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에게만 친절합니다 - 독일인에게 배운 까칠 퉁명 삶의 기술
구보타 유키 지음, 강수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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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나에게만 친절합니다

지은이: 구보타 유키

옮긴이: 강수연

펴낸 곳: RHK / 알에이치코리아




 표지에 담긴 선인장 가시에 따끔따끔 고슴도치가 생각난다. 생존 수단으로 발달한 선인장 가시를 우리는 모난 마음, 화난 상태 혹은 날 선 성격으로 묘사하니 어찌 보면 선인장에게 상당히 미안한 일일지 모르겠다. 『나는 나에게만 친절합니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단호함에 살짝 당황. 첫눈에 호감을 느낄만한 책은 아니었다. 에세이의 95%는 공감과 위로라고 생각하는 나이기에 이 책에서 따스함과 편안함을 찾을 수 없다면 적잖이 실망할 듯하여 책을 들고 잠시 머뭇머뭇. 책날개에 실린 작가 소개와 머리말을 읽다 보니 이내 스르르 녹아내리는 마음. 앞서 망설이고 고민했던 상황이 무색하게 이 책은 특유의 매력을 풍기며 성큼 다가왔다.




 일본에서 출판사에 근무하다가 지칠 대로 지쳐 독일로 떠난 구보타 유키 작가. 어린 시절 1년간 경험했던 따스하고 느긋한 독일을 떠올리며 그녀는 슬로우 라이프에 반짝 눈을 떴다. 2002년 기약 없이 독일 베를린으로 떠났던 그녀는 지금도 독일에 살며 일본 매체에 독일 라이프를 소개하고 있다고. 산책길에 스냅 사진을 찍고 맥주 마시는 걸 좋아한다는 그녀는 이 책을 통해 독일에서 경험한 것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어느새 편안한 마음으로 살게 된 과정, 독일에서 살지 않더라도 스트레스를 줄일 방법을 소개한다.




 그런데 절약 정신이 투철하며 근면 성실하다고 생각했던 독일의 민낯을 마주한 충격이란... 인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독일 역시 서비스 불모지란다. 덕분에 애초에 체념하여 기대치가 낮아지니 상대의 일을 존중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커진다나? 이런, 초반에 등장한 독일의 불편한 진실(?)에 살짝 실망. 하지만 독일의 불편한 점에 관해 툴툴대던 작가는 어느새 독일 사람의 좋은 면으로 고개를 돌린다. 신속하고 정확하며 총명한 독일인은 모두 주어진 시간에 집중하여 일을 끝내고 쉴 때는 확실히 쉰다고 한다. 근로시간 계좌가 있어 넘치도록 일한 시간을 나중에 휴가나 조기 퇴근으로 보상받고 1년에 최소 24일에서 30일의 유급휴가를 보장받는 삶. 상점 폐점법에 따라 음식점이라 벼룩시장을 제외한 모든 가게가 일요일에 문을 닫아 쇼핑할 수 없다고 한다. 덕분에 독일인들은 황금 같은 일요일을 소중한 사람과 오롯이 즐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한 워라벨의 균형을 모범적으로 지키는 그들의 삶 속에서 이방인이었던 작가는 스르르 물 들어 스트레스 없는 행복하고 느긋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데... 글에서 느껴지는 여유에 슬그머니 미소 짓게 된다.







독일에도 휘게가 있다? 독일판 휘게 게뮈트리히.

'안락하고 편하다', '느긋하게 쉰다'라는 의미로 일상 대화에 자주 등장하는 독일어.

요즘 꽤 널리 알려진 덴마크어 '휘게'의 독일어 버전이라고 보면 되겠다. (p147 참고)




