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6>간디 자서전-마하트마 K 간디

간디자서전은 부제인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가 말해 주는 바와 같이 비폭력을 통해 이룩한 순수영혼의 투쟁사이다.
이 자서전이 선정된 것은 그의 사상이 제3세계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간디 스스로 그 사상의 가능성을 실천적 삶을 통해 온몸으로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간디는 가히 서양사상 일변도의 사상사에 실천으로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간디는 비폭력 무저항운동으로 인도의 독립을 이룬 것으로 유명한데, 이 자서전은 제1차 불복종운동이 한창이던 1920년까지의 간디의 전반부 인생을 기록한 것으로 독립운동 이전의 기록이다. 그럼에도 이 자서전이 널리 읽히는 까닭은 그의 기본사상과 실천방법이 이 시기에 이미 확립되었고 이 자서전이 그 과정을 가감 없이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간디자서전에서 연약하지만 너무나 순수해서 그 어떤 폭력에도 맞설 수 있는 위대한 영혼을 보게 된다. 간디의 사상은 비폭력(Ahimsa)을 통한 진리파지(眞理把持·Shata Graha)라고 요약할 수 있다. ‘Ahimsa’는 모든 생물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삶이 있다”는 간디의 말은 그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간디가 아무도 실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확신도 가질 수 없었던 비폭력 무저항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생을 일관되게 사랑과 용서, 포용을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기실 비폭력을 외친 것은 간디가 처음이 아니다.
모든 종교는 폭력을 배제하지만 이들 종교는 이런 가르침을 개인의 삶에서만 다룬다.
간디가 위대한 것은 비폭력을 공공(公共)의 삶 속으로 끌어들였고, 이를 통해 정의롭지 못한 상태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였기 때문이다. 간디에게 있어 비폭력은 나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강한 사람만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간디가 진리파지 운동을 벌일 당시의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 착취로 민중의 활력이 메말라버린 빈곤과 패배주의의 시대였다. 인도는 150만의 인원과 3억 파운드의 군사비를 제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수행에 적극 협력하였지만, 이에 대한 영국의 보답은 민족운동에 대한 강화된 탄압이었고 인도인들은 절망과 무기력 속을 헤매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열악한 상황에서의 비폭력 무저항운동은 쉽게 떠올릴 수 없는 무모함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을 성공시킨 원동력은 간디의 높은 도덕성이었다. 간디가 가진 도덕적 우위는 그 어떤 것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영국의 총칼을 극복함으로써 세계인들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이 자서전은 특히 청소년들에게 좋다. 간디의 이상은 고원하고 그 실천은 따라하기 어렵지만, 이 자서전은 너무나 진솔한 자기 고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 자서전을 읽으면서 간디가 위대한 넋으로, 성자로 추앙받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도덕성의 힘을 증명하는 간디자서전은 물질 위주의 세상을 살아가게 될 우리 청소년들에게 더없이 유익한 인생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흥식 서울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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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7>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별과 재회 또는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이다. ‘스완네 집 쪽으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편으로, 그러한 모색의 실마리에 해당한다.
작품세계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것은, 우리가 부단히 죽어 가고 있다는 세네카 식의 인식이다. 특히 망각현상이 그 극명한 예이다. 까마득히 먼 유년시절에 겪었던 일들은 물론, 불과 며칠 전의 일들도 쉽게 잊거나 잊혀진다. 그것이 프루스트가 인식한 우리의 정서적 모습이다. 다시 말해 살아 있음의 뚜렷한 징표인 우리의 정서적 퇴적물은 그렇게 덧없이 지워진다.
그러나 영영 지워지는 것일까? 그렇게 죽어 소멸되는 것일까?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의 중심적인 의문이다.
물론 지난 세월의 일들을 기록에 의지하여, 또는 다른 수단의 도움을 얻어 인위적으로 기억해 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은 우리 개체 고유의 실존적 체험과는 무관한 사건들이다. 그러한 사건들의 특징은 온갖 유행이념이나 잡다한 교조(敎條), 주입되거나 들쑤셔진 억지감정 등에 의해 빚어진 그 무엇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속성상 다소간의 거짓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과거의 부활도 있다. 아직 봄바람 차가운 어느 날 오후 양지쪽 밭두렁을 무심히 걷던 중 문득 엄습하는 황홀감에 넋을 잃고 걸음을 멈추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때로는 눈물이 왈칵 치솟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참냉이 잎이 눈에 띄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 다음 순간이다. 그리고 나물 캐던 누나를 따라다니던 시절이, 냉이죽조차 먹지 못해 누렇게 부황에 떠서 죽어 가던 이들을 대동하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다시 한순간이 더 지나서이다. 또한 어떤 때는 어느 묏부리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설레지만, 아무 추억도 되살아나지 않는다. 부활된 것의 정체가 영영 밝혀지지 않는 경우이다.
‘잃어버린 시간’은 그토록 하찮은 사물에 의해 촉발된 황홀감이나 격정의 비밀을 깨달아 가는 역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터득한 ‘진정한 예술’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시간’은 ‘잃어버린 줄로 믿었던 시간’을 가리키는 반어법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존재적 체험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프루스트가 ‘되찾은 시간’이라고 명명한 그 시절 또한 단순한 과거의 어느 순간만이 아니다. 지극히 하찮은 사물과의 우연한 접촉에 의해 부활된 그 상태, 비등(沸騰)성 황홀감을 수반하는 그 찰나적 상태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소설의 주인공은 일체의 현상세계로부터 이탈한 자신의 초월적 본질을, 다시 말해 불멸의 가능성을 감지하기도 한다.
삶의 허망한 실상을 절감한 이들에게는 작은 위안이 될 수도 있고, 존재의 새 국면을 보여 줄 수도 있는 작품이다. 문학 및 예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소설로서 어떠한 평가를 받을지는 세월의 여과작용을 더 기다려야 할 듯하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및 ‘스완네 집 쪽으로’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경우가 많은데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스완 씨 댁 쪽으로’가 정확한 번역이다.

