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네킹 > [내가 요즘 읽는 책]강석경 '여자의 적은 여자'

요즘 신화에 관한 책이 많이 나오지만 독창적으로 소화하지 않으면 교양을 갖추는 정도로 그치기 쉽다. 벌써 9년 전에 초판이 발행된 스테디셀러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진 시노다 볼린 지음·조주현과 조명덕 옮김·또하나의문화)은 세계 신화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라 내 속에 살아있는 무엇임을 느끼게 하고 감탄하게 만든다.

인간처럼 장점과 약점을 두루 가진 그리스 신들을 분석하여 이 신화의 인물들이 3000년 동안 각 여성의 내면에 잠정적으로 존재해온 원형이라는 것을 밝히고 자기성찰을 촉구하는 지혜로운 책이기 때문이다.

저자 진 시노다 볼린은 심리학에 원형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융 학파의 정신과 의사로서 20년간 임상을 통해 알게 된 여성들의 모습에서 그리스 여신들을 반영하여 자기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하도록 명쾌하게 길을 열어준다. 저자는 질투심과 원한으로 가득 찬 여성환자에게서 제우스의 아내이며 결혼의 수호신인 헤라의 굴욕적인 모습을 보았다.

잘 알려진대로 바람둥이 제우스는 수없이 외도하며 헤라의 복수심을 자극했다. 헤라는 레토가 제우스의 소생인 아폴로를 낳을 때 저주를 내려 9일 동안 고통 속에서 헤매도록 하고, 제우스에게 여자가 생길 때마다 상대 여성에게 분노를 쏟았다. 남편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는 헤라 원형은 가부장 문화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면서 다른 여성들을 억압하기도 하고, 복수를 함으로써 여신들 중 가장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헤라 원형은 한국같은 가부장 문화, 제도 중심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언젠가 여성상담원이 상담보고서를 쓴 적이 있는데 남편의 외도 문제가 생겼을 때 한국여성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상대 여자에 대한 증오라고 지적했다. 남편은 유혹을 당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상대 여자만 단죄한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헤라의 반응인데 남편의 상대에 대한 여자들의 적대감은 지식 정도에 상관없이 한결같다. 여기서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말이 성립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아내, 엄마, 딸이라는 전통적인 역할을 대표하는 헤라, 데미테르, 페르세포네를 ‘상처받기 쉬운 여신들’로 분류하고 사냥과 달의 수호신 아르테미스, 지혜와 영웅들의 수호신 아테나, 화로의 수호신 헤스티아를 ‘처녀여신들’로 나누었다.

거친 자연을 좋아하고 고집 센 개인주의자며 자기 성취욕이 강하다면 당신은 아르테미스 원형을 가지고 있다. 전략적이며 마음보다는 머리로 움직이는 논리형이지만 권위적인 아버지를 추종하고 가부장적 가치를 지지한다면 당신은 아테나의 원형을 갖고 있다. 집을 신전처럼 지키며 고독하고 명상적인 시간을 보낸다면 당신은 헤스티아 유형에 가깝다.

이 책의 장점은 그리스 여신들을 박물관에 진열된 차가운 조각이 아니라 생동적이고 현실적인 여성으로 재현하면서 자신과 타인을 폭넓게 성찰하도록 해준다는 점에 있다.

강석경(소설가)


동아일보 2001.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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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내가 요즘 읽는 책]서지문 '현대윤리학에 관한 15가지 물음'

◇ '현대 윤리학에 관한 15가지 물음'

과학이 생명창조의 능력을 인간의 손에 쥐어주려고 하는데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개헌논의에만 정신이 팔려 방치하고 있는가 했더니, 드디어 법안을 만들기는 했는데 윤리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과학적 연구를 억제하는 쪽으로 기운 내용이다.

고급두뇌들이 연구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대거 떠날 것이 걱정스럽고, 만약 이 법안이 통과 시행된 후 금지조항을 어기고 연구를 해서 세계적인 발견이 나온다면 연구자를 어떻게 할지 의문스럽다.

◆ 기술과 현실의 충돌문제 고민

‘현대 윤리학에 관한 15가지 물음’ (가토 히사다케 지음·표재명 김일방 이승연 옮김·서광사·2000년)은 예전의 원칙으로는 판단이 불가능한 현대의 윤리학적 고민에 대응하는 새 원칙을 모색하는 책이다.

처음 12가지 물음은 근대 서구윤리학의 근간이 된 칸트의 정언명법과 벤담의 공리주의 원칙이 현실상황에서 적용될 때 당면하게 되는 무수한 모순과 딜레마들을 살펴보고, 마지막 세 장은 현대과학의 위험요소와 환경문제가 야기하는 윤리적 숙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마당이다.

