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여행. - 마음 여행자의 트래블 노트
최반 지음 / 컬처그라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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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자꾸만 감겨왔다. 책을 읽으며 마셨던 따뜻한 홍차가 약이 되었는지 나른함을 느꼈다. 조용히 눈꺼풀을 꾹 눌러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며 잠이라는 이길 수 없는 친구를 잠시라도 물리쳐보려 했던 건 잔잔한 영혼의 울림이 끊어지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시간 후 나는 거짓말처럼 잠들었던 스스로를 탓하며 바쁘게 나갈 채비를 했고 반나절의 일을 마치고 돌아와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를 꺼내들었다.  책과 떨어져있던 시간, 하지만 단 한 순간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빛나고 있는 그 표지를 잠시 새치름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다시 손에 집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장의 마침표를 따라 잡을 수 있었다. 이것이 <서툰. 여행>이라는 책과 함께한 나의 만 하루이다.

 
 인도. 어떤 이는 말도 안 되는 사기를 치는 사기꾼들이 사는 더러운 나라라 표현했고 어떤 이는 그곳이 자신의 전생의 고향, 혹은 정신적 고향이라 말하며 색안경을 끼지 않은 눈으로 아름답게 인도를 바라보기도 했다. 굳이 전자와 후자 중 누가 더 많았냐고 묻는다면 당연 후자라고 대답해주고 싶다. 인도에 대해 지대한 관심과 동경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도는 언제나 신비롭게 다가온다. 소를 숭배하고 오른손으로 밥을 먹는 사람들. 말도 안 되는 이유들로 사람에게 사기를 쳐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순한 이들, 까맣고 고운 눈동자를 반짝이는 아이들. 인도는 분명 살기 좋은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살기 싫은 곳도 아닌 것 같다. 영화를 전공한 작가 역시 인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첫 발걸음 이후에 어떤 영혼의 떨림과 사랑에 대한 아픔으로 인도에 머물기 시작했다. 쭉 이어진 인도와의 네 번의 만남은 그에게 명확한 해답을 던진 것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겠다는 불타는 의지를 선사한 것도 아니었지만 지구 어느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특별한 마음의 평안과 번뇌, 그리고 우정을 선물했다. 어느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매력적인 까만 나라 인도가 그의 눈을 통해서는 유난히 더 예쁘고 아름다워 보였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인도 여행을 위한 여행서가 아니다. 어떠한 유적이나 상점에 대한 정보도 담겨 있지 않으며 다만 작가가 좋은 눈으로 찍어간 멋진 사진들과 그곳에 머물며 겪은 일과 그 일을 통해 얻게 된 조금은 심각한 생각들이 가득한 여행 에세이다. 혹여 인도 사람들의 난민엔 가까운 가난한 삶이나 그들의 어찌 보면 어이없는 생활방식과 정신세계를 엿보고 싶다면 이 책은 당신의 마음을 채워주기엔 좀 부족하지 싶다. 이 책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성적이며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은 인도 책 중 이 책을 베스트 3에 넣고 싶은 소망은 그 따스한 마음이 좋아서, 그리고 반짝 반짝 빛나는 그 무언가가 끊임없이 내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동안 읽어왔던 인도에 관한 책 중에 가장 기분 좋게 읽어간 이야기. 솔직히 말하자면 인도 이야기가 반, 작가의 넋두리가 반이지만 그 속에서 나는 감히 진실한 인도를 느껴보았노라 말하고 싶다. 5년째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그, 인도에 가면 꼭 요가수업을 듣고 릭샤꾼을 친구로 둔 그. 고집강하기로 소문난 최 씨이자 사랑에 허기진 그. 이젠 서툰 여행이란 책의 작가이자 앞으로도 인도로 향할 그의 모습 속에서  나는 아름다운 인도의 향과 맛을 느꼈다.

