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호르몬이 그랬어 ㅣ 트리플 1
박서련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평점 :
제목: 호르몬이 그랬어
《트리플 시리즈》
글쓴이: 박서련
펴낸 곳: 자음과모음
다양한 장르에서 참신한 시도로 풍성한 작품을 선보이는 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이번에 또 흥미로운 기획을 펼쳤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다는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 은모든, 배기정, 임국영, 한정현 작가라는 빵빵한 라인업이 형성된 가운데, 박서련 작가가 가장 먼저 이 시리즈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체공녀 강주룡>, <마르타의 일>, <더 셜리 클럽> 등 제법 굵직한 작품은 선보인 그녀이기에 과연 짧은 단편 모음집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풀어놓을지 정말 궁금했다. 장편과 단편을 모두 잘 쓰기란 상당히 어려운 법.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100m 달리기를 10번쯤 내리 달리는 속도로, 탄탄한 기승전결은 물론 독자의 가슴에 무언가 남겨야 한다면... 우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그런데 이 어려운 일을 거뜬히 해낸 박서련 작가! 역시는 역시다.
애인 1과 2 사이에서 야릇한 연애를 즐기던 주인공이 대학 시절 뜨거운 한 때를 보낸 동성 친구 '예'의 연락을 받고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다시 바람은 그대 쪽으로>. 소설 속 소설이 사실인지, 아니면 사실이 그대로 소설이 된 것인지 아리송하면서도 상당히 실감 나서 재밌게 읽었다. '넌 내게 모멸감을 줬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다음 이야기에서는 안타깝고 찌질한 백수 아가씨가 등장한다. 10살이나 어린 남자와 연애하는 엄마와, 되는 일 하나 없는 상황에서 오래 사귄 연인에게 차인 딸. 그 옛날 사랑했던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나갔던 딸은 뒤통수를 제대로 맞고 객기 아닌 객기를 부린다. 딸의 잘못이 아닌 걸 어쩌겠어! 범인은 호르몬! <호르몬이 그랬어>. 세 번째 이야기의 제목 <총_塚>은 무덤을 뜻한다. 이 상황에서는 납골당이긴 하지만... 지독히도 가난했던 생활 속에 서로가 있기에 버틸 수 있었던 연인이 한쪽의 죽음으로 모든 걸 잃게 된다. 납골당 관리비를 낼 수 없었던 남자는 한 줌 재로 도기에 담긴 옛 연인을 조심스레 가방에 담아 도망친다. 그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켜켜이 서려 있던 연인과의 기억에 가슴이 미어지다가, 황당하면서도 안타까운 결말에 탄식하고 말았다. 마지막 이야기, 에세이 <... 라고 썼다>에서는 글과 관련된 박서련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대략 10여 년 전에 쓴 이 책에 담긴 소설 3편을 참 미워했으며 어떤 심정으로 고쳤는지 털어놓는 고해성사 같은 글로 마침표를 찍는다.
조금 모호해도 아름다운 문장을 쓰고 싶었고
감히 아무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짓고 싶었다.
지금은 정확한 문장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며
누구에게나 공감의 여지가 있는 이야기를 찾아다닌다.
《호르몬이 그랬어》, '...라고 썼다' 중에서
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참 재밌었다'. '재미'라는 원초적인 단어로 감상평을 표하기엔 박서련 작가에게 좀 실례일 것 같지만 정말 재밌었다. 힘차게 꿈틀거리는 활어처럼, 문장 하나하나가 살아서 파도처럼 일렁이는 느낌. 그 파도를 따라 주인공의 속이 울렁거릴 땐 같이 속이 쓰리고, 주인공이 너무 슬퍼 눈물조차 흘리지 못할 땐 대신 눈물을 글썽였다. 단편 소설을 읽을 때면, 이 작품을 장편으로 늘이거나 드라마로 제작하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곤 하는데 박서련 작가의 글은 좀 달랐다. 10여 년 전에 쓴 소설을 복잡한 심경으로 고치고 또 고쳤다고 했지만, 내가 만난 그녀의 소설들은 마치 처음부터 그 모습 그대로 태어났고 오히려 어딘가 손대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어쩌면 별것 아닌 듯 희미해졌을 이야기들이 활자로 찍혀 내 가슴에 또렷이 남았던 시간. 모호하지만 아름다운 문장을 쓰고 싶었고 감히 아무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짓고 싶었지만, 이젠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를 찾는다는 박서련 작가. 그게 그녀의 소망이라면, 그녀는 이미 꿈을 이룬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