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어하우스 - 드론 택배 제국의 비밀 스토리콜렉터 92
롭 하트 지음, 전행선 옮김 / 북로드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제목: 웨어하우스

글쓴이: 롭 하트

옮긴이: 전행선

펴낸 곳: 북로드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는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소설 《1984》에서 극단적 전체주의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준 조지 오웰. 그는 혹시 미래를 방문한 시간 여행자였을까? 개성과 자유는 물론 생명의 존엄성마저 희박한 그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블록버스터 《승리호》에서는 오염된 지구에 남은 난민과 우주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가는 부자들이 등장했다. 오염 물질 때문에 마치 안개가 낀 듯 흐릿했던 그 잿빛 지구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욱신거릴 만큼 충격이었는데... 이번에 읽은 롭 하트의 《웨어하우스》 역시 손 쓰기 힘들 만큼 안타깝게 몰락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낸다.

 

 

 

 '주문한 물품을 한 시간 내에 문 앞으로 배송해드립니다'. 주문하면 당일 혹은 다음 날 새벽에 도착하는 쿠X의 로켓배송도 대단한데, 이 업체는 주문하면 한 시간 만에 배달을 보장한다. 드론 택배 서비스로 거대 기업으로 거듭난 클라우드는 모두가 들어가고 싶어 하는 꿈의 직장이기도 하다. 한 달에 한 번,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고자 클라우드를 찾는다. 간단한 비대면 면접을 통과하면 바로 각 부서로 배정되고 이는 옷 색깔로 구분된다. 지나치게 거래 금액을 후려친 클라우드 때문에 도산한 전직 CEO 팩스턴. 그는 과거 교도관으로 근무했던 경력 덕분에 보안팀으로 배정된다. 여주인공 지니아는 학교에서 잘린 영어 선생님 행세를 하지만, 실은 클라우드의 비밀을 캐내러 온 산업 스파이. 물건을 분배하는 부서에서 일하게 된 지니아는 클라우드 중심부에 잠입하기 위해 보안팀에 있는 팩스턴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췌장암 4기로 1년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클라우드의 대표 깁슨은 쉴 새 없이 유토피아를 표방하지만, 과연 소설 속 세상은 우리가 바라던 미래일까?

 

 

 


 

 

 

"기억해요.

자유는 당신이 포기하기 전까지만 당신 것이에요."

롭 하트 《웨어하우스》 p508 중에서...

 

 

 

 이 소설의 가장 큰 묘미는 두 가지다. '지니아가 과연 클라우드의 비밀을 무사히 캐낼 수 있을지', 그리고 '지니아와 팩스턴의 깊어지는 관계'다. 지니아의 목적을 알기에 그들의 관계에 정말 진심인 팩스턴이 안쓰러운 한편, 어쩌면 지니아의 마음도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지는 건 아닌지 가슴 졸이며 보게 되는... 그리고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한 점은 작가 롭 하트가 창조한 미래의 모습이다. 최첨단 기술을 발판으로 삼아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거라는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어쩌면 미래는 우리 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 어떤 물건을 샀고 어느 장소에 들렀으며, 하다못해 몇 시에 화장실에 갔는지까지 전부 기록되는 세상이라면 소설 《1984》의 빅 브라더 버금가는 감시와 통제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순간, 지니아는 팩스턴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자유는 당신이 포기하기 전까지만 당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내 심장을 욱신거리게 한 그녀의 말. 순식간에 다가올 수십 년 후 미래엔, 그 한 마디가 부디 더 아프게 심장을 조여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아 조금 고생스러운 책이었지만, 영화화 확정 소식에 영상으로 만날 《웨어하우스》를 슬그머니 기대해본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심오하게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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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노을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2
이희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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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보통의 노을

글쓴이: 이희영

펴낸 곳: 자음과모음

 

 

 