 언제쯤 인도에 나의 첫발을 내딛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내 부족한 영혼의 샘물을 찾아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늘어가는 나이와 반비례로 줄어가는 나의 용기가 다하기 전에 꼭 그 곳을 찾아가고 싶다. 인도란 참 알 수 없는 나라이다. 홍차로 시작해서 맥주로 마무리 지은 나의 독서가 그러하듯 그리고 서평을 쓰며 인도 냄새 가득한 짜이 향에 취해 자판을 두드리는 내 모습이 이러하듯 인도 역시 어느 곳으로 튈지 혹은 나에게 호의적일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의 등대처럼 그 곳이 반짝거리는 이유는 내 영혼이 잠시라도 쉴 수 있는 곳이 바로 인도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일 것이다. 그 떨리는 희망의 숨결을 직접 내 손으로 만져보는 그 순간을 그리며 오늘도 아쉬움에 가만히 스스로를 토닥여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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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니 라이온하트 1 : 세이렌의 비밀 - 환경 신화 판타지
줄리아 골딩 지음, 이옥용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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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판타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무엇일까? 아마도 해리포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해리포터가 받은 경이적인 사랑은 해를 거듭할수록 오히려 더 커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해리포터와 비슷한 내용의 판타지 소설들이 속출하게 되었고 단 1주라도 해리포터보다 판매량이 높았을 경우 마치 대단한 사건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광고하고 떠들어댄다. 이제는 솔직히 광고 글에 해리포터라는 단어만 들어있어도 거부감이 들 정도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 판타지 소설에 대한 기대들이 차츰 사그라질 때쯤 만나게 된 책이 바로 <코니 라이온하트>다. 코발트빛의 넘실거리는 바다, 그 위에 멋지게 빛나는 은빛 배지. '한 번쯤 더 속아볼까?'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책 속에서 나는 어린 시절 꿈에 그렸던 여러 신화 속 동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친구이자 환경을 사랑하는 착한 마음을 갖고 있었고 공통의 적을 물리치지 위해 협회라는 이름하에 인간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영화나 소설, 혹은 우리의 삶 속에서 가징 끈끈한 결속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순간은 단연 '공공의 적'을 만났을 때일 것이다. 해리포터에선 볼트모트가 있었고 코니 라이온하트에서는 쿨레르보라는 절대 악이 존재한다. <코니 라이온하트>에서는 4개의 군으로 신화적 동물들을 구분하고 한 인간이 하나의 신화생물과 절대적 유대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들은 서로를 벗이라 부르며 돈독한 유대관계를 이어가는데 주인공인 코니는 한 세기에 나올까 말까한 '만물의 벗'이란 능력을 가진 아이였다. 그녀가 자신의 힘을 알아가고 모든 신화적 생물들과 소통해가는 과정 속에서 나는 어린 시절 만났던 수많은 신화 생물들과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용, 유니콘, 날씨의 거인, 페가수스, 세이렌. 그 이름만으로도 두근거리는 동물들이 사실은 지금 이 순간 우리와 같은 동시대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이야기는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인간들의 무차별한 공격과 학살을 피해 신화 속으로 도망쳐야했던 그들의 삶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연결체 그들이 바로 협회 사람들인 것이다. 동물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던 나에게 그들의 뜨거운 우정은 질투가 느껴질 정도로 부러웠다.

 <코니 라이온하트>의 가장 큰 특징은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시리즈인 <제 1탄 세이렌의 비밀>에서는 작은 항구 도시에 무리하게 세워진 정유회사 때문에 삶의 터전을 읽게 된 세이렌들의 분노로 여러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틈에 화가 난 세이렌들을 조정하는 자가 바로 쿨레르보였던 것이다. 작가는 판타지적 요소에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환경문제들을 담아냄으로써 청소년들이 자연스레 인간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들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문제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판타지 소설의 새로운 시도였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때로는 무리한 학습보다는 이렇게 재미난 방향으로 지도하는 것이 더 큰 효과를 불러올 수 있으니까!

