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11>젊은 예술가의 초상-제임스 조이스

-제임스 조이스 제임스 조이스(1882∼1941)의 여러 작품 중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일반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책이자 현대 성장소설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진 소설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은 아일랜드 더블린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주인공 스티븐 디달러스가 유년기와 대학시절을 보낸 뒤 예술가의 꿈을 안고 날로 피폐해져 가는 가정과 조국을 떠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매우 자전적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다른 성장소설과 달리 연대기적으로 구성돼 있지 않다. 대신 주인공의 ‘의식의 형성’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과정에 개입하는 갖가지 심리적 생리적 사회적 자극을 어떻게 수용하고 저항하며 또는 소화해 내는지가 리드미컬하게 이어진다.
여기에 매 상황에 가장 적합한 언어선택을 통해 이를 설명, 묘사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 과정에 개입해 독특한 시적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작가는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찬사에 걸맞게 이런 정교하고 치밀한 언어체험을 감수성이 예민한 식민지 청년인 주인공의 비장한 성장과정에 절묘하게 조화시킨다.
‘스티븐 디달러스’라는 주인공의 이름은 작가 자신이 잠시 사용한 적 있는 필명이었다. ‘스티븐’은 신약에 나오는 최초의 순교자 이름이고 ‘디달러스’는 손수 날개를 만들어 달고 하늘로 날아올라 역경을 탈출한 그리스 신화 속의 예인(藝人)이다. 이처럼 목숨을 거는 비장함과 비상하는 경쾌함은 실제로 작가가 추구하는 예술적 스타일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옛날 옛적 아주 좋았던 시절에…”로 시작하는 이 책의 주인공 스티븐 디달러스의 신화는 이렇게 창조되었다.
그렇다면 제임스 조이스의 글을 읽으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소양가치는 무엇인가.
첫째는 그가 여러모로 20세기 서구문학의 정점이었으며 21세기에도 각광받는 현대고전작가로 평가받을 것이라는 그의 위상이다.
둘째는 그의 책이 그가 성취한 인간탐구가 유례없이 풍부하고 진솔하며 철저하면서도 문제의식이 강해 매우 각별한 독서체험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특히 작가가 오랜 유랑생활을 하며 단련시킨 자전적 상상력이 도시와 시민, 언어와 의식, 역사-신화-정치 등을 집요하게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 그의 고향인 아일랜드와 도시 더블린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인문학적 체험을 제공한다.
셋째는 그 체험내용이 우리나라 독자에게 다분히 친숙한 주제와 정서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아일랜드도 한국처럼 한때 이웃나라에 종속되는 비슷한 처지의 식민지 약소국의 갈등을 겪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거울에 나를 비추어 자신을 남처럼 바라보는 것처럼 남의 사정을 내 일인 것처럼 몰입해 볼 수 있다.
사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조이스 문학의 가장 핵심인 ‘율리시스’를 읽기 위한 입문서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은 김종건, 이상옥, 나영균 교수의 번역본 등 10여 종이 나와 있다. 작가에 관한 전기로는 리처드 엘먼의 책 ‘제임스 조이스’가 탁월하다. 이 역시 최근 전은경 교수의 국내 번역본이 나왔다.

김길중 서울대 교수·영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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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12>변신인형-왕멍