 걷는 속도도 느리고 모든 동작이 느리다는 독일 사람들. 그럼 우리는 독일에 가야만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No! 작가는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몇 가지 팁을 제시한다. 하루 중 '기분 좋아지는 시간'을 정하고 의식주에서 '주'를 소중히 여기자. 방마다 목적에 맞게 잘 꾸미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게뮈트리히'해진단다. 그럼 이제 생각해보자. 내 생활을 '게뮈트리히'하게 꾸릴 방법은 무엇일까? 나 역시 프리랜서이기에 워라벨의 균형을 맞추기란 참 쉽지 않다.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직장인은 프리랜서가 시간을 잘 조율할 수 있어 편할 거라 부러워하지만, 인간은 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는 법. 프리랜서는 일하는 만큼 그달의 수입이 정해지기에 늘 바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손가락을 빨거나... 일단, 정말 힘들겠지만 하루쯤 일없이 빈둥거리는 날을 정해보자. 향초를 몇 개 사서 따스한 분위기 속에 명상으로 하루를 털어내자. 싫은 일에는 No라고 외치고 되도록 좋아하는 일을 하자. 운동하자. 짜증과 스트레스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날 수 있도록 '참을 인'자 세 개를 마음에 새기자. 음... 또 뭐가 있을까? 앞으로도 간간이 멍한 시간에 소중한 내 삶을 지킬 소소한 방법들을 생각해봐야겠다. 일본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독일을 통해 느긋하고 행복한 삶을 엿보고 덩달아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싶어지는 에세이 『나는 나에게만 친절합니다』. 평화롭고 느긋한 토요일 오후에 이 책과 함께하여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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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 보는 아이네이스 - 로마 건국의 신화
베르길리우스 지음, 강경수 엮음 / 미래타임즈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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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명화로 보는 아이네이스

지은이: 베르길리우스

엮은이: 강경수

펴낸 곳: 미래타임즈




 미래타임즈 출판사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읽는 '명화로 보는 시리즈' 네 번째 이야기가 출간되었다. <명화로 보는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단테의 신곡>에 이어 선보인 작품은 바로 <명화로 보는 아이네이스>. '아이네이스'는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로마의 시조로 추앙받는 아이네이아스의 일대기를 소재로 쓴 서사시라고 한다(p6). 로마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격려와 지원으로 이 서사시에 착수한 베르길리우스는 11년이란 긴 세월을 매달려 전반적인 이야기를 완성하고 앞으로 3년을 더 집필할 결심으로 타국으로 답사를 떠났다가 열병으로 눈을 감았다. 완성하지 못한 작품이기에 불태우란 유언이 있었지만, 황제의 명령으로 인해 초안 그대로 남게 되었다고. 자기 유언대로 이 대단한 서사시가 한 줌 재로 변했다면 베르길리우스는 사무치는 후회와 안타까움에 죽어서도 괴로워했을지 모른다. 아우구스투스의 기지 덕분에 이 멋진 서사시는 2천 년이 넘는 긴 세월을 버텨내고 지금도 나와 당신, 우리의 곁에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방대한 이야기보따리에서 우리가 적어도 한 번쯤은 혹은 수도 없이 들었을 유명한 이야기가 홍수처럼 몰려들고 그와 관련된 아름다운 명화와 조각 자료들이 선명한 컬러로 우리를 맞이한다. 미래타임즈의 '명화로 보는 시리즈'는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라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테티스 여신의 결혼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바다의 여신 테티스가 인간 펠레우스와 결혼하여 아킬레우스를 낳는다. <아이네이스>에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실린 내용이 상당 부분 등장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는 앞선 두 서사시를 토대로 쓴 작품이기에 낯익은 인물과 반가운 이야기가 대게 등장한다. 사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된 어떤 이야기도 누구 하나를 주인공으로 딱 집어 끌어가기엔 무리가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야기가 흐르고 흘러 결국 제우스는 물론 어떤 인물의 3대손까지 아우르는 등, 종잡을 수 없이 펼쳐지니 말이다. 트로이 전쟁, 아킬레우스의 죽음, 트로이 함락을 비롯하여 외눈박이 폴리페모스를 피해 섬을 탈출하는 아이네이아스의 이야기 등등 셀 수 없는 보석 같은 신화가 펼쳐진다.









 그렇다면 가장 궁금한 이야기에 집중해보자. 로마의 시조라는 아이네이아스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 그 대단한 인물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살펴보자. 마음의 연정을 불러일으키는 띠를 가지고 신들을 인간과 사랑에 빠지게 하며 즐거워했던 아프로디테. 이에 화가 난 제우스는 아프로디테를 인간과 사랑에 빠지게 한다. 이다 산에서 양을 돌보고 있던 안키세스 왕자를 사랑하게 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자신을 공주라 속이고 안키세스와 사랑을 나누어 아이네이아스를 낳는다. 훗날 그는 군대를 이끌고 트로이 전쟁에 참가했다가 트로이가 패망한 후 유민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새나라를 건설했고 이는 로마의 모태가 된다.