 청소년기에 함께 살 가족을 선택할 수 있다는 발칙한 상상력으로 독자를 사로잡았던 소설 《페인트》의 작가 이희영. 그녀가 이번엔 가슴 뭉클한 가족애, 우정, 따스한 인정이 스민 멋진 성장 소설로 독자들의 마음을 두드린다. 16살에 홀로 아들을 낳아 이를 악물고 버텨내며 자리 잡은 노을이 엄마, 지혜. 그런 엄마를 위해 엇나가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18살 노을이. '짜장짬봉집'의 막내딸이자 노을이와 6년 지기인 여자 사람 친구 성하. 노을이 엄마를 5년 동안 짝사랑하며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리 잡은 성하의 오빠 성빈. 몸이 약해 괴롭힘을 당하지만 공부만은 탑 클래스인, 노을이의 친구 동우. 노을이에게 인생의 큰 교훈을 전해주는 '짜장짬봉집' 성은이의 아버지. 현실의 모든 근심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이들이 빚어내는 환상적인 하모니에 푹 빠져들게 된다. 정말 매력적인 이야기!

 

 

 

 이 책엔 소위 막장 드라마의 감초 역할인 악한 사람이나 미친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극한으로 치닫지 않아도 유쾌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써낼 수 있다면 그 작가는 이미 상당히 성공한 셈! 이희영 작가 역시 그렇다. 가족과 의절하면서까지 자식을 지켜낸 지혜. 그녀는 쥬얼리 공예로 억척스럽게 생계를 꾸려가며 노을이를 키웠다. 엄마의 그런 마음을 알기에 노을이는 바른 아이로 잘 자라주었다. 세상이 혹여 미혼모로 자신을 낳아 키운 엄마를 손가락질할까 봐 눈에 불을 켜는 노을이는 상남자다. 하지만 이런 상남자에게도 천적이 있으니, 그건 바로 단짝 친구 성하. 이성 친구인 노을이와 성하가 빚어내는 캐미가 상당하다. '쟤네 이러다 사귀는 거 아니야?'라고 내심 기대하게 만들지만, 볼수록 알쏭달쏭한 두 녀석. 등장인물이 하나같이 선하고 인정 넘치는 건 아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보통의 평범한 인간성과 의리, 인정이 이 시대엔 참으로 귀한 따스함이 아닐까 싶다. 한때 큰 중국집을 운영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던 성하 아버지의 가슴 아픈 사연과 그가 넋두리처럼 털어놓는 인생의 조언은 오래도록 귓가를 맴돌며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빈틈없이 딱 들어맞는 퍼즐을 채워 넣듯, 모든 인물과 사연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완성도가 상당히 높은 이 소설. 마지막 마침표를 마주하는 순간까지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다.

 

 

 


 

 

 

 

세상은 절대 객관식 문제가 될 수 없다.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란 뜻이다.

...

남들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 있어야 하고 이뤄야 한다는 것 말이다.

시선만 달리하면 전혀 중요하지 않거든.

때에 따라서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만도 못한 것일 수도 있어.

《보통의 노을》 중에서...

 

 

 누군가는 청소년 성장소설을 시시하다고 한다. 개인의 취향이므로 얼마든지 그렇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 이런 성장소설은 비단 자라나는 아이들만이 아닌, 마음이 여리고 아직 덜 여문 성인을 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제는 많이 단단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직은 쉽게 상처받고 아파하는 우리 마음에 빨간약을 발라줄 존재라고 할까? 《보통의 노을》을 읽다 보면 우리가 인생에서 간절히 바라며 좇는 행복이 무얼까 고민하게 된다. 인상 찌푸린 세상의 이목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인생을 꼭 함께하고 싶은 사람.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우정. 자신의 선택에 관한 확신. 부모와 자식이라는 존재. 형제와 친구라는 존재. 어쩌면 우리는 이미 행복을 손에 쥐고 있을지 모른다. 툴툴거리며 엄마를 걱정하는 노을이와 함께 지켜본 그들의 인생은 우리의 인생과 참 많이 닮았다. 책을 덮으며 소설 속 모두의 행복을 빌었다. 그리고 가슴을 따스하게 적신 싸르르함에 문득 보고 싶은 여러 얼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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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맞지 않는 아르테 미스터리 18
구로사와 이즈미 지음, 현숙형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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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간에 맞지 않는