1987년에 발표된 장편소설 ‘변신인형’은 왕멍(王蒙)의 대표작이다. 왕멍은 20세기 후반의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최근 들어 해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오르고 있는 그의 소설은 1940년대부터 문화대혁명까지 사회주의 중국의 분투와 영광, 실패와 상처를 짊어지면서 개혁 개방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이르는 새로운 시대와 삶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있어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이 소설에는 여러 개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첫째는 1942∼1943년 일본에 점령당한 베이징의 한 가정 이야기다. 이 가정은 아버지, 어머니, 이모, 외할머니, 누나, 남동생(주인공 니자오)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버지는 유럽 유학까지 다녀온 신지식인이지만 속물적이고 방탕한 인물로 그려져 봉건적인 삶에 매몰되어 있는 어머니, 이모, 외할머니 등과 끊임없이 싸운다는 내용이다.
둘째는 언어학자가 되어 있는 성인 니자오가 1980년 독일을 방문해 겪는 이야기다. 니자오는 아버지의 옛 친구인 한 독일인 학자의 집에서 ‘난득호도(難得糊塗·어리석어지기가 어렵다는 뜻)’라는 정판교(鄭板橋)의 글씨를 보고 오랫동안 잊고 있던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셋째는 니자오가 귀국한 뒤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죽고 1942∼1943년 당시 가족 구성원들의 훗날의 삶과 죽음에 대한 회상이 전개된다.
넷째는 작가가 직접 등장하여 자신의 삶의 주요 장면과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개개인의 황폐한 삶이다. 그 황폐함은 너무도 끔찍하고 고통스러워서 거의 인간에 대한 환멸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온통 불화와 적의만으로 이루어진 듯이 보이는 그 부정적인 삶들은 차라리 폐기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실제로 그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 니자오의 젊은 시절을 통해 그러한 삶들의 폐기를 주장하며 이모와 외할머니를 반동분자로 고발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난득호도’라는 글씨를 계기로 시작된 회상 속에서 그 삶들은 부정적인 동시에 진정성을 지닌 모순된 모습으로 재현된다. 이 모순의 발견은 이미 니자오 자신이 1957년 우파분자로 몰려 핍박받았을 때부터 잠재되어 있던 것이고, 그 잠재태가 1980년의 회상을 통해 현재태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왜곡된 삶 속에 숨어 있는 진정성과 의미, 그 모순을 보지 못하거나 부인하는 이상(理想)은 그 자체로 인간에 대해 억압적일 수밖에 없으며 거짓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작품의 강력한 전언이다.
이는 작중 인물 니자오와 작가 왕멍의 자기반성이며 나아가서는 중국의 사회주의혁명 전반에 대한 근본적 반성이고 개혁 개방이라는 새로운 현실과 미래에 대한 비판의식의 점검이다. 20세기 중국이라는 특정한 맥락 속에서 제기된 이 메시지는 그 맥락에만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 호소력을 지녔다.
이 작품에서 문학적으로 특히 주목할 것은 시점과 화법의 복합이라는 특유의 서술 방식을 통해 왜곡된 삶 속에 숨어 있는 진정성과 의미가 설득력 있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 서술 방식을 깊이 음미할 때 한층 풍부한 독서가 가능해질 것이다.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어중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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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13>카오스-제임스 글리크

인류의 정신을 이끌고 있는 다수의 지성인 사이에 요즈음 유행하는 것 중 하나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지금은 ‘복잡한 것은 조각으로 분해하여 각 조각을 이해하면 전체를 알 수 있다’는 사상이 빛을 잃어가고 있고,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의 것’이라는 오래된 사상이 다시 유행하면서 공동체에서 새로이 나타나는 창발현상(創發現象)을 이해하려고 많은 이들이 노력하고 있다.
인터넷의 홍수, 수십억 개의 염기 등 방대한 정보를 다루기 위해서는 복잡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며, 과거의 정량적인 방법보다는 정성적인 방법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학자들은 잘 알고 있다.
과거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던 현상들을 카오스나 프랙털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인류의 생각과 정신은 한층 더 커가고 있다.
거울을 바라보면 눈동자 속에 자신의 얼굴이 보이고, 그 속의 눈동자에는 다시 내가 들어 있고, 그 속에는 또다시 내가 있는데, 이같이 ‘나 안에 나 있다’라는 현상은 자연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수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복잡계론, 비선형 동역학계론, 네트워크나 링크 등 다양한 이름으로 위와 같은 현상을 연구하고 있고, 그중 대중적 인기를 타고 있는 것이 카오스와 프랙털 기하학이다.
여기에서 카오스란 ‘질서 속의 무질서’를 뜻하기도 하고, ‘결정적인 미래 속의 예측불가능성’을 말하기도 하며, ‘신문에 난 조그만 칼럼’이 ‘인류의 의식 혁명’을 이룰 수 있다는 ‘나비효과’를 이르기도 한다.
카오스는 날씨에 대한 장기간 예측이 어려운 이유를 설명하고 주식시장의 비주기적 변동, 전염병 확산이나 생태계의 변화, 심장의 박동, 밀가루 반죽하기라든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주기 등 많은 것을 설명한다. 프랙털 또한 자연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식물의 잎이나 해안선의 모양, 산이나 구름의 모습, 허파꽈리의 생김새, 핏줄의 분포 등 프랙털이 아닌 것이 없다. 프랙털은 디지털 자료의 압축 등 여러 곳에 응용되고 있다.
복잡계를 연구하는 이들은 ‘무질서 속의 질서’를 본다.
이들은 무작위성을 설명하기도 하고, 지휘자 없이도 한 무리 반딧불이가 다같이 불을 깜빡이는 것이라든지, 철새가 줄지어 나는 것 등을 연구하기도 한다.
제임스 글리크 씨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고 뉴욕타임스에서 오랫동안 저널리스트로 근무한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그는 비록 과학자는 아니지만 1980년대에 유행하던 과학적 사고의 변화를 방대하게 수집하여 아름다운 이야기인 ‘카오스’를 만들어냈다.
이 책을 통하여 많은 수학자와 과학자가 위대한 자연을 이해하기 위하여 바치는 열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악보 읽기, 시 읽기, 그림 읽기 등 다양한 읽기가 있듯이 ‘카오스’를 읽을 때에도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과학적 생각을 맛본다는 자세로 대한다면 더 넓은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김홍종 서울대 교수·수리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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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14>역사-헤로도토스