 하지만 몇 가지 걱정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여러 상들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장담하기 힘들다. 일단 400페이지 분량의 책 속에 꽉꽉 들어차있는 내용이 조금 버겁고 등장인물이 많으며 그에 신화생물들이 더해져 조금 어지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문장자체가 어렵지는 않으나 뭔가 가슴 속으로 확 받아들여지는 읽힘은 아니라서 단숨에 읽히는 여느 쉬운 책들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책은 기호식품과 같아서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 다른 게 사실이지만 대부분 내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여느 판타지 소설보다는 확실히 무언가 달랐기 때문에 전부 4개의 이야기들로 묶어진 <코니 라이온하트>의 나머지 이야기들을 조심스레 기대해보게 된다. 그때는 좀 더 흥미진진하고 즐거운 모험이 펼쳐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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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기와 만다라 - 나를 찾아 떠나는 한 청년의 자전거여행
앤드류 팸 지음, 김미량 옮김 / 미다스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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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처음 '메기와 만다라'라는 책을 받았을 때 그 두께에 한 번 놀랬다. 책을 읽는 것은 좋아하지만 두꺼운 책들에게서 느껴지는 약간의 거부감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는 나의 고질병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페이지를 주르륵 넘겨보던 나는 '도대체 이 베트남 청년은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라는 강렬한 호기심에 이끌려 마치 원래 정해져있던 일인 듯 조용히 책의 첫 장에 한 발을 내딛었다.

 ★주인공이자 저자인 앤드류 팸은 어떤 사람?★

 그는 미국 국적의 베트남 청년이다. 어린 시절 베트남이라는 작은 땅에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격돌했던 그 시절, 오늘은 아버지가 총살당하시진 않을까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암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생 끝에 미국으로 건너와 대학을 졸업하고 안정적인 직장도 얻었지만 마음속이 뻥 뚫린 듯 한 공허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신의 뿌리를 찾아 베트남으로 자전거 여행을 떠난 이이다.  (이제 나는 그를 앤이라 부르려한다.)

 영어가 베트남어보다 편해질수록 코카콜라와 햄버거를 먹는 날이 잦아질수록 앤은 미국이란 나라의 일부가 되어간다. 하지만 미국은 그를 진정한 자신의 가족이라 인정하지 않고 어느 곳 하나 마음을 붙일 곳이 없다. 서류상의 국적은 미국. 하지만 그의 조국은 베트남. 앤의 영혼이 맘 놓고 쉴 수 있는 고향은 어느 곳일까? 앤은 그의 뿌리를 찾아 베트남으로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 그 앞에 어떠한 행복과 핑크빛 추억들이 기다릴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앤의 앞에 펼쳐질 고단한 역경과 부당한 사건들을 어렵지 않게 예견할 수 있었다. 그를 따라 여행한 베트남은 때로는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더러웠으며 같은 인간으로서 도대체 왜 저럴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정직한 곳이었다. 원래부터 베트남에 대한 호감은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정말 이 정도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느낀 당혹감은 예상보다 더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그 억울함과 설움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예쁜 이름 석 자를 목에 걸고 아장걸음으로 노란 병아리처럼 유치원으로 가는...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거쳐 이젠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살아야하는 성인이 될 때까지도 우리는 매 순간 학교와 여러 단체에 소속되어 대한민국의 일원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지극히 무난한 삶을 살아온 나에게 앤이 느꼈을 그 감정은 어쩌면 상상이상으로 더 고통스럽고 한스러운 것이었으리라. 교포라 불리며 가는 곳마다 돈을 요구받고 속임수에 속고 뼈 속까지 쓰라렸던 앤의 마음을 이제는 좀 토닥여주고 싶다.

사실 생각해보면 앤은 그리 힘든 일들을 겪으면서도 베트남이라는 자신의 고향을 싫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누런 이를 보이며 돈을 요구하는 경찰들, 교포라면 다 매국노라 생각하여 싸움을 걸어오는 사람들, 무조건 자신의 가족들을 후원해주길 바라는 철없는 이웃들까지 어느 하나 정을 붙일 수 없는 곳이었지만 그 난리 통 속에서도 그는 반짝이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슴 떨렸던 짧은 만남을,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의 자신의 조국 베트남을 찾아내 가슴 속에 담아냈다.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된 베트남의 모습을 보며 이건 고발이나 해코지의 맥락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작가의 노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이리도 당했지만 결코 미워할 수가 없었던 조국 베트남의 참 모습을 그 자체로 사랑했을 테니까 말이다. 

