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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독서사 - 우리가 사랑한 책들, 知의 현대사와 읽기의 풍경
천정환.정종현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10월
평점 :

내가 처음 읽었던 책은 무엇일까? 엄마도 기억하지 못하시니 그 답은 알 길이 없지만, 내 오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첫 번째 동화책은
<아기 돼지 삼 형제>다. 엄마 말로는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아기 돼지 삼 형제 이야기를 줄줄 외우고 다녔다는데, 원래 부모님들은
자기 자식이 천재인 줄 아니 그냥 반 농담으로 받아들이자. 어쨌든 내가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던 건 확실하다. 학창시절 아낌없이 책을
지원해주고자 하셨던 엄마 덕분에 동화 전집부터 40권 세트 백과사전까지, 비싼 외식은 자주 못 했을 지언정 책은 부족함 없이 넘치도록 탐미했다.
평범한 나란 사람에게도 30년 넘는 독서의 역사가 있는데,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은 어떤 책을 읽으며 눈물 흘리고 공감하셨을지 궁금하곤 했다.
하루에도 수십 권씩 쏟아지는 신간 속에서 과연 어떤 책이 우리 곁을 지키며 사랑받았을까? 그 오랜 궁금증을 명쾌한 해답으로
뚫어준 <대한민국 독서사>! 어쩜 이런 복덩이가 넝쿨째 굴러왔는지, 칭찬합니다!
<대한민국 독서사>는 역사의 순간에 함께하며 각 시대를 대표한 여러 책을 통해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걸어온 온갖 희로애락 담긴 여정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해준다. 내 조국이 어떤 일을 겪고 우리 국민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책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책이라는 존재를 물성을 넘어서 얼이 담긴 영적 창작물로 접할 흔치 않은 경험, 이토록 짜릿한
순간이라니!

글자와 이름마저
빼앗겼던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자마자 화산처럼 폭발한 배움에 대한 우리 국민의 갈망은 전쟁이 벌어져도 사그라지지 않고 활활 타올랐다. 전쟁통에도
학교 수업이 진행됐다니 그 열성에 외신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지적 호기심과 배우고자 하는 욕구에 발맞추어 여러 잡지와 책이
출간되기 시작했고 별다른 놀 거리가 없던 그 시절, 수많은 문학 소년과 문학 소녀가 탄생했으며 그들이 자라 사상과 외국 문학을 접하며 목소리
높여 학생 운동을 벌이는 대학생으로 성장했다. 노동자의 처절하고 고된 삶이 화두였던 1970년대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의협의 시대였던 1980년대에는 <영웅문>이라는 전통 무협,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떠들썩했던 1990년대에는 표현의 자유를
꿈꾸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외설적인 책이 등장하기도 했고 위기와 불안감에 휩싸여 치열한 경쟁을 벌인 2000년대엔 자기계발서가 큰 사랑을
받았다.
이렇듯 한 시대를 대표한
책에서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애환과 고통은 물론 찰나의 기쁨과 가슴 깊숙이 품고 있던 욕망 혹은 열정까지 수 없이 많은 요소가 담겨
있다. 책이라는
주제로 꼼꼼하게 훑어본 대한민국의 역사는 마치 일련의 파노라마처럼 떠올라 내 가슴 속으로 쏙 들어왔다. 광복 이래 대한민국이 어떤 길을 걸어왔고
무슨 변화를 겪었는지 책을 통해 살펴볼 기회가 있었던가? <대한민국 독서사>는 한국 근대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살펴볼 소중한 경험을
제공한다. 작가의 견해도 담겨 있지만, 시대상을 기술한 부분에서는 철저한 고증을 통해 자료를 제시하여 신뢰감을 주었고 여러 사진 자료를 실어 보는 즐거움까지
충족해주어 336페이지의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내가 원래 책을 좋아하는 책순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책에 조금이라도 애정이 있고 한국
근대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책인 건 확실함! 이런 보석 같은 책을 만날 수 있다니 잠깐은 더 바랄 게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