이형식 서울대 교수·불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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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8>국가-플라톤

정치공동체의 목적은 무엇이며 가장 좋은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정의란 무엇이며 과연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더 행복한가? 서양세계 첫 정치철학서로 평가되는 플라톤의 ‘국가’는 이 같은 물음을 제기하며 정치공동체 내에서 인간의 삶을 전체 모습에서 검토한다.
이 책은 페르시아전쟁에서 승리한 저자의 조국 아테네가 50여 년의 융성기를 보낸 후 스파르타와의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전쟁으로 몰락해 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특히 이 책에는 그가 사랑하던 아테네 식 정치공동체의 회생에 대한 저자의 깊은 소망이 담겨 있다.
그는 또 자신의 이상국가 소망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할 것임을 예견하고는 그런 국가가 지상의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라고 책의 말미에 밝히기도 했다. 유토피아를 통해 그가 그린 것은 허황한 꿈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진 능력이 최상의 수준에서 발휘되는 공동체의 모습과 그 성립을 위한 조건이다.
이 책에 담긴 그의 성찰은 그 시대와 지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상황이나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삶의 문제를 얘기할 때도 언제든지 대입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데 특히 의미가 있다.
이 책은 오늘의 시각에서도 대담하다고 할 수 있을 많은 주장들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철인통치론이나 시인추방론, 사유재산을 갖지 않는 통치자들의 이상적 공산공동체 구상, 여성통치자가 등장할 기회 부여, 그리고 교육의 공공성에 대한 주장 등이 그렇다. 이런 주장 중에서 지금까지 가장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온 것은 ‘국가는 정의를 토대로 할 때에만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과 ‘앎에 기초한 통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모든 이에게 각자의 것’이라는 정의 아래 △개개인이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하고 △그에 합당한 것을 배분받으며 △각자 타고난 능력이 최대한 발휘되는 공동체가 가장 좋은 나라라고 규정했다. 그는 또 구성원들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공동체를 통치하면 그 나라가 가장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며 이를 ‘철인(哲人)통치’라고 정의했다. 이는 서양문명 초창기의 ‘지식국가’ 모습을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어제 나눈 긴 대화를 다시 전하는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대화가, 누구와, 어떻게 이어질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이런 설정을 통해 대화자가 누구이며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 향후 논의내용과 전개방향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열린 구조’를 갖게 된다. 독자들은 어느 단계에서나 전혀 다른 논의 전개를 시도하며 대화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방식을 통해 플라톤은 철학이 특정한 교설(敎說·가르치고 설명함)의 ‘굳은 체계’가 아니라 주어진 문제에 관해 진리를 추구하며 이것이 대화를 통해 이뤄지는 ‘생동하는 현장’임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플라톤은 제기되는 물음과 비판에 대해 방어하며 근거를 제시하는 탐구의 작업만이 학문이며 철학일 수 있다고 강조해 왔다.