저자는 윤리학이 현실상황과 타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 칸트의 순수형식주의 윤리학, 어떤 행위의 윤리적 평가는 동기와 상관없이 오로지 그 행위의 결과로 얼마나 개인과 사회의 행복이 증진되었는가에 의거해야 한다는 벤담의 공리주의적 신념, 그리고 공리주의를 계승하면서 행복지수의 계산에 ‘쾌락의 질(質)’ 개념을 포함시켜 인간의 품위를 살리려고 했던 죤 스튜어트 밀의 윤리적 열정과 소신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들의 훌륭한 신념이 현실적 적용에서 당면하게 되는 의외의 변수와 자기 모순, 가치의 충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환경재앙-생명파괴 대안 찾아

열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인가?에고이즘에 기초한 행위는 모두 도덕에 반하는가? 국민총소득을 증가시키면서 동시에 소득격차도 확대되는 경제정책이 좋은가, 나쁜가? 자유는 목표인가, 수단인가? 가치에는 실체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교환이 가치를 성립시키는 것인가? 정의의 원리는 순수형식으로 결정되는가, 공동의 이익으로 결정되는가? 절차상의 정의와 내용상의 정의는 다른 것인가? 등 많은 윤리학의 난제가 흥미진진하게 제시되면서, 서구 윤리철학의 고민과 좌절이 드러나기도 한다.

마지막 세 장은 오늘날 우리 앞에 닥친 긴박한 문제인 환경문제,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빚어지는 대규모 살상, 인간이 과학 기술의 목적에 예속되는 현상, 그리고 과학의 생명성 파괴에 대한 윤리적 법적 대비를 모색한다. 이 책은 윤리가 고리타분한 공론적인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과 연관이 있으며, 생명의 계승과 우리 후손의 삶을 위해 시급히 논의하고 모색해야 할 문제임을 깊이 각성시킨다.

서지문(고려대 영문과 교수)


동아일보 2001. 06.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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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내가 요즘 읽는책]안병직 '철도여행의역사'

◇철도가 유럽史 바꿨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산업혁명이라고 답한다. 산업혁명은 사람들이 일하고 생활하는 방식뿐 아니라 사물을 인식하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심층적인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철도 여행의 역사’(궁리, 1999)는 산업혁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철도의 예를 통하여 포괄적인 변화의 과정으로서 산업혁명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19세기 전반 서유럽에 등장한 철도가 상징한 것은 단지 기술 분야의 혁신만이 아니었다.

◇ 19세기산업혁명의주역

철도의 등장은 일상의 현실이 갖는 의미가 산업혁명을 통해 근본적으로 달라졌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예컨대 철도의 출현은 전통적인 시간과 공간의 소멸을 의미했다.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달랐던 시간은 철도가 나타나면서 통일됐다. 개별적이고 독립적이었던 각 지방은 철도로 연결되면서 철도망의 일부로 종속됐고, 그 사이의 공간은 의미를 상실했다.

철도를 통해 여행은 산업화됐다. 산업화된 새로운 여행은 여행객과 풍경이 분리되었다는 점에서 도보나 말을 이용한 전통적인 여행과는 달랐다. 일직선으로, ‘총알’처럼 풍경을 관통하는 철도여행에서는 풍경의 현실성은 휘발돼 버리고, 그에 대한 인상만이 파노라마로 부활하였다. 그것은 마치 백화점에 집결된 다양한 상품들이 개별적인 사용가치를 잃어버리고 단지 가격표에 의해 인식되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었다.

철도 여행은 누구에게나 새로운 경험이었으나, 그것을 통해 여행객 사이의 사회적 구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철도 여행은 부르주아가 주도한 19세기 유럽 사회의 계급관계와 문화를 반영했다.

◇ 도시설계에 결정적 영향

등급화된 객차와 폐쇄적인 객실 구조는 부르주아의 특권과 우월 의식 그리고 프라이버시에 대한 갈망을 표현했다. 여행 중의 행태에서도 부르주아는 구별됐다. 부르주아의 객실에서는 담소가 사라지고 독서가 소일거리로 등장했다. 또한 객실이 고립됨으로써 발생한 각종 범죄와 이에 대한 부르주아의 두려움도 부르주아가 거둔 성공의 부산물로서, 부르주아 문화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었다.

결국 ‘철도 여행의 역사’는 철도를 통해 살펴본 19세기 유럽의 사회와 문화의 역사다. 철도가 어떻게 건축, 도시 건설, 가구, 병리학 등 여러 다양한 분야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는지 잘 보여준다. 언뜻 보기에 철도와 무관한 현상에까지 눈길이 미치는 저자의 예리한 통찰력이 놀랍다. 이 책이 비평가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으며 독일 실용서상 수상의 영예를 차지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안병직(서울대 교수·서양사)


동아일보  2001.  06.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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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내가 요즘 읽는 책]김호기 '허울뿐인 세계화'

대학에서 가르치다 보면 학생들의 관심만큼 빠르게 변화하는 것도 드물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 전공인 사회학의 경우 1990년대 초반에는 문화가 커다란 관심을 끌더니 1997년 경제위기 이후에는 시장과 정보화가 새로운 각광을 받고 있다.