기원전 484년에 헤로도토스는 에게 해 소아시아 연안의 항구도시인 할리카르나소스(지금의 터키 보드룸)에서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치적 이유로 사모스 섬에서 잠시 망명 생활을 거친 뒤 오랫동안 아테네에서 지냈는데 그때 그는 정치가 페리클레스 및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와 친교를 맺게 됐다.
그는 ‘이야기꾼’으로 청중에게 주로 아테네 여러 명문 가문 이야기, 전쟁 이야기, 그 밖의 역사적 사건들, 미지의 땅에 대한 경이로움을 들려주었다.
그는 여러 그리스 도시를 방문하고 주요 종교축제나 경기가 열릴 때마다 그곳에 가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기원전 43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져 그리스 세계가 양분되자 페르시아의 제국주의 팽창정책에 맞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양국이 동맹국으로서 어깨를 나란히 해 싸웠던 것에 초점을 맞춰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체로 꾸민 것이 ‘역사’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아버지다. 역사란 시대의 증인이고, 진리의 빛이며, 기억의 되살림이고, 삶의 스승이며, 옛 세계의 소식 전달자라고 정의를 내린 키케로가 처음 그렇게 불렀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인과 이방인의 위대한 업적들을 기록해 둠으로써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고 특히 왜 양대 세력이 서로 전쟁을 하기에 이르렀는지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진실을 묻고 찾아 추적하는 탐구자’로서 ‘탐구’라는 뜻의 ‘역사(Historiai)’를 썼다.
그는 들은 그대로 기록하고 전해지는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을 서술 원칙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이 세상이라고 알고 있는 모든 곳을 찾아다녔다. 아프리카인, 아랍인, 카르타고인, 키프로스인, 이집트인, 이탈리아인, 팔레스타인인, 스키타이인 등을 직접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이 ‘역사’의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역사’는 전부 9권으로 되어 있지만 이는 헤로도토스 본인이 구분한 것이 아니라 후대의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이 편의적으로 나눈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 자신이 9개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된 ‘역사’를 청중 앞에서 직접 낭독했다는 카그나치의 주장이 있다.
그에 의하면 ‘역사’ 9권은 각기 3개(제5권은 4개)의 낭독 단위로 나뉘어 전부 28개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각각은 대략 4시간에 걸쳐 청중에게 낭독되었다는 것이다.
내용을 보면 1권에서 6권까지는 페르시아 제국의 성장을 다루고 있다. 최초의 아시아 군주인 리디아의 크로이소스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정복하는 것에서 시작해 마라톤 전투(19강·講)에서 페르시아인들이 패퇴하는 것으로 끝난다. 다음 7∼9권은 10년 후 마라톤 패배를 복수하고 그리스를 페르시아 제국에 흡수하려는 크세르크세스 왕의 기도를 묘사한다.
‘역사’는 테르모필레 전투(22강), 살라미스 해전(24강)을 거쳐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패퇴(26강), 아테네 제국이 수립되는 제28강으로 끝난다.
이 책은 최초의 ‘동서대전(東西大戰)’을 다룬 것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동서 문명의 충돌을 살펴보게 한다.

