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로이 대산세계문학총서 75
사무엘 베케트 지음, 김경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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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어린이/청소년 대상의 책 읽기에 길들여져 쉽게 전해지는 재미라든가 이해 가능한 내러티브에만 반응을 하게 된 것인지, 이 책, 계속 눈과 입과 머리에서 맴돌기만 하고 잘 빠져들지를 않았다. 들었다 내려놓았다 몇 차례 하다가 마침내 빠져드는 순간, 뭔가 도전에서 성공한 것 같은 성취감이, 불과 수십 쪽을 읽은 단계에서 섣부르게 찾아왔다.  

그리고 내처 읽었다. 단락 구분 없이 마냥 채워진 134쪽은 숨을 쉴 수 없게 했고, 독서를 멈출 수도 없게 했다. 나는 지쳐 가면서 끊임없이 읽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머물렀던 베케트에의 얕은 독서가 한 발자국 더 나아갔고, 뭔지 모를 둔중한 독서의 희열도 간만에 찾아와 너울거렸다. 조금만 집중이 흐트러져도 끝간 데 없이 멀리 날아가 버리는 그 어떤 끈을 잡고 더듬거리며 주인공인 몰로이가 그토록 가고자 했던 익숙한 '읍' 혹은 '어머니'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나 몰로이처럼 나도 어딘지 모르는, 내게 익숙한 읍에서 먼 낯선 곳인지 혹은 바로 그 읍인지도 모른 채 비슷한 그곳들을 거듭 거듭 방황하고 뱅뱅 돌았다. 

독서하는 자의 본분을 챙기느라 시도때도 없이 나타나는 베케트 류의 섬뜩한 아포리즘에 연필로 밑줄을 그어가며, 도대체 몰로이 너는 누구냐, 네 있는 곳이 어디냐, 너는 진정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 댔다. 그리고 그 되풀이되는 작업에 지칠 때쯤 1부가 끝났다. 2부는 모랑의 이야기다. 누군가로부터 007 류의 모호한 지시를 받아 그 일을 수행하는 모랑에게 몰로이를 찾으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왜 몰로이이며, 몰로이를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랑은 알 수 없다. 혹은 들었는데 잊어버린 건지도 모른다고 책은 이야기한다. 그의 여정 또한 몰로이와 꼭 닮았다. 줄 달린 모자, 자전거, 다리의 통증 또는 장애와 목발, 하녀, 아들... 아니, 처음에는 전혀 닮지 않았었는데 나중에는 놀랄 만큼 닮아 갔다. 어느 순간 몰로이와 모랑를 분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독자! 심지어 나 자신도 그들과 닮았다는 걸 느끼는 서늘함. 

주인공들은 타인과,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소통이 되지 않는다. 언어는 극히 제한적이고, 왜곡시키고, 파멸로 이끄는 부적절한 도구이다. 그리고 삶이란 것도 그렇다. 베케트를 상징하는 부조리가 또한 삶의 진실이다. 우리는 집, 가정, 어머니라는 존재로 회귀하고자 하나 그것들은 지극히 가변적이고 존재하지 않는다. 내 땅이, 적어도 한쪽 방면으로,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사실이 나에겐 전혀 싫지 않았다. 그리고 먼저 물에 젖지 않고서는, 그 다음에 빠지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방향이 적어도 한 곳이 있다는 느낌은 나에게 아늑했다.101쪽. 바다를 발견했을 때 걷기조차 불가능해진 몰로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나마 부족하나마 경계라는 걸 보여주는 바다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몰로이가 순간 십분 이해됐다. 실로 방향성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건가? 삶에서?  

베케트는 희곡 작가로 더욱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대표작인 <고도를 기다리며>가 <몰로이>, <말론 죽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의 3부작을 집필하면서 느낀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휴식의 일환으로 가볍게 써낸 작품이었다고 한다. 그가 모국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를 택해 써 낸 작품임을 감안하고 읽어서인지 느낌이 더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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