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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내가 잊고 있던 단 한 사람
정채봉 지음 / 이미지앤노블(코리아하우스콘텐츠) / 2009년 5월
평점 :
[나, 내가 잊고 있던 단 한사람]이라는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제목에서 느껴지는 쓸쓸함과 알록달록한 예쁜 그림에서 느껴지는 평온함 속에서 미묘한 괴리감을 느꼈다. 슬프면서도 따스한 이 느낌은 도대체 무엇일까? "오세암"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 덕분에 알게 되었던 정채봉님. 이제는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그 분의 딸이 그간 아버님이 쓰고 엮어놓으셨던 이야기들을 모아 출판한 책이라 들었다. 책을 읽기 전부터 선입견을 가지면 절대 안 되지만 나는 이 책은 분명히 지독히도 쓸쓸하고 슬플 것이라 예상했다. 이유 없는 망설임에 입술을 질끈 깨물고 떨리는 손끝으로 책의 첫 장을 넘겨 읽기 시작했다. 한 장씩 책을 넘길수록 그리고 그 안의 이야기가 내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여갈 수록 긴장이라는 두 글자는 햇살에 눈 녹듯 사라지고 따스함이라는 세 글자만이 내 가슴 속에 남았다.
책 속에는 그 분이 직접 쓰신 글들도 있고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그리고 우리가 그간 알고 있던 이야기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 재해석한 글들도 있었다. 새로운 이솝우화를 읽는 듯 한 기분으로 나는 정채봉님표 우화집을 즐겁고도 기분 좋게 읽었던 것 같다. 사람이 살아가며 쉽게 잊고 지나치기 쉬웠던 진리들, 언제나 가슴에 아로새겨 죽는 순간까지도 손에서 놓아선 안 될 중요한 이야기들이 책 속에 담겨있었다. 때로는 아우를 꾸짖는 형의 목소리로, 때로는 딸의 손을 놓을 수 없는 안타까운 아버지의 목소리로 잔잔하지만 호소력 있는 그의 이야기에 푹 빠져 한참을 헤맸던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들은 발병 사실을 알고 나서 수술을 받고 투병을 하던 중 쓰신 이야기들이다. 자칫 병상일기라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으나 그 글들은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절절하지도 급박하지도 않았다. 다만 따스하고도 분명하게 삶에 대한 의지와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의 삶에 지나간 추억들이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징검다리처럼 놓아진 그 희고도 따스한 사랑의 글들을 읽으며 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거나 빙그레 웃기도하며 무사히 온전한 나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었다. 어지러웠던 생각들을 잠시 놓아두고 편안히 쉴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쓸쓸할 줄 알았던 이야기가 따스함으로 다가와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가슴 속에 남아있는 따스한 온기에 조금은 기분 좋아지는 독서였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돈과 같은 재물, 권력도 아닌 진심이 느껴지는 한 줄의 글이 아닐까 절실히 실감해본 순간이었다. 부디 이 따스함을 오래도록 가슴 속에 간직할 수 있기를, 그리고 알 수 없는 내 영혼의 방황이 끝나기를 바라며 손끝으로 느껴지는 아쉬움을 책을 한 번 꼭 안아주는 것으로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