글쓴이: 구로사와 이즈미

옮긴이: 현숙형

펴낸 곳: 아르테

 

 

 

'사회에서 낙오된 실패자. 쓰레기. 밥만 축내는 식충이. 돈벌레. 루저... 썩을 놈'

 안타까운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요즘, 혀를 끌끌 차게 하는 인두겁을 쓴 괴물들이 속출하고 있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 자들. 한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회의 암적인 존재라 생각하는 부류는 또 있다. 사회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방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사람들. 사회는 그런 은둔형 외톨이나 니트족에서 낙오자의 딱지를 붙이고 위험한 혹은 불필요한 잉여 집단이라 단정 짓는다. 피가 섞인 부모조차 골칫거리로 여기는 그들을 과연 온전한 인간이라 인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런 의문에서 이 소설은 시작되었을 거다. 구로사와 이즈미의 『인간에 맞지 않는』은 마치 그런 낙오자를 처단이라도 하듯, 이형성 변이 증후군을 퍼트리며 상상조차 하기 힘든 끔찍한 현실을 연출해낸다.

 

 

 

 원인 불명 질환. 사회적으로 낙오한 후 스스로 방에 숨어버린 10대, 20대들이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벌레로 변하기 시작한다. 전염성과 전파 경로, 치료법 등 모든 게 불투명한 상황에서 국가는 서둘러 그들을 손절하는데... 벌레로 변이된 자는 가족의 사망 신고로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심할 경우 가족의 손에 무참히 살해당한다. 50대 주부 미하루의 아들 유이치도 어느 날 징그러운 벌레로 변해버렸다. 흡사 지네 혹은 거미와 같이 여러 다리를 지닌 곤충으로 변해버린 아들. 하지만 미하루는 자식을 포기할 수 없었다. 눈엣가시였던 아들 유이치를 이참에 치워버리려는 남편과 끊임없이 충돌하며 미하루는 힘겹게 아들을 지켜낸다. 누구도 응원해주지 않는 괴로운 상황 속에서 미하루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인 '물방울회'에 참석해 마음을 다스리며 절대 아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과연 유이치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소설이 내내 재밌지는 않았다. 유이치를 없애려는 아버지를 보며, 부정이란 저렇게 지독하게 냉정할 수 있는가 한탄했고... 바보 같을 정도로 꿋꿋하게 아들을 지켜내는 미하루의 모정을 과하다 여기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뭉클했다. 이 소설은 미하루가 벌레로 변한 아들을 지켜내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울림은 마지막 장면에 포진해있다. 부모는 죄가 없다. 하지만 자식도 죄가 없다. 서로를 100% 이해할 순 없겠지만, 아무리 다른 방식이라도 서로에 관한 마음이 진심이라면 반드시 통하게 되어 있다는 걸 확인했던 시간. 제대로 날린 '역지사지' 핵 펀치에 고소해하며 혀를 끌끌 차기도! 가장 좋았던 건 유이치와 미하루가 마침내 마음의 벽을 허물던 부분이다. 역자님이 순간의 감정을 오롯이 표현하고자 심혈을 기울였다는 그 찰나의 장면.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었다. 울컥...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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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이 그랬어 트리플 1
박서련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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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호르몬이 그랬어

《트리플 시리즈》

글쓴이: 박서련

펴낸 곳: 자음과모음

 

 

 다양한 장르에서 참신한 시도로 풍성한 작품을 선보이는 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이번에 또 흥미로운 기획을 펼쳤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다는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 은모든, 배기정, 임국영, 한정현 작가라는 빵빵한 라인업이 형성된 가운데, 박서련 작가가 가장 먼저 이 시리즈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체공녀 강주룡>, <마르타의 일>, <더 셜리 클럽> 등 제법 굵직한 작품은 선보인 그녀이기에 과연 짧은 단편 모음집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풀어놓을지 정말 궁금했다. 장편과 단편을 모두 잘 쓰기란 상당히 어려운 법.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100m 달리기를 10번쯤 내리 달리는 속도로, 탄탄한 기승전결은 물론 독자의 가슴에 무언가 남겨야 한다면... 우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그런데 이 어려운 일을 거뜬히 해낸 박서련 작가! 역시는 역시다.

