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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소녀
세라 페카넨.그리어 헨드릭스 지음, 이영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11월
평점 :
제목: 익명의 소녀
지은이: 그리어 헨드릭스 & 세라 페카넨
옮긴이: 이영아
펴낸 곳: 인플루엔셜
나는, 당신은, 우리는 어떤 삶을 바라는가? 최근 꽃같이 곱디고운 아까운 청춘들의 비보를 들으며 안타까움과 우울감에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온 사랑을 독차지하는 한편 누군가의 곱지 않은 시샘을 견디는 화려한 삶, 연예인까지는 아니더라도 평범하고 무난한 인간관계를 누리며 나름의 주목을 받는 삶, 혹은 이 사회의 이방인이자 아웃사이더처럼 이름 없이 살아가는 삶. 어떤 경우라도 나름의 장점과 고충은 있겠지만 나로서는 눈에 띄지 않는 은둔자 같은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집을 심하게 좋아하는 집순이지만 사람 역시 좋아하기에...) 요즘 인터넷 서점과 북로거들 사이에서 꾸준히 회자되는 소설, 『익명의 소녀』에서 만난 제시카는 존재감 없이 외로운 삶을 살아간다. 그녀에겐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실수로 평생 벗을 수 없는 짐을 지고 살아가는 제시카. 28살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그녀에게 내일이란 없다. 그저 오늘을, 이 하루를 꾸역꾸역 살아내는 게 최선일 뿐. 그런 제시카에게 특별한 사건이 벌어진다. 보수로 500달러를 준다는 설문조사! 메이크업을 받던 고객이 참석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제시카는 그 자리에 자신이 나서기로 한다. 정적이 흐르는 시험실 안에서 노트북을 마주한 제시카. 화면에 뜨는 메시지에 따라 제시카는 객관식이 아닌 주관식으로 설문에 응답한다.
[양심의 가책 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까?]
[살면서 어떤 부정행위를 해봤는지 이야기해보세요.]
[본능적으로 바로 나온 답이 맞습니까?]
[겉핥기식은 안 됩니다.]
마치 제시카를 직접 관찰하는 듯, 그녀를 꿰뚫어 보는 질문. 제시카는 은밀한 사생활과 숨기고 싶은 비밀까지 낱낱이 털어놓고 후련함 반, 걱정 반으로 설문조사를 마쳤고 더 큰 보수를 주겠다는 제안에 심리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 이 이상한 실험을 진행하는 실즈 박사는 여성. 남자일 줄 알았던 박사의 정체가 여성으로 드러나자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다들 한 번쯤은 들어봤을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 과연 제시카는 이 미친 실험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자신의 실수로 뇌를 다친 여동생, 과거 극단에서 당한 성추행 등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지우고 싶은 과거로 인해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방황하는 제시카. 도덕과 윤리가 최고라는 가치관으로 자신이 정한 범주에서 벗어난 인간이라면 살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실즈 박사. 두 여자의 숨 막히는 두뇌 게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실즈 박사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제시카. 제시카는 이 위기에서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
작가 두 명이 함께 쓴 소설이라 등장인물의 세밀한 감정과 극명한 견해차가 두드러지게 돋보였던 작품이다. 혼자 썼다면 과연 이런 결과물이 탄생했을까 싶은... 500쪽이 넘는 제법 두꺼운 벽돌책이지만 이상하리만큼 술술 읽히고 쏙쏙 들어오는 문장에 문득 정신을 차리면 상당히 많은 페이지를 지나온 후였다.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며 세 치 혀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잔인한 수법, 누군가를 쉽게 믿은 죄로 감내해야 하는 결과, 일방적인 사랑의 비극적인 결말, 지울 수 없는 뼈아픈 과거에 휘청댄 오늘과 내일. 외면하고 싶은 깊은 어둠 속에 도사린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치부까지 다 드러낸 듯한 『익명의 소녀』. 유쾌하지 않은 결말에 씁쓸한 마음으로 제시카와 안녕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