 길고 긴 자전거 여행을 동행하는 동안 내가 주목했던 것은 앤의 무소속으로 인한 그의 공허함과 교포인 앤의 눈을 통해 바라본 베트남의 참담한 상황이었다. 내가 하루면 벌 수 있는 돈을 한 달에 걸쳐 벌고 그 적은 액수로 온 가족이 살아가는 그 곳. 자신의 뿌리가 이 곳인데 이제 친구와 이웃들은 그를 다른 사람처럼 취급하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수십 일이 족히 넘는 여행 동안 앤이 얻은 것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는 자신이 더이상 이곳에서 환영받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으며 그 와중에도 아직 꺼지지 않은 온정과 우정의 손길을 감사히 가슴에 품었다는 것이다. 쓰라린 모습 그대로를 가슴에 담은 채 좀 더 나은 미국인이 되겠다며 집으로 돌아간 그를 이제는 좀 쉬도록 놓아주고 싶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나의 삶을 살아가게 되겠지. 

 "앤!! 오랜 여행의 여독은 이제 다 씻어냈나요? 그래, 당신의 생각대로 보다 나은 미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까? 짜디 짠 메기 국이 생각나진 않아요? 다시 한 번 그 냄새나는 곳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은 생각은 없는 겁니까? " --- 그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이겠지? 참 이상하다. 가방 속에 넣고 생각날 때마다 책을 꺼내 읽는 통에 벌써 까맣게 변한 책의 모서리들처럼 내 마음도 전부 타 들어갔다고 생각했었는데  여행을 다 끝낸 지금 이상하리만큼 뿌듯하고 행복한 느낌이 든다. 이제 나는 웃으며 소리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삼촌 앤! 나의 친구 앤! 당신이 있는 곳이 바로 당신의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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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내가 잊고 있던 단 한 사람
정채봉 지음 / 이미지앤노블(코리아하우스콘텐츠)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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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내가 잊고 있던 단 한사람]이라는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제목에서 느껴지는 쓸쓸함과 알록달록한 예쁜 그림에서 느껴지는 평온함 속에서 미묘한 괴리감을 느꼈다.  슬프면서도 따스한 이 느낌은 도대체 무엇일까? "오세암"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 덕분에 알게 되었던 정채봉님. 이제는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그 분의 딸이 그간 아버님이 쓰고 엮어놓으셨던 이야기들을 모아 출판한 책이라 들었다. 책을 읽기 전부터 선입견을 가지면 절대 안 되지만 나는 이 책은 분명히 지독히도 쓸쓸하고 슬플 것이라 예상했다. 이유 없는 망설임에 입술을 질끈 깨물고 떨리는 손끝으로 책의 첫 장을 넘겨 읽기 시작했다. 한 장씩 책을 넘길수록 그리고 그 안의 이야기가 내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여갈 수록 긴장이라는 두 글자는 햇살에 눈 녹듯 사라지고 따스함이라는 세 글자만이 내 가슴 속에 남았다.