중학생 시절 겁 없이 도전했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책은 늘 사서 보는 거라 여겼던 나는 겁도 없이 서점에서 덜컥 그 책들을 샀다. 한 장 넘기자마자 눈에 띄는 한자의 습격. 주석 없이는 이해도 되지 않거니와 온갖 어려운 용어가 복잡하게 얼기설기 엮어있던 그 책은 결국 책장에서 오래도록 세월의 먼지를 쌓다가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지금 그 책들은 어디에 있을까? 완역본은 아니지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읽었다는 기쁨을 준 책이 바로 미래타임즈의 '명화로 보는 시리즈'였다. 신과 인간의 사랑, 질투, 증오와 연민이 뒤얽힌 복잡한 관계 속에서도 오롯이 이야기에 집중하며 나아갈 수 있는 건 바로 명화와 조각 그리고 독자를 배려하여 쉽고 재밌게 쓴 글이 아니었나 싶다. 한 권으로 끝날 줄 알았던 미래타임즈와의 가슴 떨리는 첫 만남이 몇 번을 거듭하여 이어지니 이젠 언제 올지 모를 다음을 기대하게 된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아이네이스> 같은 서사시, <단테의 신곡>과 서양 미술, 조각, 음악에 이르기까지 꼭 알아야 할 주옥같은 지식과 교양을 뜻깊게 쌓고 싶다면 아낌없이 추천하고 싶은 책. 미래타임즈의 '명화로 보는 시리즈'와 '알수록 다시 보는 시리즈'는 반드시 소장해야 할 보물이다. (서양 음악 100만 모으면 지금까지 출간된 시리즈 전부 소장!). 선명하고 아름다운 명화로 새롭게 읽는 『아이네이스』. 사심 가득 담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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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놀라워
다니엘 김 외 지음 / 인테그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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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람은 놀라워!

지은이: 다니엘 김, 벤자민 김, 리아 임 & 지아 리

그림: 다니엘 김 & 벤자민 김

펴낸 곳: 인테그럴


지구를 사랑하는 아이들이 모여 만든 예쁜 이야기, 『바람은 놀라워!』. 9살 다니엘, 7살 벤자민, 9살 리아와 8살 지아가 쓱싹쓱싹 오물조물 솜씨를 발휘하여 파랑새의 모험담을 완성했다. 짤막하게 실린 작가의 글이 2017년 여름 워싱턴 시애틀에서 쓴 것이니 2년이 지난 지금 이 아이들은 어떻게 자랐을까? 지구를 사랑하고 새를 친구라 여기는 예쁘고 고운 마음을 그대로 잘 간직한 채 무럭무럭 자라고 있겠지? 이 책에서는 아이들의 그 따스하고 순수한 마음이 달콤한 솜사탕처럼 두둥실 떠오른다. 좌우로 여는 방식이 아니라 상하로 넘기는 달력 같은 방식이라 상당히 특이한데 책이 쫙 펴지지 않아 조금 불편. 그래도 예쁜 삽화와 흥미로운 이야기 덕분에 금세 동심으로 돌아가 파랑새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파랑새 브리트니. 첫 겨울을 맞아 가족과 함께 따뜻한 애리조나 남쪽으로 향하던 길이다. 갑작스러운 바람에 정신을 잃은 브리트니. 눈을 떠보니 천국인가 싶은 이곳은... 맙소사 하와이! (나도 가보고 싶은 그곳, 하와이!) 브리트니는 주변 새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부엉이를 떠올린다. 새 중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부엉이. 어쩌면 브리트니가 왜 이곳에 오게 됐는지 부엉이는 알 수도 있다. 지혜로운 부엉이는 이렇게 말한다 "엄청난 양의 환경 오염이 극소용돌이가 일어나는 위치를 바꾸고 있단다." 즉, 환경오염이 바람의 방향까지 바꿨다는 뜻이다. 친구들을 최대한 불러모아 정보를 듣기로 한 브리트니 일행은 해변에서 파티를 열기로 한다. 흥부와 놀부에 등장하는 은혜 갚은 제비와 비슷한 이야기도 듣고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호신술도 알려주며 즐겁게 지낸 브리트니. 파티가 끝난 후, 다시 혼자가 된 브리트니는 캐나다에서 온 파랑새 벤을 만나게 된다. 벤과 함께 벤의 여동생 비스킷을 찾은 브리트니는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을 확인한 후 가족을 찾아, 온 힘을 다해 하늘로 날아오른다. 새롭게 만난 친구들과 예쁜 V자 대열을 이루면서...