박종현 교수의 공들인 번역 덕분에 2500년 전의 고전을 한국의 독자들도 정확하고도 유려한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김남두 서울대 교수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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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9>한중록-혜경궁 홍씨

1762년 음력 윤달 5월 13일 영조대왕이 큰아들 사도세자의 처소를 찾아갔다.
양력으로 치면 8월 초쯤, 무더위로 푹푹 찔 때다.
왕은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죽음의 그림자를 보면서도 세자는 “아바님, 아바님, 잘못하였으니, 이제는 하라 하옵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하고 목이 메도록 빌었다. 섬돌에 머리를 부딪기도 했다. 11세의 어린 손자(후에 정조)까지 할아버지께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영조의 결심은 반석 같았다. 세자를 죽이고자 하는 뜻을 쉬 이루지 못하자, 급기야 뒤주를 가져오라 했다. 재촉과 만류가 되풀이되면서 시간은 어느덧 밤이 되었다. 세자는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주에 들어갔다. 거구의 세자는 왕이 직접 꽁꽁 봉한 좁은 뒤주 속에서 어둠, 무더위,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아흐레 만에 숨졌다.
이 과정을 지척에서 겪은 이가 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다. 혜경궁은 이 참혹한 광경 앞에서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시아버지가 남편을 죽였건만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시아버지가 지존이니 어디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혜경궁은 아들이 왕위에 오르고도 20년 동안 한을 가슴에만 품고 지내다가 환갑을 맞을 때쯤에야 옛일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한중록’을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총 5차례에 걸친 회고록을 총칭한 것이다. ‘한중록’은 일관되게 기획된 글이 아니어서 구성이 체계적이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도 적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중록’은 좋은 문학 텍스트는 아니다. 게다가 역적으로 몰린 아버지, 아들 정조에게 사사(賜死) 당한 작은아버지, 유배지에서 죽은 동생 등 대개 친정 식구들을 변호하기 위해 쓴 글이어서 절제되지 못한 감정의 분출을 보인다. ‘증오의 서’라 불릴 만큼 직설적이다.
하지만 정제되지 못한 표현과 감정이 ‘한중록’의 매력이기도 하다. 꾸미지 않고, 멋 부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러 이본(異本) 중에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소장본처럼 자기 부모의 부부싸움까지 시시콜콜 다 얘기하는 이본을 더 가치 있게 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중록’의 가치는 전대미문의 끔찍한 사건을 다루었다는 점이나 혜경궁의 글 솜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을 지켜보는 필자의 시선이다. 혜경궁은 가해자 영조의 며느리이자 피해자 사도세자의 아내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한때 외가를 공격한 적도 있는 정조의 어머니다. 이 복잡한 상황을 당사자의 필치를 따라 읽어가면서 정치, 인간관계, 인간 심리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에 이를 수 있다.
영문 번역본 ‘한중록’을 펴낸 미 컬럼비아대 김자현 교수는 수업시간에 미국 학생들에게 ‘한중록’을 읽혔더니 아주 반응이 좋더라고 했다. 무릇 고전은 국적을 뛰어넘는 법이다.
현재 출간된 ‘한중록’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김동욱 선생이 교열하고 주석한 ‘한듕록’(민중서관·1961)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여타의 ‘한중록’은 대부분 이 책을 쉽게 풀어낸 것으로 보인다. 김용숙 선생의 역저 ‘한중록 연구’를 참조하며 ‘한듕록’에 도전해 보자.

