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박성창]<1>광장-최인훈

최인훈은 전후 한국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하나로서, 작품들을 통하여 한국인의 삶의 궤적을 20세기 세계사의 진폭 속에 위치시키면서 동시에 인간 존재의 본질 규명에 주력해온 폭넓은 사유를 보여준 바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광장’은 1960년에 발표된 이래로 지금까지 여러 세대를 거쳐 읽혀온 작품으로서,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도 새로운 경험과 지적 모험을 자극하는 ‘현재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 작품은 분단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넓게는 한국문학사, 좁게는 한국 소설사에서 큰 의미와 중요성을 지닌다. 물론 ‘광장’ 이전이나 이후에도 남북의 분단 상황과 좌우 이데올로기를 다룬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편향된 시각으로 분단문제에 접근한 이 작품들을 엄밀한 의미에서 분단문학이라고 평가하기 힘들다.

최인훈은 이 작품에서 북한의 공산주의 이념과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대해서 냉철한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깊이 있는 비판과 성찰을 보여준다. 분단 현실에 대한 이러한 냉철하고도 균형 있는 성찰은 이념의 본질과 진정한 삶의 행복과 관련해 오늘날까지도 소중한 통찰의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항(二項)대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제3의 이데올로기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지만, 기실 이러한 절망감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절실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히 인간성을 말살하는 이념의 횡포에 대한 성찰에 지나지 않는다면, 명시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쓴 대부분의 이념소설이 그렇듯이 한국소설사에서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삶의 일회성에 대한 첨예한 인식이나 개인과 사회의 긴장과 갈등, 인간 자유의 문제 등과 같은 실존주의적 주제들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또한 ‘광장’은 ‘이명준’이라는, 한국소설사에 보기 드문 관념적 주인공을 창조하였으면서도 인간의 내면심리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통하여 4·19 혁명 이후의 한국 소설이 전후(戰後)소설의 관념적 경향에서 벗어나 내면 공간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한 중요한 전기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의 중요한 주제로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사랑’이 언급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광장’은 ‘광장을 읽는 일곱 가지 방법’이라는 비평서가 출간될 정도로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는 작품인데, 이러한 소설의 열린 구조는 이 작품을 비롯하여 최인훈 소설의 ‘현재성’을 담보해주는 중요한 원동력으로 기능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처음 발표된 이래로 무려 여섯 번의 개작과정을 거쳐 다듬어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언어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개작과정에 대한 관찰을 통해 작가의 수정 및 첨삭 작업이 작품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것도 작품 감상의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 대한 독서를 출발점으로 이른바 ‘분단문학’ 전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거나 또는 작가가 1994년에 발표한 ‘화두’를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독서체험이 될 것이다.

박성창 서울대 인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05.03.31 - 05.07. 29 기획연재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2>돈키호테-세르반테스

문학이 창조해 낸 으뜸가는 인물 전형 중의 하나는 돈키호테일 것이다.

그것은 어릿광대 같은 희극적 주인공 돈키호테에게서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 상황에 실존적으로 반응하는 인간의 비극적 한 단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돈키호테의 희비극은 그의 시대착오적 기사(騎士) 편력에서 비롯된다. 몰락한 하급 귀족 출신으로 쉰을 넘긴 나이에 기사소설 읽기에 미쳐 있던 주인공이 마침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녹슨 투구와 갑옷, 낡은 창과 방패로 무장하고 몸소 편력 기사로 나서는 것이다.

출정은 세 번에 걸쳐 이어진다. 첫 출정은 혼자 떠나지만 두 번째 출정에는 우직한 농부 산초를 설득해 종자(從者)로 동반하고 나선다. 여기서 주인과 종자 사이에는 복고적 기사세계의 이상주의와 그것을 거부하는 현실주의가 간단없이 충돌하며 긴장과 유머를 빚어낸다.