이런 변화에 상관없이 지난 10년간 지속적인 관심을 모와 왔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세계화를 둘러싼 담론이다.

나 역시 세계화에 대한 강의를 해 오고 있지만 세계화만큼 복합적인 의미망을 갖고 있는 담론도 찾기 어렵다. 한편에서 세계화가 신자유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파악된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멋진 신세계’로 이해되는 등 극단적인 평가가 교차하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숱하게 쏟아진 세계화에 대한 책 가운데 요즘 읽고 있는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와 ‘에콜로지와 문화를 위한 국제협회(ISEC)’가 함께 쓴 이 책(따님, 2000)은 매우 이채로운 책이다. 여기서 이채롭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인데, 세계화를 일관되게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 그 하나라면, 아래로부터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 다른 하나다.

간단히 말해 노르베리-호지와 동료들의 주장은 세계화란 강력한 중앙은행과 다국적기업의 독재가 이뤄지는 과정이자, 기껏해야 조세정책의 보조를 받아 연명하는 비효율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암울한 측면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를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인식에 있다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그리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으로 아래로부터의 적극적인 풀뿌리 시민운동을 촉구한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우선 드는 생각은 세계화의 부정적 이면에 대한 저자들의 분석이 매우 흥미롭고 예리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월마트의 광범위한 보급이 값싼 물건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기실 유통을 위한 사회적 비용에서 또 다른 희생을 전제한다는 분석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저자들의 실천적 결론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세계화를 일방적으로 부정할 경우 그 피해는 일차적으로 제3세계의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되며, 또 세계화의 현실적 영향력을 풀뿌리 민주주의만으로 감당하기에는 여전히 벅차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의 저자인 노르베리-호지는 산업사회의 지반을 근본적으로 성찰해 온 생태주의자다. ‘허울뿐인 세계화’ 또한 국가 주도 경제와 기업자본주의가 낳은 세계화에 대한 그의 비판적 인식이 잘 드러난 책이다. ‘인간적인 세계화’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연세대 교수·사회학)

동아일보  2001.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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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내가 요즘 읽는 책]최인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불꽃을 보았는가

요즈음 내가 읽고 있는 책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레이몽크 지음 남기창 옮김·문화과학사· 2000)이다. ‘천재의 의무’란 부제를 가진 이 책이 내 책상에 올려지기까지는 6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지난 겨울 나는 대학시절 철학을 전공한 아들 녀석의 방에서 무엇이 세계를 움직이는가’라는 부제를 지닌 ‘비트겐슈타인’(이두글방)’이란 책을 우연히 발견할 수 있었다.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난해한 철학가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일종의 만화형식으로 설명한 책이었는데 그것을 단숨에 읽은 후 나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카네기라고 불리던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직업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에 들어가 히틀러와 같이 배웠으며, 러셀에게 천재성을 인정받은 후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고, 1차 대전이 일어나자 죽음에 대해 더 많은 관찰을 하기 위해 일부러 최전방의 관측소로 지원하였으며, 막대한 유산상속을 거부하고 자신은 조그마한 초등학교에서 존경받지 않는 선생의 길을 택했던 수수께끼의 인물.

그가 다시 철학을 연구하기 위해 캠브리지로 돌아왔을 때 케인즈는 ‘방금 신이 도착했다’란 말로 소식을 전했던 사람. 마거리트란 여인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으나 결국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회의로 헤어진 후 한때는 동성연애자로 오해까지 받았던 철학자. 이 철학자에 대한 우연한 발견은 나에게 계속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나는 박사학위를 얻기 위해 심사위원이었던 러셀에게 제출한 비트겐슈타인의 최초의 논문 ‘철학논고’(천지)와 그의 저서 중 그가 세상을 뜬 후 발간되어 가장 널리 알려진 ‘철학적 탐구’(서광사)’의 두 책을 따로 구입해 읽기 시작하였다.

개인적으로 철학이란 학문을 좋아하고 있는 나로서, 난해하다는 그의 두 책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그의 철학은 객관적으로 분석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이론이 아니라 날카로운 직관력을 가진 한 천재가 ‘생각’과 ‘언어’와 같은 존재적 사유와 부딪쳐 일으키는 스파크이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이해하기보다는 그가 일으키는 불꽃에 함께 동참하는 편이 훨씬 현명한 길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옥스퍼드대에서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레이몽크(Raymonk)가 두 권의 책으로 펴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란 전기는 베일에 싸인 수수께끼의 인물을 새롭게 만나는 신선한 기쁨을 내게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최 인 호(소설가)

동아일보  2001. 0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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