『바람은 놀라워!』는 아이들 작품인데 열린 결말이라 의외였다. '그리하여 공주는 왕자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엄마 품으로 돌아간 아무개는 앞으로는 꼭 엄마 말씀을 듣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등등 교훈과 행복이 가득한 결말에 익숙한 나로서는 이 열린 결말이 상당히 신선한데... 우리의 주인공 파랑새 브리트니는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늘로 날아오른 아기 파랑새들은 무사히 원하는 곳에 도착할까? 바람의 방향이 또 바뀌어 어딘가에 표류하진 않을까? 정해진 결말이 아니기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삽화에 쓰인 모든 모형은 재활용품을 활용하여 만들었다니 참 친환경적인 동화책인 듯. 가족을 찾아 떠나는 파랑새의 모험을 통해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환경오염 문제를 제시하니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하도록 아이와 대화를 나누면 좋겠다. 우리 꼬마 얼른 커서 엄마랑 같이 이 책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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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소녀
세라 페카넨.그리어 헨드릭스 지음, 이영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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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익명의 소녀

지은이: 그리어 헨드릭스 & 세라 페카넨

옮긴이: 이영아

펴낸 곳: 인플루엔셜




나는, 당신은, 우리는 어떤 삶을 바라는가? 최근 꽃같이 곱디고운 아까운 청춘들의 비보를 들으며 안타까움과 우울감에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온 사랑을 독차지하는 한편 누군가의 곱지 않은 시샘을 견디는 화려한 삶, 연예인까지는 아니더라도 평범하고 무난한 인간관계를 누리며 나름의 주목을 받는 삶, 혹은 이 사회의 이방인이자 아웃사이더처럼 이름 없이 살아가는 삶. 어떤 경우라도 나름의 장점과 고충은 있겠지만 나로서는 눈에 띄지 않는 은둔자 같은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집을 심하게 좋아하는 집순이지만 사람 역시 좋아하기에...) 요즘 인터넷 서점과 북로거들 사이에서 꾸준히 회자되는 소설, 『익명의 소녀』에서 만난 제시카는 존재감 없이 외로운 삶을 살아간다. 그녀에겐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실수로 평생 벗을 수 없는 짐을 지고 살아가는 제시카. 28살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그녀에게 내일이란 없다. 그저 오늘을, 이 하루를 꾸역꾸역 살아내는 게 최선일 뿐. 그런 제시카에게 특별한 사건이 벌어진다. 보수로 500달러를 준다는 설문조사! 메이크업을 받던 고객이 참석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제시카는 그 자리에 자신이 나서기로 한다. 정적이 흐르는 시험실 안에서 노트북을 마주한 제시카. 화면에 뜨는 메시지에 따라 제시카는 객관식이 아닌 주관식으로 설문에 응답한다.




[양심의 가책 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까?]

[살면서 어떤 부정행위를 해봤는지 이야기해보세요.]

[본능적으로 바로 나온 답이 맞습니까?]

[겉핥기식은 안 됩니다.]







마치 제시카를 직접 관찰하는 듯, 그녀를 꿰뚫어 보는 질문. 제시카는 은밀한 사생활과 숨기고 싶은 비밀까지 낱낱이 털어놓고 후련함 반, 걱정 반으로 설문조사를 마쳤고 더 큰 보수를 주겠다는 제안에 심리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 이 이상한 실험을 진행하는 실즈 박사는 여성. 남자일 줄 알았던 박사의 정체가 여성으로 드러나자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다들 한 번쯤은 들어봤을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 과연 제시카는 이 미친 실험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자신의 실수로 뇌를 다친 여동생, 과거 극단에서 당한 성추행 등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지우고 싶은 과거로 인해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방황하는 제시카. 도덕과 윤리가 최고라는 가치관으로 자신이 정한 범주에서 벗어난 인간이라면 살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실즈 박사. 두 여자의 숨 막히는 두뇌 게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실즈 박사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제시카. 제시카는 이 위기에서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