정병설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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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10>도덕계보학-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가 ‘도덕의 계보’를 1887년에 출간한 것은 이미 8권의 저서를 낸 후였다.
이 책은 니체가 1886년 그의 사상을 종합해 출간한 ‘선악의 피안’의 속편으로 그 책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술된 약 160쪽의 비교적 얇은 책이다.
니체는 사상에서 가장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도덕적 가치’가 무엇이며 어떻게 생성됐는지를 이 책을 통해 탐구하고 있다. 그는 도덕적 가치의 기준이라는 것들이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행위들을 통해 오랫동안 강요되면서 뿌리내려오게 됐다는 것을 분석적으로 보여주려 하고 있다.
이 책은 도덕적 가치 기준 중 공존하지만 구별되는 두 가지 기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는 ‘좋다’와 ‘나쁘다’, 그리고 이와는 구별되는 ‘선하다’와 ‘악하다’라는 두 쌍의 기준이다. 그는 이 두 기준이 명확하게 다른 연원을 갖고 있으며, 또 서로 다른 역사를 거쳐 발달해왔다고 강조한다.
니체는 ‘좋다’와 ‘나쁘다’의 가치 기준은 객관적인 기준으로 확립된 것이라기보다는 권력을 독점하던 종족 집단이 스스로를 ‘좋다’고 일방적으로 정의하고 이를 강요한 결과로 생긴 기준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가치 기준은 ‘금발의 야수’로 불리던 게르만 전사(戰士) 귀족들의 것이었고, 게르만의 관습이 그들이 지배하던 유럽 대륙 전체로 전파돼 유럽 사회의 일반적 속성으로 뿌리내리면서 굳어진 기준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선하다’와 ‘악하다’의 기준은 다수의 피지배 계층이 갖고 있던 지배자들에 대한 원한과 증오의 표현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당시 전사 귀족들과 갈등 관계에 있던 성직자들이나 유대인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그는 성직자들이 대중의 원한을 활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했다고 주장한다.
즉, ‘선’과 ‘악’이라는 기준은 피지배층이 갖고 있던 원한을 분출해 지배자들에게 복수하는 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복수는 현실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우회적인 형태로 지난 2000년 동안 서서히 서구인들에게 정착돼 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러한 가치 기준이 만들어낸 결정체가 바로 ‘금욕적 이상’이라고 결론짓는다.
니체는 이 책에서 ‘선과 악’이라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분출하는 본능에 따라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강력한 동물로 인간을 회복시키려 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이 ‘차라투스트라’처럼 자신을 극복하는 위대한 모습으로 삶을 긍정하고 운명을 사랑하는 존재로 진화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초인’이란 독재적 영웅이 아니라 자신을 극복하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인간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또 사회적 약자들의 원한이 만들어내는 독소는 특히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이 책은 결국 사회적, 개인적인 원한이 쌓이면 그 사회 또는 개인에게 독이 되어 돌아오므로 이들이 핍박받지 않도록 자유주의의 확산, 창의력의 독려가 사회 구성의 중요한 요소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을 되새겨 봐야 한다.

최정운 서울대 교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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