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네킹 > [내가 요즘 읽는 책]김용택-'근원수필' '조선미술대요'

◇한국 미술사의 감동

7, 8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경북 봉화에 사시는 전우익 선생님이 김용준의 ‘근원수필’을 읽어보라고 해서, 문고판으로 된 그의 책을 샀지만 몇 편 읽다가 그만 두어 버린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올 겨울 방학 동안 나는 다시 김용준의 수필집 ‘근원수필’과 ‘조선미술대요’(열화당·2000)를 접하게 되었다.

그의 수필은 정월대보름 찰밥처럼 묵직하고 찰졌다. 그 맛은 마치 별 양념 없이 담아 땅에 꼭꼭 묻어 두었다가 봄에 꺼내 먹는 김치의 맛이었다. 우리 어머님은 그런 봄 김치의 맛을 ‘게미’가 있다고 했는데, 그의 글은 읽을수록 글 맛이 그렇게 진득하게 우러났던 것이다.

글을 읽고 있으면 그 속에 담긴 그의 마음이 내 몸과 마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금방 내 살이 되고 따뜻한 내 피가 되어 내 말이 되어주었다.

‘조선미술대요’의 ‘범례’ 여섯 번째에는 이런 글이 있다. ‘이 책은 미술사라기보다는, 우리가 보고 느끼는 미술품이 왜 아름다우며 어떠한 환경에서 그렇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점을 밝혀보려 애를 썼다.’

이 책은 미술사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기술한 책이지만, 글 쓴 이가 고구려의 벽화 이야기를 할 때면 마치 내 살이 꿈틀거리는 것 같아 힘이 절로 솟아나고, 백제나 신라의 예술품들을 이야기 할 때는 예술품들을 다듬고 있는 그 때 그 사람들의 모습이 내 곁에 있는 것처럼 글쓴이의 감정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의 따듯한 피가 도는 것 같은 이 미술대요는 우리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배웠던 삼국 예술의 특징, 그러니까, 고구려 예술은 대담하며 용맹스럽고, 백제의 예술은 맑고 따뜻하고 단아하며, 신라의 예술은 섬세하고도 화려하며 부드럽다는 해석은 이 책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나는 ‘근원수필’을 읽고 나서 ‘조선미술대요’를 읽었다. 수필을 읽은 뒤 흐뭇하고 즐겁고 괜히 서성거렸던 그 맛이 ‘조선미술대요’를 읽는 마음으로 쉽게 이어졌다.

‘근원수필’과 ‘조선미술대요’가 마치 한 권의 책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 두 권의 책을 읽고 내 머리 맡에 놓아두니, 세상이 든든하고, 흐뭇하고, 행복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글 속에 내 혼을 넣어 키우는 것이라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금방 다 된 떡시루의 김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김용택, 시인)


동아일보  2001.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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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내가 요즘 읽는 책]한명기-'청일전쟁'

◇또 짓밟힐 것인가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 해군의 전함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의 크기가 7000 톤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깜짝 놀랐다. 100년이 더 지난 오늘날 한국 해군의 주력 구축함이 기껏 4000 톤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함대와 교전을 벌일 당시 그 어마어마한 정원과 진원이 가지고 있던 주포의 포탄이 겨우 세 발 뿐이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 천년 동안 동아시아의 지배자로 군림해 왔던 중국이 일본에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비밀’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진순신(陳舜臣)의 대하소설 ‘청일전쟁’(원제 ‘강은 흐르지 않고’·도서출판 우석·1995)은 이처럼 사학도인 필자조차 미처 몰랐던 흥미로운 내용들을 무수히 담고 있다.

대만 출신으로 일본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저자는 19세기 후반 조선을 놓고 벌어진 중국과 일본 사이의 각축을 수많은 사료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김옥균, 대원군, 전봉준이 조선의 운명을 부여잡고 고뇌하는 모습이 나오는가 하면 조선을 ‘빼앗고’ ‘지키기’ 위해 이또 히로부미와 이홍장(李鴻章)이 벌이는 노회한 대결도 흥미진진하다.

이 책은 소설의 형식을 지녔으되 결코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100여 년 전 자국 영토의 한복판을 이민족에게 전쟁터로 내주어야 했던 우리 민족의 서글픈 과거를 담은 한편의 실록이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위기에 처한 당시 우리 모습을 국외자의 시각에서 냉정하게 평가하는 저자의 시각이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일본으로 망명했던 김옥균은 나름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일본의 실력자인 이또 히로부미와 청나라의 실력자인 이홍장을 만나 조선의 장래에 대해 담판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김옥균을 만나주지 않았다. 모두 그를 귀찮은 존재로 여겼을 뿐이었다. 이 대목에서 진순신은 나지막이 말한다. “김옥균은 이또 히로부미나 이홍장을 만나려고 애쓰지 말고 전봉준을 만났어야 했다”. 폐부를 찌르는 지적이다.