작가 두 명이 함께 쓴 소설이라 등장인물의 세밀한 감정과 극명한 견해차가 두드러지게 돋보였던 작품이다. 혼자 썼다면 과연 이런 결과물이 탄생했을까 싶은... 500쪽이 넘는 제법 두꺼운 벽돌책이지만 이상하리만큼 술술 읽히고 쏙쏙 들어오는 문장에 문득 정신을 차리면 상당히 많은 페이지를 지나온 후였다.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며 세 치 혀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잔인한 수법, 누군가를 쉽게 믿은 죄로 감내해야 하는 결과, 일방적인 사랑의 비극적인 결말, 지울 수 없는 뼈아픈 과거에 휘청댄 오늘과 내일. 외면하고 싶은 깊은 어둠 속에 도사린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치부까지 다 드러낸 듯한 『익명의 소녀』. 유쾌하지 않은 결말에 씁쓸한 마음으로 제시카와 안녕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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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완벽한 가족
애덤 크로프트 지음, 서윤정 옮김 / 마카롱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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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의 완벽한 가족

지은이: 애덤 크로프트

옮긴이: 서윤정

펴낸 곳: 마카롱


 오랜만에 흡인력이 상당한 스릴러 소설을 만났다. 마카롱 출판사의 『나의 완벽한 가족』. 책날개에 실린 작가 소개를 보니 경력이 상당히 화려하다. 세계적으로 100만 부 이상의 판매 실적을 올린 범죄 스릴러 베스트셀러 작가, 애덤 크로프트. 원래 해외 작가 이름을 잘 못 외우기도 하지만, 너무 낯설어 검색해보니 역시 국내에 처음 소개된 작가였다. 2015년부터 활발한 집필 활동을 펼치며 판매 1위 가도를 달리는 애덤 크로프트. 어쩐지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듯한 느낌이라 몇 번이고 이름을 되새겨본다.



 

 영국의 어느 작고 한적한 마을에서 믿을 수 없는 살인사건이 발생하다. 집으로 가던 중, 누군가의 손에 무참히 살해당한 일곱 살 소년 라일리. 소년은 서슴없이 인사할 정도로 잘 아는 사람에게 목숨을 잃었다. 라일리의 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안타까운 장면 후, 곧바로 등장하는 주인공 메건과 크리스. 어렵사리 아이를 낳고 육아에 매진하고 있는 메건은 고된 노동과 크리스의 잦은 부재로 인한 스트레스로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진다. 육아에 지쳐 부부관계는 소원하고 아이를 낳기 전의 다정함이란 사라진 지 오래. 그러던 중, 마을에서 아동 살해 사건이 발생하고 메건은 뭔가 상황이 잘못되고 있음을 눈치챈다. 살해당한 소년 라일리의 피 묻은 모자가 집 쓰레기통에서 발견되다니, 감당할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인 메건은 남편 크리스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메건과 크리스 혹은 과거의 시점과 피해자의 시점으로 화자를 바꿔가며 치밀하게 독자를 속이는 작가의 노련함 덕분에 크리스가 범인일까 아닐까 손바닥 뒤집듯 생각을 바꾸게 된다. 여전히 크리스가 의심스러운 가운데 또 한 명의 소년이 희생당하고 메건은 괴로워하다가 결국 경찰에 크리스를 신고한다. 내 남편이 아동 살해범인 것 같다고...

 

 

 

 

 

 

 

 

 범인이 누구일지도 궁금하긴 했지만, 아이를 키우는 부부가 각자 지닌 고충을 적나라하게 풀어내는 솜씨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육아에 시달리는 여자와 남자만이 알 수 있는 감정과 견해 차이를 어쩜 이렇게 잘 표현했는지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뜨끔. 남자는 혼자만의 방 혹은 동굴이 있다더니, 애처가였던 크리스 역시 자신만의 비밀을 만든다. 어떤 행위가 끝나면 죄책감에 시달려 박박 씻는 크리스를 보며 그 비밀이 '살인'일까 싶다가도 설마 작가가 이렇게까지 다 내어줄까 싶어 발을 동동 구르게 되는 상황. 그래서 대체 범인은 누구냐! 사실 독자의 선택지는 상당히 작다. 메건, 크리스 혹은 제삼자. 이쯤 되면 범인을 못 맞히면 이상한 상황이지만, 정말 이 소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고도의 심리전으로 독자를 들었다 놨다, 에라이! 결국 예상한 사람이 범인이긴 했지만, 뒤끝 있는 작가는 끝까지 독자를 쉽사리 놓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그리고 불쾌한 반전으로 누군가는 혐의를 벗고 누군가는 자신이 범인임을 인정한다. 이야기에 빠져들어 진실을 향해 달리는 그 과정 자체를 즐기게 되는 소설. 애덤 크로프트, 이 작가 범상치않군!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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