 책 속에는 그 분이 직접 쓰신 글들도 있고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그리고 우리가 그간 알고 있던 이야기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 재해석한 글들도 있었다. 새로운 이솝우화를 읽는 듯 한 기분으로 나는 정채봉님표 우화집을 즐겁고도 기분 좋게 읽었던 것 같다. 사람이 살아가며 쉽게 잊고 지나치기 쉬웠던 진리들, 언제나 가슴에 아로새겨 죽는 순간까지도 손에서 놓아선 안 될 중요한 이야기들이 책 속에 담겨있었다. 때로는 아우를 꾸짖는 형의 목소리로, 때로는 딸의 손을 놓을 수 없는 안타까운 아버지의 목소리로 잔잔하지만 호소력 있는 그의 이야기에 푹 빠져 한참을 헤맸던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들은 발병 사실을 알고 나서 수술을 받고 투병을 하던 중 쓰신 이야기들이다. 자칫 병상일기라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으나 그 글들은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절절하지도 급박하지도 않았다. 다만 따스하고도 분명하게 삶에 대한 의지와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의 삶에 지나간 추억들이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징검다리처럼 놓아진 그 희고도 따스한 사랑의 글들을 읽으며 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거나 빙그레 웃기도하며 무사히 온전한 나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었다. 어지러웠던 생각들을 잠시 놓아두고 편안히 쉴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쓸쓸할 줄 알았던 이야기가 따스함으로 다가와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가슴 속에 남아있는 따스한 온기에 조금은 기분 좋아지는 독서였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돈과 같은 재물, 권력도 아닌 진심이 느껴지는 한 줄의 글이 아닐까 절실히 실감해본 순간이었다. 부디 이 따스함을 오래도록 가슴 속에 간직할 수 있기를, 그리고 알 수 없는 내 영혼의 방황이 끝나기를 바라며 손끝으로 느껴지는 아쉬움을 책을 한 번 꼭 안아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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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방불명자 오리하라 이치의 ○○자 시리즈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기희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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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소설을 읽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범인이 누구일까 생각하는 행복한 고민도, 도대체 어떤 트릭을 이용해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파헤치는 순간도 그 어떤 일보다 스릴있고 신난다. 그간 읽었던 추리소설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작품을 꼽으라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과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추천하고 싶다. 전자는 그 치밀한 트릭과 가슴 저미도록 깊은 사랑에 감동받았고 후자는 설마하며 차마 의심할 수 없었던 사람이 범인이었던 충격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또 기억에 남을만한 작품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며 둘러보던 중 내 눈에 띈 책이 바로 오리하라 이치의 [행방불명자]이다. 그의 작품을 만나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추리소설을 좋아한다 말하기가 참으로 부끄러웠지만 언제 어느 일에나 처음은 있는 법. 앞으로 더 자세히 알아가야겠단 생각을 하며 저자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읽어보았다. [유괴자], [원죄좌], [실종자], [침묵자]에 이른 다섯 번째 [00者] 시리즈.  거부할 수 없는 강한 이끌림에 나는 마치 마비라도 된 사람처럼 기계적으로 소설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책은 특이한 방식으로 사건을 전개해간다. 늪 근처에 살던 한 가족이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져버린 일가족 실종 사건과 도심에서 일어난 부녀자 폭행사건, 이 두 사건들은 각자 다른 이의 눈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도대체 이 두 사람은 사건에서 어떤 역할인지 글에서 주어진 그들의 직업 이외엔 더 생각해볼 겨를이 없다. 아무리 열심히 풀어내려고 해도 자꾸만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일가 실종 사건, 하나 둘 살인미수로 그쳤던 폭행사건이 마침내 사망자를 낸 부녀자 폭행사건. 두 가지 사건들이 어지러이 진행되는 동안 독서 초반에 내가 가졌던 강한 의지와 호기심은 소설 속의 깊고도 검은 늪 속으로 끊임없이 빠져들어 그 의미가 퇴색되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두 사건의 연결고리를 발견한 순간 나는 "헉"하고 마른 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 이리도 천재란 말인가? 전혀 만나지 않을 것 같았던 두 개의 사건은 어느새 하나의 탄탄한 고리로 이어져 그 결속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너는 미처 몰랐을 것이다"라는 듯 한 당당함으로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정말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게 다 수양이 부족한 탓이리라. 나는 좀 더 깊이 그리고 좀 더 민첩하게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결과를 다 알고 난 시점에서 조금 긴장이 풀리며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면 또 하나의 숨겨진 사건이었던 5년 전 일가 살인 사건과 몇 달 전의 일가 실종 사건 그리고 도심에서 일어난 부녀자 폭행사건은 결국 한 맥락이었다는 사실부터가 소름끼치도록 두렵고 작가의 천재성에 의구심을 품을 마음마저 사그라지게 만든다. 번갈아가며 바뀌는 시점과 그 눈을 통해 진행되는 사건의 상황, 독자 스스로가 직접 그 사건현장을 그려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그 마력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도 가벼운 떨림으로 손끝에 남아있었다.

 새로운 만남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더구나 이리도 작가의 천재성과 정성이 담뿍 담겨 있는 책을 만날 때에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쉽게 만날 수 있으면서도 나의 무심함으로 좋은 만남들을 농쳐버리곤 했는데 이제는 좀 더 부지런해져야겠다. 그래야 이리 대단한 책들을 더 만나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오리하라 이치라는 여섯 글자를 가슴에 아로새기며 다음엔 이 작가의 어떤 책을 읽어볼지 고민하는 지금 이 순간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그의 거침없이 치밀한 트릭!! 언젠가는 꼭 풀고 말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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