 

 

 

 애인 1과 2 사이에서 야릇한 연애를 즐기던 주인공이 대학 시절 뜨거운 한 때를 보낸 동성 친구 '예'의 연락을 받고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다시 바람은 그대 쪽으로>. 소설 속 소설이 사실인지, 아니면 사실이 그대로 소설이 된 것인지 아리송하면서도 상당히 실감 나서 재밌게 읽었다. '넌 내게 모멸감을 줬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다음 이야기에서는 안타깝고 찌질한 백수 아가씨가 등장한다. 10살이나 어린 남자와 연애하는 엄마와, 되는 일 하나 없는 상황에서 오래 사귄 연인에게 차인 딸. 그 옛날 사랑했던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나갔던 딸은 뒤통수를 제대로 맞고 객기 아닌 객기를 부린다. 딸의 잘못이 아닌 걸 어쩌겠어! 범인은 호르몬! <호르몬이 그랬어>. 세 번째 이야기의 제목 <총_塚>은 무덤을 뜻한다. 이 상황에서는 납골당이긴 하지만... 지독히도 가난했던 생활 속에 서로가 있기에 버틸 수 있었던 연인이 한쪽의 죽음으로 모든 걸 잃게 된다. 납골당 관리비를 낼 수 없었던 남자는 한 줌 재로 도기에 담긴 옛 연인을 조심스레 가방에 담아 도망친다. 그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켜켜이 서려 있던 연인과의 기억에 가슴이 미어지다가, 황당하면서도 안타까운 결말에 탄식하고 말았다. 마지막 이야기, 에세이 <... 라고 썼다>에서는 글과 관련된 박서련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대략 10여 년 전에 쓴 이 책에 담긴 소설 3편을 참 미워했으며 어떤 심정으로 고쳤는지 털어놓는 고해성사 같은 글로 마침표를 찍는다.

 

 

 


 

 

조금 모호해도 아름다운 문장을 쓰고 싶었고

감히 아무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짓고 싶었다.

지금은 정확한 문장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며

누구에게나 공감의 여지가 있는 이야기를 찾아다닌다.

《호르몬이 그랬어》, '...라고 썼다' 중에서

 

 

 

 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참 재밌었다'. '재미'라는 원초적인 단어로 감상평을 표하기엔 박서련 작가에게 좀 실례일 것 같지만 정말 재밌었다. 힘차게 꿈틀거리는 활어처럼, 문장 하나하나가 살아서 파도처럼 일렁이는 느낌. 그 파도를 따라 주인공의 속이 울렁거릴 땐 같이 속이 쓰리고, 주인공이 너무 슬퍼 눈물조차 흘리지 못할 땐 대신 눈물을 글썽였다. 단편 소설을 읽을 때면, 이 작품을 장편으로 늘이거나 드라마로 제작하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곤 하는데 박서련 작가의 글은 좀 달랐다. 10여 년 전에 쓴 소설을 복잡한 심경으로 고치고 또 고쳤다고 했지만, 내가 만난 그녀의 소설들은 마치 처음부터 그 모습 그대로 태어났고 오히려 어딘가 손대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어쩌면 별것 아닌 듯 희미해졌을 이야기들이 활자로 찍혀 내 가슴에 또렷이 남았던 시간. 모호하지만 아름다운 문장을 쓰고 싶었고 감히 아무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짓고 싶었지만, 이젠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를 찾는다는 박서련 작가. 그게 그녀의 소망이라면, 그녀는 이미 꿈을 이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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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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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금부터의 내일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