허승일 서울대 교수·역사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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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15>탁류-채만식

소설은 감성 혹은 느낌으로 파악한 당대의 역사이다. 한국의 근대사를 감성 차원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내 인식 영역에 수용하기 위해서는 한국 근대소설사에 우뚝한 몇몇 작품을 읽어둘 필요가 있다. 채만식의 ‘탁류’는 한국 근대사를 파악하는 데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한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근대 한국의 초상을 한마디 느낌으로 포착한다면 ‘탁류’라는 말에 앞설 어휘가 없을 듯하다. ‘청류(淸流)’보다는 ‘탁류(濁流)’에 주목한 까닭은 탁한 역사의 흐름, 무뢰배(無賴輩)들이 횡행하는 현실의 실감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첫 줄은 ‘금강(錦江)…’이다. 줄을 바꾸어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동께서 남북으로 납작하게 째져 가지고는 …(중략)…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로 이어진다. 이렇게 서술자는 느긋하게 금강이 주는 느낌에서 글 읽기를 시작하라고 암시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요 무대는 식민지 수출항 군산과 서울이다. 군산은 왜곡된 식민지적 근대화의 핵심이 되는 지역성을 지닌 곳이다. 지리적으로는 ‘탁류’가 흘러나가는 항구도시고, 근대화의 산물인 통신시설이 정비된 곳이며, 식민지 경제의 상징인 ‘미두장’이 운영되는 공간이다. 군산은 통신과 돈과 무질서와 혼란이 뒤엉킨 크로노토프(시공간)로서 이 소설의 주제를 상징화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펼쳐지는 인간사를 훑어보고 나서 그 느낌을 바탕으로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 주제는 느낌을 되새김질하면서 주입하는 이성의 타액(唾液)에 실려 나온다. 수은 위에 금이 뜨듯이.

우리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탕개가 풀려 흐느적거리며 탁류에 휩쓸리는 인간들을 만나게 된다. 단작스러운 인간 정주사, 몰염치한 인간 고태수, 가증스러운 인간 장형보, 음흉한 인간 박제호, 그리고 자기를 지킬 만한 깨달음도 선한 싸움을 위한 의지도 결핍되어 있는 초봉이 등 속된 세계를 살아가는 속물 군상이다. 그런데 이런 속물들은 따져보면 식민지 체제에서 속물로 살기를 강요당하는 인물들이다. 이런 판단은 탁류라는 ‘느낌’ 뒤에 진통을 수반하는 자성에서 비롯된다. 깨우침이 있는 독자는 이런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스스로를 닦달한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란 무엇인가’ ‘식민주의란 무엇인가’ ‘역사 전망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식민주의의 노예적 속성에 희생된 것이 초봉이의 삶이다. 식민지 경제구조 안에서 운영되는 가족을 앞세워 자기를 희생하는 초봉이의 태도는 그 체제가 주입한 노예근성의 다른 얼굴이다. 여기서 우리는 군사적, 경제적 수탈을 거쳐 정신의 노예근성을 심어 놓은 식민주의가 빚어내는 절망감의 원인을 알아낸 셈이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이 왔다고 그 깨달음을 따라 실천할 시간 여유가 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서 비극은 비롯된다. 이 비극을 극복해 내는 데는 허구적 상상력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역사의 질곡에서 살인죄인이 된 초봉이의 앞길, 그것이 민족의 운명이라면 그 운명을 보듬어 안고 살 길을 찾아 나서는 데는 작가와 독자의 상상적 전망이 유일한 길이다. 이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나서는 지적 모색이 소설을 읽는 이의 의무인 까닭은 그것이 역사에 독자가 함께 참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한용 서울대 교수·국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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