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가들의 필체를 좋아합니다. 소설 또는 시라는 개념이 글씨로 구현된 듯한 그런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쓰는 작가들. 그들의 글씨는 자못 섹시하기도 합니다. 마치 이상이나 김유정이 그 시대에 썼을 법한 그런 글씨. 내가 가진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는 김연수 작가의 사인이 들어 있습니다. 읽기 전부터 마음이 들떴습니다.

  소설집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읽습니다. 완독하지 않은 채로 밑줄 그은 부분을 기록해 두고 싶어 블로그 창을 엽니다.

  첫째 이야기는 헤어진 남녀 중 여자가 남자에게 정말 오랜만에 연락해서 자기가 선물한 비싼 시계를 돌려 달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남자는 여자가 진상 짓을 한다면서 '그 태그호이어 이야기를 좀 해 보자'며 둘의 사연을 펼쳐 보여줍니다. '그 태그호이어 이야기를 좀 해 보자'는 문장에 밑줄 좍. 이런 시골스러움과 도시스러움의 중간쯤 되는 구수한 시니컬함에 나는 깜빡죽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의 한 대목은 내 마음을 들여다본 듯해서 울컥합니다.

  '인내심이란 뭔가 이뤄질 때까지 참아내는 게 아니라 완전히 포기하는 일을 뜻했다. 견디는 게 아니라 포기하는 일.' p.47

  '거기 둔치 주차장에 주차한 뒤, 차 안에 앉아 강 저편 아파트 단지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중학교 시절에 품었던 다채로운 장래의 꿈들에 대해 생각했다. 제일 먼저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고, 그 다음에는 만화가였다. 그즈음, 성장 호르몬이 집중적으로 분비되면서 장래희망이 들쑥날쑥했다. 하루는 꽃집 주인이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가 그 다음날에는 외교관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 되어 비로소 시인이 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엄마는 시인이 되지 못하고 결국 내성적인 쌍둥이와 말 못 하는 자폐아의 엄마가 됐다. 어떤 여중생이 나중에 어른이 되면 내성적인 쌍둥이와 말 못 하는 자폐아의 엄마가 되려는 꿈을 꾸겠는가.'p.50-51

  이 작가가 내 스타일임을 매번 다시 확인하곤 하는 행복한 시간.

  세 번째 이야기가 표제작인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인데 대단히 로맨틱하다는 것 정도로 글을 줄이면서 낚싯줄을 길게 드리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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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흙 2014-12-13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낚싯줄을 거두다___영화감독과 세상의 끝으로 여행을 떠난 이모는 한때 영화배우였다. 두 사람의 세상의 끝은 서귀포였다. 세 달 동안 두 사람이 한 방에 누워 들은 빗소리는 사월엔 미 정도의 높이였고, 칠월에는 솔 정도로 높아졌더란다. 더 높은 소리를 듣지 못한 건 영화감독의 아내가 찾아왔기 때문이었단다. 영화감독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는 신파적인 반전이 이어지고, 이모는 가족의 강권에 못이겨 뱃속의 아이를 지우고 미국으로 가서 파멜라로 살았더라는 신파적인 이야기. 그런데 참...참 좋다. 이런 스타일리시한 신파ㅎ

2014-12-13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3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3 20: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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