글쓴이: 하라 료

옮긴이: 문승준

펴낸 곳: 비채

일본 소설을 선택할 때, 당신은 어떤 기준으로 책을 고르시는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주기적으로 탐독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매일 똑같은 밥만 먹고는 살 수 없는 법!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듯 새롭고 짜릿한 작품을 찾아 헤맬 때, 어두운 망망대해에서 한 줄기 등불처럼 우리를 이끌어줄 좌표가 있다면? 그건 바로 나오키상! 그 상을 거머쥔 작품이나 그 시리즈 혹은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면, 약간의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지만 늘 중간 이상의 수작이라고 믿고 읽어도 좋다. 추리 소설이 상당히 읽고 싶었던 어느 오후, 바람처럼 나타난 탐정 사와자키. 『내가 죽인 소녀』 란 작품으로 나오키상을 받은 이 유명한 시리즈를 최신간인 『지금부터의 내일』로 만나게 되었다. 50대에 접어든 외로운 탐정 사와자키가 이번엔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될까?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 간판을 보고 들어온 의뢰인에게 자신을 사와자키라 소개하는 주인공은 늘 사정을 설명해야 한다. 동업자였던 와타나베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무덤은 나오지만, 정말 죽은 것인지는 모호한...), 사와자키는 사무소의 이름을 바꾸지 않은 채 계속 탐정 영업을 이어가는 중. 유명한 저축은행의 지점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의뢰인 모치즈키 고이치는 대출 예정 고객인 아카사카 요정 여주인의 사생활 조사를 부탁한다. 의뢰 비용은 30만 엔. 사와자키는 즉시 조사에 착수하지만, 여주인이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당황한다. 설상가상으로 의뢰인과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 사와자키는 할 수 없이 의뢰인의 근무처인 은행으로 찾아가는데, 어라? 2인조 무장 강도가 총을 들고 은행을 털러 나타난다. 생사를 오가는 긴급한 상황에서 은행 직원과 한 잘생긴 청년의 현명한 대처로 위기를 무사히 모면한 사와자키. 하지만 경찰이 확인차 열어본 금고에서 은행이 보유할 수 없는 액수의 큰돈이 발견되고 모치즈키 지점장이 실종되며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다. 지점장의 자택 욕조에서 발견된 누군가의 시신. 사와자키 탐정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냐고 묻는 잘생긴 청년 가이즈의 폭탄 발언.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르는 새로운 사건과 뜻밖의 인물 관계. 과연 사와자키는 의뢰인인 지점장을 무사히 찾아내고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










423페이지의 장편 소설이지만, 44장으로 잘게 쪼개 빠르게 전개하는 이야기. 다음 장에서는 또 어떤 진실이 밝혀질지 궁금한 마음에 '조금만 더 읽어 보자'라는 마음으로 책을 오래도록 손에 붙잡고 있었다. 미칠 듯이 소름 돋는 반전은 없었지만, 잔잔한 반전과 치밀한 전개로 진실에 다가서는 과정이 상당히 흥미진진했던 소설. 등장인물이 많아 조금 헷갈릴 때면 책 앞에 실린 등장인물 설명 페이지가 도움이 되었다. 사와자키의 현재 근황을 알게 되니 지난 세월,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슬그머니 궁금해진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내가 죽인 소녀>, <안녕, 긴 잠이여>, <천사들의 탐정>,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앞서 출간된 5권의 책에 담겨 있을 사와자키의 과거로 차근차근 역주행을 시작할 것 같은 예감. 큰 지진을 겪은 후, 사와자키는 담배를 입에 물고 말한다.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살았구나! 사와자키의 건재함을 확인한 강렬했던 마지막 장면. 그건 다음에 또 만나자는 약속이겠지? 『지금부터의 내일』이라는 제목처럼 이어질 그의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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