대립하는 두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의와 우정을 다하는 두 인물의 인간적 조화는 세르반테스가 엮어낸 휴머니즘의 정수라고 할 것이다. 마지막 출정에 나선 돈키호테는 마침내 백기사와의 결투에서 지고 귀향길에 올라 기사 편력을 마감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결말이 비극적인 것은 돈키호테에게 존재 이유의 상실을 뜻하는 것이요 실존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돈키호테의 의미는 세 가지 관점에서 얘기할 수 있다. 우선 문학사적 관점에서 소설의 효시라는 의미를 지닌다. 17세기 전후 스페인 사회의 구체적 현실을 배경으로 연극을 비롯한 다양한 서사 장르의 주제와 형식을 실험적으로 종합한 것이다.

서사 시점을 다양화시켜 여러 일화와 인물과 행위를 일관된 구조와 플롯으로 교직(交織)해 내는 것, 대화를 통해 캐릭터를 창조해 내는 것, 인물들의 중층적 관점을 대비시켜 리얼리티를 증대시키는 것 등 세르반테스의 서사 형식에 대한 문제의식은 소설의 원형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키호테를 소설 중의 소설로 꼽게 되는 것이다.

또한 돈키호테는 이성적 사유 능력을 근간으로 하는 서구 근대사회의 인문주의적 인간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돈키호테의 맹목적 기사 편력은 산초의 합리적 이성에 대해 비이성적이지만, 윤리적 관점에서 정의를 가치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산초보다 이성적이다.

햄릿이 극단적으로 계산적인 개인주의 이성으로 번민하고 있다면 돈키호테는 개인주의적 합리성을 떠나 도덕적 이성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투르게네프는 진리와 허위,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햄릿과 견줄 때 돈키호테의 미덕은 무엇보다 도덕적 선의 의지를 투명하게 그려낸 데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돈키호테는 서구의 종교개혁과 아메리카 진출, 그리고 과학의 발전과 인쇄술의 혁명 등 제반 사회변동 가운데 도래한 근대사회의 문화적 결실이라는 데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의미를 넘어 돈키호테의 고전적 가치는 무엇보다 시공을 초월해 되새겨지는 휴머니즘 정신에 있다. 그래서 웃음과 풍자로 17세기 스페인인들에게 유쾌한 지적 훈련의 동기를 제공했다면, 오늘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변함없는 유머와 해학으로 정보화 시대에 요구되는 자기반성과 성찰의 동기를 부여해 주고 있는 것이다.
 

김춘진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동아일보 05.03.31 - 05.07. 29 기획연재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3>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로알드 호프만

우리 몸은 140억 년 전 빅뱅우주에서 만들어진 가벼운 원소인 수소와 그보다 수십 억 년 후 어느 별에서 만들어진 무거운 원소들이 만나 이루어진 화학원소들의 집단이다. 그렇다면 요즘처럼 ‘화학물질’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로만 사용하는 것은 얼마나 자기 비하적인 일인지 모른다.

문제는 현대를 사는 교양인에게 화학의 전모를 제대로 전달하는 책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1981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고 나서 세 편의 시집과 시화집을 출간했고, 심미적 혜안으로 과학을 해석하는 많은 글을 남긴 호프만의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The Same and Not the Same)’는 참으로 권장할 만한 책이다.

호프만은 다음 두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화학이 어떻게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지를 흥미롭게 서술할 뿐 아니라 과학의 오용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보여준다.

“나는 과학의 전체적인 영향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가장 깊은 의미에서 민주화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옛날에는 특권 엘리트에게만 허용되었던 필수품과 안락함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창조물이 어떻게 이용되고 오용되는가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화학은 비료를 통한 영양의 증진, 소독을 통한 위생의 향상, 의약품을 통한 질병의 퇴치 등에 기여함으로써 지난 한 세기 동안에 인간 수명이 두 배로 연장되는 데 중요한 몫을 했다.

반면 이처럼 우리 삶에 안락함을 가져다준 화합물들이 환경오염을 가져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화학의 발전에는 대립적인 요소들이 긴장을 조성한다. 서로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한 화합물의 미묘한 차이 때문에 어떤 물질은 뛰어난 약효를 나타내고, 유사한 다른 물질은 부작용을 가져오는 긴장감이다.