2001년 오늘 남북의 지도자는 각기 미국으로, 중국으로,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로 동분서주하고 있다. 한반도에 미치는 열강의 입김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열강끼리의 짝짓기도 여전하다. 열강의 입김을 넘어 민족 화해와 통일을 이뤄내야 할 오늘에도 김옥균에게 일침을 놓았던 저자의 시각은 여전히 소중하다.

(서울대 규장각 특별연구원)


동아일보  2001.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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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내가 요즘 읽는 책]박지향-'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재미있는 경제학

‘정보와 재미’가 비교적 쉽게 결합될 수 있는 것이라면 ‘지식과 재미’는 도무지 함께 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러나 토드 부크홀츠의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이승환 옮김·김영사·1994)는 이런 일반론을 뒤집어 놓는 빼어난 책이다.

아담 스미스로부터 케인스를 거쳐 오늘날 통화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경제사상을 일괄하는 이 책은, 읽으면서 내내 웃음을 멈추지 않게 하고, 읽고 나면 경제학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은 뿌듯함을 선사해준다.

◇스미스부터 현대학자까지 망라

경제의 세계화가 삶의 기본이 된 지금, 그 이론적 기반을 정립한 스미스와 리카도의 경제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은 아주 좋은 길잡이가 된다.

스미스의 위대한 저서 ‘국부론’은 그가 지루한 여행에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쓰기 시작한 책이었다. 리카도와 맬서스는 성격이나 그 주장하는 바가 극단적으로 반대였지만 평생 둘도 없는 친구였다.

20세기 전반기 최고의 경제학자인 케인tm는 자신의 재능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난 어쩌면 경제학에 소질이 있는지도 몰라’하고 친구에게 토로했다. 밀튼 프리드먼은 자나깨나 정부예산 축소를 주장했기에, 강의시간에 졸던 학생들은 프리드먼의 허를 찌르는 질문에 대해 ‘정부예산 축소’라고 대답하기만 하면 언제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처럼 소소한 위트가 장마다 가득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미스 이래 경제학자들의 근본적인 문제이며 어쩌면 인류가 영원히 짊어지고 가야 할 짐, 즉 어떻게 한정된 자원으로 인간의 무한한 욕구를 보다 효율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성찰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위트 곁들여 경제궁금중 풀어줘

경제학 교수들도 설명하면서 자주 실수하고 만다는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은 ‘자유무역을 해야만 우리 모두가 다같이 잘 살 수 있다’는 주장을 지지해주는 이론적 기반이지만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도 부크홀츠의 입심에 의해 쉽고 재미있게 소화돼 버린다. 관료와 입법가들은 어째서 훌륭한 정책을 마다하고 종종 열악한 정책을 택하는가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도 그가 설명하는 공공선택학파의 이론으로 해소된다.

결국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피해자가 생기게 마련이고, 좋은 경제정책이란 피해자가 발생한다하더라도 사회 전체가 누리는 혜택을 증가시키는 정책이라는 그의 명쾌한 설명은, 모두가 서로 피해자임을 주장하면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현재의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이렇게만 가르치고 쓸 수 있다면!”하는 바램을 가지게 됐다. 그런 재능을 활용하기에 상아탑은 너무 좁았는지 부크홀츠는 지금 대학을 떠나 있다.

 

(서울대교수·서양사학)

동아일보 2001.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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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내가 요즘 읽는 책]서지문-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인류학에서 겸손을

인류학적 연구는 호모사피엔스의 원형, 즉 우리 자신을 문명으로 화장하기 전의 맨 얼굴을 보여주어 언제나 흥미롭다. 인간이 삶의 터전인 자연과 자원을 이용하는 방법, 그리고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 정립을 통해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방식은 아주 기이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잘 관찰하면 인류 공통의 기본원리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흥미진진한 인류학 논문 19편이 실려 있는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한경구 외 저·문화인류학회 편·1998년)는 세계 여러 지역에 사는 다양한 종족들의 삶을 소개한다. 각 논문의 앞 부분에 우리나라 소장 인류학자들의 배경설명과 논평이 있어 이해를 돕는다.

소개된 여러 종족들의 관습, 혼인 및 친족관계의 형태, 권력구조와 권력행사의 방법 등은 신기하고 흥미진진하다. 인간사회 형성의 원형을 보여주는 그 모습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내 모습을 발견하기 위한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신선하기도 하고 약간 두렵기도 한 모험이다.

