그럼에도 지상낙원이 눈앞에 펼쳐졌다는 환각에 빠진 파우스트를 가리켜 메피스토펠레스는 완공된 간척지가 다름 아닌 파우스트의 무덤이라고 비꼰다. 파우스트 프로젝트의 이 비극적 아이러니는 국민 동원 체제 위에 구축된 근현대 국가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 나아가서 인류문명이 자기성찰을 결여할 때는 파국적 재앙을 잉태하는 눈먼 질주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19세기의 ‘파우스트’는 문학사의 정전(正典)으로 모셔 둘 책이 아니라 21세기 독자들이 읽어야 할 ‘인류사의 드라마’인 것이다.

임홍배 서울대 교수·독어독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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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27>실천이성비판-이마누엘 칸트

선행은 이타(利他)나 대의(大義) 혹은 공존공영을 ‘위해서’ 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어떤 행위를 그렇게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라는 오직 그 이유 때문에 하는 행위이다.
윤리 도덕은 우리 모두에게 혹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이로움이나 유용함은 한갓 감성적인 욕구 충족에 대응하는 것이다. 감성적 욕구 충족에 상응하는 명령은, 모든 경험으로부터의 교훈이 그러하듯이, 능란한 처세의 요령은 될지 모르나 보편적 도덕 법칙이 되지는 못한다.

도덕은 처세의 기술이 아니라 인격의 표현이다. 선은 감성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좋은 것이다. 이 ‘선’의 관념으로부터 비로소 ‘좋음’ ‘가치’ 등의 개념이 유래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 법칙은 정언적, 즉 단정적 명령으로 이성적 존재자에게 다가온다. 가언적인 즉, 어떤 전제 하에서 말해지는 명령은 필연성이 없다. 명령을 받은 자가 그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명령은 명령으로서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웃에 도움을 청하게 될 때를 생각해서 항상 이웃에 친절하라” 따위의 가언적 처세훈들은 도덕적 선의 표현이 될 수 없다.

선은 인격적 주체의 가치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가 목적이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또한 사람으로서 사람은 인격적 주체이고, 주체란 문자 그대로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될 수 없는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인격적 행위만이 도덕적 즉 당위적이므로 그것은 인간이 도달해야만 할 이성의 필연적 요구이다.

어떤 사람이 행위를 할 때 ‘마음 내키는 바대로 따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를 우리는 성인(聖人)이라 부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실천적인 행위의지가 (정언적인) 도덕법칙과 완전하게 일치함은 신성성(神聖性)이라고 일컬어야 할 것이다.

감성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이 이런 신성성에 ‘현실적으로’ 도달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니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그런 ‘완전한 일치를 향한 무한한 전진’ 가운데에서 우리는 인격성을 본다.
이 같은 가르침을 담은 ‘실천이성비판’(1788)은 ‘순수이성비판’(1781), ‘판단력비판’(1790)과 더불어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이른바 3대 비판서 가운데 하나다.
이 ‘실천이성비판’은 또한 3부작으로 볼 수 있는 칸트의 도덕철학 3대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이 책은 출판 순서에서나 내용 면에서 그 중간적 위치를 차지한다.

‘윤리형이상학 정초’(1785)가 칸트 도덕철학의 포괄적 서설이라면 ‘실천이성비판’은 그 체계의 골간이고 ‘윤리형이상학’(1797)은 이에서 구축된 원리로부터 실천 세칙을 연역해 놓은, 이를테면 응용 윤리학이다.
이를 한 벌로 읽고 공부한다면 고전의 ‘참맛’을 느낌과 더불어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깨치게 될 것이다.

백종현 서울대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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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28>주홍글씨-너대니얼 호손

너대니얼 호손(1804∼1864)의 ‘주홍글씨’(1850)는 미국 소설문학의 전통을 확립하고 미국문학을 세계문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걸작으로 평가되어 왔다. 헨리 제임스와 같은 후세의 소설가는 이런 이유로 ‘주홍글씨’의 출판을 미국문학사의 으뜸가는 이정표적 사건으로 간주한 바 있다.

‘주홍글씨’가 살아 있는 고전으로서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읽혀온 것은 미국적 이념과 그것에 입각한 바람직한 삶의 길을 탐구한 지극히 ‘미국적’인 소설이면서 동시에 근대사회의 보편적 관심사인 개인과 사회의 관계, 삶의 진실과 인식, 여성의 정체성과 권익 문제 등을 깊이 성찰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주홍글씨’는 1640년대의 보스턴 청교도 사회를 무대로 하는 역사 소설이다. 호손은 이처럼 초창기의 미국사회, 곧 종교적 계율이 법으로 통했던 청교도 사회에서 열정에 이끌려 계율을 범한 한 청교도 목사와 그의 사생아를 낳은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의 이야기를 작가 스스로 로맨스라고 부른 독특한 양식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태동기 미국사회를 배경으로 한 역사의 무게 때문에 ‘주홍글씨’를 읽으면서 독자는 미국의 기원과 식민의 대의 및 미국적 이념의 정당성을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없다.

호손의 시대에 청교도주의는 특히 예표(豫表·예언 따위를 미리 보여 주는 조짐)론적 시각에서 독립혁명 정신의 이념적 씨앗으로 상찬되었다. 그러나 호손은 이렇게 미국정신의 원류로 간주된 청교도주의가 실상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억압한 이데올로기임을 드러냄으로써 이념의 맹목적 추수와 그 위험성을 경고한다.

이념의 도그마화에 대한 비판이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을 단죄하는 청교도 사회뿐만 아니라 그 희생자인 그녀 자신에게도 행해진다는 점이 이 소설의 묘미 중의 하나이다. 헤스터가 죄의 표식인 ‘A’자를 가슴에 달고 청교도 사회가 요구하는 참회의 삶을 사는 듯이 보이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징벌에 승복하지 않고서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수용하여 과격한 여권론자로서의 모습을 드러낼 때 작가는 그런 삶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공감어린 시선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주홍글씨’는 이처럼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라는 근대적 주제의 천착을 통해 미국 사회의 지배 이념과 역사 인식의 문제를 제기하는 소설이다. 이와 더불어 인간의 삶의 현실은 복잡다단하기 때문에 단선적 시각으로는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는 또 다른 성찰 또한 포스트모던한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현대적 관심사로 인해 이 소설은 단순한 역사소설로만 볼 수 없는 것이다. 헤스터와 더불어 내적 열정에 이끌려 잠시 청교도 질서 밖으로 일탈했던 딤즈데일의 극심한 죄의식과 내적 고뇌에 대한 치밀한 심리 묘사는 동시대의 소설가 허먼 멜빌의 찬탄을 자아낸 바 있지만, 인간의 내면 심리를 파헤치고자 한 헨리 제임스를 비롯한 후세 모더니스트들에게 무엇보다도 훌륭한 참고가 되었다.

이 소설은 흔히 ‘주홍글씨’로 번역되었고 동명의 영화도 만들어졌지만, 우리말 어법상 ‘주홍글자’로 번역해야 옳다. 우리말 번역본 중에서는 양병탁 선생이 번역한 ‘주홍글씨’(동화출판공사, 1973)와 김종운 선생이 번역한 ‘주홍글자’(삼중당, 1975)가 추천할 만하다.

신문수 서울대 교수·영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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