화학에서 대립적 요소는 결합-분해, 정적-동적, 평형-섭동(攝動·주요한 힘의 작용에 의한 운동이 부차적인 힘의 영향으로 인하여 교란되어 일어나는 운동), 천연물-합성물, 순수-불순, 유익-유해, 순수-응용 등 여러 면에서 드러난다. 호프만은 이런 다양한 화학의 대립적 요소에 대해 적절한 사례를 통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한편 대부분의 화학자가 화학의 실용성만을 내세우고 화학에 대한 일반인의 무지와 부당한 공격에 대해 소극적이고 방어적으로 대응하는 데 비해 호프만은 환경론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는 열린 자세를 보여준다.

호프만이 말하는 대로 우리가 물질세계에 대해서, 특히 인간이 세상에 더해 놓은 합성화합물에 대해 기본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 문을 닫아버리고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확대를 배척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21세기의 민주 시민에게 어느 정도의 과학 지식은 필수적이고, 일반인에게 과학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책이 긴요히 요구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화학의 인간적이고 예술적인 면을 보여주는 이 책은 진정한 교양과학도서라 할 만하다.

김희준 서울대 교수·화학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4>루쉰 소설전집-루쉰

고전과 만나는 계기는 다양하다.

우연하게 눈에 띄었는데 알지 못할 힘에 끌리기도 하고, 대학입시를 준비하다 만나기도 한다. 글자로만 만나는 것도 아니다. 만화로도 만나고 영화로도 만나며, 요즈음은 컴퓨터 게임을 통해서도 만난다.

고전과 독자의 관계도 일방통행만은 아니다. 첨단의 멀티미디어 환경과 초국적 자본주의 체계는 고전을 더 이상 ‘순수의 영역’에 가둬두지 않는다. 읽고 마음에 담고 실천하는 방식에서, 인터넷 게시판 소설이나 온라인 게임에서와 같이 읽고 다시 쓰고 변형하는 방식으로 고전이 소비된다. 고전이 안 읽힌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고전의 두루누리(유비쿼터스·어디서나 존재함)화가 진척되는 시대가 되고 있다.

고전과 만나는 계기와 방식이 다변화된 시대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고전을 대할 것을 주장하는 일은 고전을 죽이는 행위와 진배없게 된다. 실제로 많은 고전이 그렇게 죽어갔다.

고전의 장점은 그 자체에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절대적인 진리를 내장하고 있음에 있지 않다. 고전은 ‘카오스’일 따름이다. 모든 가능성이 발현되지 않은 상태로 담겨 있다. 독자는 저마다의 관심사와 필요를 갖고 고전에 들어가, 각자의 필요대로 답을 얻고 길을 찾는다.

고전이 안겨주는 삶과 사회, 인간에 대한 본원적인 통찰과 해석은 이렇듯 고전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고전은 일종의 미디어(매체)다. 혼자 있어도 빛을 발하고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의 만남 속에서 그 가치가 확인되고 그 쓸모가 확산되는 존재이다.

루쉰(魯迅·1881∼1936)은 이런 면에서 꼭 짚고 넘어갈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중국현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던 그는 중국에서뿐 아니라 중국 바깥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현대 중국작가이다. 이는 그의 소설이 지닌 미디어로서의 뛰어난 성능 때문이었다.

실제로 중국인은 그를 통해 자신의 전통과 근대를 성찰했고, 일본인은 그를 통해 자신의 근대와 근대 너머를 사유했다. 저마다 자신의 문제를 갖고 들어와 그의 소설에 비추어보고 뭔가 답을 얻어갔다. ‘지금-여기’의 고민을 비쳐볼 수 있는 거울, 루쉰의 소설은 그래서 고전이 될 수 있었다.

‘루쉰소설전집’에는 그가 평생 출간한 3권의 소설집이 모두 담겨 있다.