주니족 인디언 남성들은 지극히 온순해서,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 자기 소지품 보따리가 문 밖에 놓여있는 것을 보면 이혼당한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주워 자기 어머니 집으로 갖고 돌아간다고 한다. 반대로 브라질의 열대림에 사는 야노마모족의 남자는 폭력적인 남성이 남성답다고 보기 때문에 아내를 심하게 구타하고 행실이 의심되면 작살같은 창으로 넓적다리를 찌른다. 그리고 사법제도나 경찰서가 없는 동부 그린랜드의 에스키모들은 노래시합으로 분쟁을 해결한다고 한다.

이스터 섬(Easter Island)의 거대한 석상들은 이 섬이 서양인들에 의해 발견된 이래 심오한 수수께끼였다. 초목도 없고, 미개한 원시인이 겨우 2000명만 사는 남태평양 고도에 10∼20m 높이의 거대한 석상 수 백 개를 누가, 왜, 어떻게 만들고 세웠을까? 인류학자들은 그 의문을 풀었고, 그 충격적 해답은 지구의 미래에 대한 무시무시한 교훈을 담고 있다.

이 책에는 원시부족사회에 대한 연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브라질 다인종 사회에서의 결혼의 정치학, 비만(肥滿)을 보는 여러 사회의 상이한 시각, 그리고 일종의 의식(儀式)으로서 외과수술과정 등 문명사회의 제 현상을 분석한 논문들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류학적인 접근법과 인류학 연구에서 얻은 통찰력이 오늘날의 집단이나 사회의 문제해결에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성찰도 담겨 있다.

(고려대 교수·영문학)


동아일보  2001.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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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내가 요즘 읽는 책]김용택-벼랑에서 살다

◇골목 사람들은 따뜻했네

한 사람이 혼신을 다해 이뤄 놓은 예술 작품은 그것이 한 편의 시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소설이든 장르의 구분이 잘 되지 않는 법이다.

조은이라는 시인이 쓴 ‘벼랑에서 살다’(마음산책·2001)라는 에세이는 한 편의 장시 같기도 하고, 잉크를 펜으로 찍어 꼼꼼하게 새긴 한 편의 좋은 연작 소설 같기도 하다. 이 에세이는 또 삶의 구석구석을 착실하게 잡아 보여주는 한 편의 잔잔한 영화 같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사람을 꼼짝 못하게 잡아두는 이 산문의 매력은 아마, 저자의 진지하고 정직한 자기 성찰과 세상에 대한 뿌리칠 수 없는 따뜻한 애정에서 오는 듯하다.

학년말 방학이어서 시골의 작은 내 방에서 뒹굴뒹굴 구르다가 머리맡에 있는 산문집이 손에 잡혀 따뜻한 구둘장에 등을 대고 누워 아무 생각 없이 첫 장을 넘겼다.

한 장 한 장 책장이 넘어 갈수록 나도 몰래 책 속으로 쏙 빠져들기 시작했는데 ‘어, 어, 이거 장난이 아니네’ 나도 몰래 일어나 얼굴을 책 속에 박고는 뗄 줄을 몰랐다. 어머니께서 “용택아, 밥 묵어라”하시는 말을 몇 번 들은 것 같은데도 나는 계속 책을 읽고 있었다.

그가 사는 골목의 잡다한 이야기와 그가 혼자 사는 13.5평 집 이야기가 너무나 생생하고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 나는 그의 골목에 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는 사사로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들이 흔히 보는 그런 소모적이고, 읽고 나면 내 삶의 그 어느 한 구석도 위안이 안 되는 그런 글들이 아니다. 그는 글을 얼마나 조심스럽고도 꼼꼼하게 쓰고 다듬었던지 읽는 내가 온 몸에 힘을 줄 정도였다.

작고 가난한 골목에서 벌어지는 별 볼일 없는 것 같은 이야기에서 묻어나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하고 가차없는 애증은 참으로 삶을 엄숙하게까지 하는 것이다.

누더기 같이 가난한 골목, 두서넛이 눕기도 작은 집에서 혼자 사는 그의 삶은 정결하고 당당하고 눈물겹게 아름답다. 크고 거대하고 화려한 거짓들이 작고 따사로운 삶을 억누르고 허허한 삶을 강요하는 서울에서 좁고 가난한 그 어떤 골목에서 우리는 잊혀지고, 잃어버리고, 외면하고, 깔아뭉개버리는, 그러나 결코 버릴 수 없는 사람 사이의 인정을, 서로 살 부비며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보는 것이다.

책 곳곳에 실려 있는 그의 골목과 집안 살림 사진들은, 뒤집어진 우리들의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소유의 가치에 다시 눈뜨게 한다.(시인)


동아일보  2001.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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