첫 번째 소설집은 ‘함성((눌,열)喊)’이다. 여기에는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인 ‘광인일기’와 중국인의 본성을 날카롭게 해부한 ‘아Q정전’ 등 15편의 중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두 번째 소설집은 ‘방황’으로 여기에는 ‘축복’ 등 11편의 단편소설이 담겨 있다.

세 번째 소설집은 ‘고사신편’이다. ‘옛 이야기를 다시 쓴다’는 제목의 이 소설집은 일반 민중에게도 친숙한 신화나 전설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 일색이다. 이 방식은 루쉰이 ‘고대와 현대에서 제재를 취하여 그들을 함께 얘기하는 방식’이라고 밝혔듯이 오늘날 우리가 고전을 대하는 태도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고전은 늘 새롭게 쓰이고 만들어진다. 그건 콘크리트가 아니라 찰흙이다. 따라서 빚는 자의 의도에 따라 다양한 형상으로 빚어진다. 찰흙으로 작품을 빚어내는 마음. 고전은 마음에 있는 것이다.


김월회 서울대 교수 중어중문학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5>백년 동안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 동안의 고독’(1967)은 서구의 문학계가 지나친 실험정신으로 ‘소설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을 때 ‘소설의 소생’을 증명했다. 문단을 짓누르던 엄숙주의와 실험정신의 족쇄로부터 소설을 해방시켰던 것이다. 프랑수아 라블레식 유머문학으로 분류될 정도로 재미있으면서도 철학적 의미가 풍부하고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대표작으로 인정받는 이 소설은 1982년 작가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주었고 전 세계 대부분의 언어로 번역됐다.

소설은 ‘마꼰도’라는 가상 마을에 사는 부엔디아 집안의 7대에 걸친 가족사를 통해 서구의 식민지배와 왜곡된 근대화를 겪어온 콜롬비아의 역사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건들을 사랑과 미움, 만남과 이별, 환희와 고독, 탄생과 죽음 등 삶의 파노라마 속에 녹여 펼치면서 소재의 지역적·정치적 경계를 넘어 보편적 인간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동시에 인물들의 반복적 행태와 순환적 서사 구조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적 의미와 한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유도하기도 한다.

작가의 표현처럼 ‘돼지꼬리 달린 아이가 태어나기를 원치 않는 가족의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적인 갈등은 없지만, 대부분의 인물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관련지을 수 있는 욕망과 사회적 금기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철저하게 진지함이 결여된 이 작품에는 구약성서와 중세 서사시부터 라틴아메리카의 전설과 풍속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적 요소가 패러디와 아이러니, 유머와 함께 환상적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현실과 환상의 결합을 암시하는 ‘마술적 사실주의’는 라틴아메리카인의 존재론적 인식이 반영된 표현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자연환경과 역사, 존재양식과 사고방식에서 서구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식적, 미학적 종속관계를 단절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는 서구의 이성중심적, 리얼리즘적 전통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지어 언급되기도 한다. 중심부 담론에 의해 재단된 현실을 교정하는 대안적 세계를 창조하고, 중심부 담론의 오류를 바로잡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의는 식민 지배를 받으며 왜곡된 자아에서 탈피하면서 진정한 주체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일종의 ‘탈식민주의 글쓰기’이다. 그래서 ‘모든 것의 해체’를 지향하는 제1세계의 포스트모더니즘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마술적 사실주의는 루이스 보르헤스 식의 환상문학과 구별된다. 마르케스의 마술성이 현실에 발을 굳건히 디딘 채 이야기의 현실 비판적 기능을 강화한다면, 보르헤스의 환상성은 구체적 현실과 유리된 관념의 세계를 형성할 뿐이다. 자연히 정치·사회적 기능면에서 엄연한 차이를 보인다.

우리 소설의 경우 황석영의 ‘손님’, 임철우의 ‘백년 여관’ 등의 작품에서 마술적 사실주의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환영과 혼령, 초자연적 현상 등 비현실적 요소가 현실세계의 일부를 구성하면서 우리 근대사의 비극적 경험과 민족 특유의 의식세계를 보다 심층적으로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창민 서울대 교수 서어서문학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